제 90장. 모두 함께. -02
절맥으로 고통스러워했다는 사실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는 걸 곽춘도 알고 있었다.
쇠약한 모친과 함께 무상문을 방문한 쌍둥이 형제를 안내한 게 바로 그였다.
때문에 지금처럼 건강한 모습을 보게 되어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좌절감도 느꼈다.
아무리 노력해도 쌍둥이 형제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정신이 딴 데 가 있구나.”
“헙! 죄송합니다!”
“원래 반복 수련이 지겹긴 하지. 근데 노력 없이 얻어지는 건 없어. 멋들어진 초식도, 환상적인 움직임도 다 끝없는 반복 수련 끝에 얻어지는 결과물이야. 대충 하면서 결과가 완벽하게 나오길 바라는 건 너무 욕심이지 않을까?”
“시정하겠습니다!”
곽춘이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강하게 때렸다.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서였다.
그와 동시에 주위에 있던 아이들도 긴장했다.
곽춘에게 말했지만 자신들에게도 하는 말임을 눈치로 알아들은 것이었다.
더불어 반호진의 말에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노력과 결과가 비례하지 않는 게 세상의 이치인데 노력마저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달콤한 결실을 맺을 리가 없었다.
“부러울 거야. 근데 시작점이 다른 건 어쩔 수 없어. 모두가 똑같아. 유리한 사람이 있으면 불리한 사람이 있지. 그렇다고 죽어라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추월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희망찬 얘기를 해 주고 싶지만 현실이 냉혹하다는 걸 나보다 너희들이 더 잘 알 거야.”
꾸욱.
이어지는 반호진의 말에 아이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표정 역시 달라졌다.
반호진의 말대로 사회의 냉혹함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였다.
특히나 부모라는 그늘이 없는 그들에게 세상은 더더욱 비정했다.
“내가 해 주고 싶은 말은 딱 하나야. 좌절하지도, 허황된 꿈을 꾸지도 마.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할 수 있는 만큼만 노력해. 그러다가 인생역전의 기회가 오면 무조건 잡고. 살다 보면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하잖아? 근데 그 기회라는 건 준비된 이만이 알아차리고 붙잡을 수 있어.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노력해. 이 정도는 너희들도 할 수 있잖아?”
“옙!”
“알겠습니다!”
냉정하다 말할 수 있겠으나 반호진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이룰 수 없는 환상을 심어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냉정하게 현실을 짚어 주는 게 아이들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다만 여지는 두었다.
기적이나 기연처럼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찾아올 수도 있었으므로.
‘내가 바로 그런 경우고.’
아직도 반호진은 자신이 왜 과거로 돌아왔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정확하게 몰랐다.
단지 짐작만 할 뿐.
그리고 그 말은 달리 말하면 다른 이들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는 걸 뜻했다.
“차합!”
“이야압!”
조금 전보다 확연히 높아진 집중력에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의 조언이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아서였다.
“벌써 지친 거야?!”
“아, 아닙니다!”
“공력이 많다고 지금 체력단련을 소홀히 하는 건가!”
뒤쪽에서 들려오는 서조운의 노성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어째 지금 하는 말이 익숙해서였다.
예전에 서조운에게 했던 것 같은 말을 들으며 반호진은 아이들의 자세를 하나하나 교정해 주었다.
‘서로에게 자극이 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직접 보이지는 않았으나 기감으로 느껴졌다.
백휘경, 백휘성 형제가 이쪽을 힐끔거리는 것을.
내공이나 무공은 재능의 영역이지만 체력은 달랐다.
그걸 알아서인지 쌍둥이 형제의 두 눈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
월! 워우월!
“어째 부모보다 더 크는 것 같다?”
이른 아침 반호진은 산책을 나왔다.
그의 원대한 꿈 중 하나가 바로 한가롭게 사는 것이지 않았던가.
반호진은 바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늘 아침도 산책으로 산뜻하게 시작했다.
그리고 옆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삼형제가 뒤따랐다.
“어릴 때부터 잘 먹여서 발육이 좋은 건가.”
신나서 꼬리를 흔들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삼형제를 보며 반호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들개였던 부모보다 더 큰 것 같아서였다.
암컷인 어미보다 수컷인 자식들이 더 큰 게 이상하지는 않으나 문제는 아비보다도 더 크다는 점이었다.
“뭐, 건강하게 잘 컸으면 됐지.”
이제는 성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웬만한 개들보다 덩치가 큰 게 삼형제였다.
하지만 성격은 여전히 새끼 때와 똑같았다.
여전히 반호진만 보면 좋아서 배를 뒤집어 깠다.
“목장도 잘 지킨다고 하니.”
반호진의 발걸음이 뒷산에 만든 목장으로 향했다.
말뚝으로 크게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규모가 작지는 않았다.
게다가 종류도 다양했다.
말과 소를 비롯해서 노새와 당나귀, 염소, 양, 닭, 오리가 끼리끼리 모여서 목장을 돌아다녔다.
“아주 좋아.”
평화로운 목장의 풍경에 반호진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평화야말로 반호진이 그토록 바라던 꿈이었다.
비명이 난무하고, 피가 튀기며, 살기 가득한 전장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싸움과 전투는 할 만큼 했기에 이제는 지루하더라도 평화가 좋았다.
멍!
그때 일동이가 한 차례 크게 짖고는 어딘가로 달려갔다.
잠시 후 일동이의 입에는 축 늘어진 족제비 한 마리가 물려 있었다.
죽은 지 제법 시간이 흘렀는지 피는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네가 잡았다고?”
왈!
“그래. 잘했다.”
칭찬해 달라는 듯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꼬리를 쉴 새 없이 흔드는 일동이의 모습에 반호진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동시에 삼형제의 입맛이 꽤 고급이 되었다는 걸 느꼈다.
야생의 들개였으면 진즉에 뜯어 먹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굳이 잡아먹을 필요가 없다는 걸 뜻했다.
“문주님!”
“한륭이구나.”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나야 잘 잤지. 근데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해가 뜨기는 했으나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아침 식사까지 시간이 반 시진도 더 남아 있었기에 반호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애들 밥을 챙겨 주려고요.”
“누가 일찍 나오라고 시켰어?”
“아니요. 제가 좋아서 일찍 나온 거예요. 아침에 체력단련도 할 겸해서요.”
한륭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절대 누가 시켜서 나온 게 아니었기에 한륭은 극구 부인했다.
“시간이 남으면 좀 쉬지.”
“한 번 늘어지면 계속 늘어져서요. 또 오랫동안 무상문에서 일하고 싶기도 하고요.”
“대우가 나쁘지는 않지?”
말수가 별로 없는 한륭과 단둘이 대화할 기회가 드물었기에 반호진은 이참에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되기도 했고.
또 아이들의 속내가 궁금하기도 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처우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일하는 아이들은 반대일 수도 있었다.
“엄청 좋아요. 오래오래 일하고 싶을 정도로요. 거기다 무공도 가르쳐 주시잖아요.”
“무공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 무공과 체술의 중간이라고나 할까.”
“다른 곳은 그마저도 없으니까요. 오히려 어떻게든 적은 금액으로 부려 먹으려고 해요. 고아라서 더 거리낌 없이 굴리고요. 그런 곳들에 비하면 무상문은 너무 좋아요.”
“내 앞이라고 너무 금칠하는 거 아냐?”
“절대 아니에요. 만약 그랬다면 저 스스로 이렇게 일찍 나오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저는 문주님이 오래오래 이곳에 계셔 주셨으면 좋겠어요.”
한륭이 반호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심으로 그는 무상문이 오래가길 바랐다.
단순히 돈을 버는 걸 넘어 반호진은 그 이상을 꿈꾸게 해 주었기에 한륭은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었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무상문이 길게 뿌리를 내려 동생들도 같이 일하기를 바랐다.
“오래오래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라.”
“무상문은 정말 좋은 곳이거든요. 이런 곳이 어떻게 있을까 싶을 정도로요.”
“어쨌든 만족한다는 뜻이지?”
“네.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같은 생각이에요. 부총관이랑 누나들도 마찬가지고요.”
반호진이 딱히 기분 나빠 하지 않아 보이자 한륭은 조심스레 속내를 조금 더 드러내 보였다.
여전히 어렵고 무서웠지만 그와 동시에 한륭은 반호진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반호진이 보여 준 모습을 보면 신뢰할 수밖에 없기도 했고.
“기쁜 말이네.”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야. 개인적인 생각은 누구나 가질 수 있으니까. 더구나 내가 물은 걸 대답한 거잖아? 그러니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지. 다만 내가 처음에 만났을 때 했던 말 기억하니?”
“무리하지 말고, 몸조심하면서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잘 기억하고 있네.”
반호진이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다행히 잘 기억하고 있어서였다.
“머리가 나빠서 매일 한 번씩 곱씹고 있어요. 이런 말을 들은 게 처음이라서 조금 감동 받기도 했고요.”
“곱씹을 것까지는 없고. 너나 나나 똑같이 몸이 재산이야. 다치면 어떤 대접을 받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테고. 그러니까 본인의 몸은 각자가 챙겨야 해. 성실한 건 좋지만 미련하게 할 필요는 없어. 그건 내 쪽에서 사절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리알이나 계란 좀 가져가. 처치 곤란할 정도로 많다고 하던데.”
“알겠습니다.”
한륭은 반호진의 선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여유가 많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한륭은 군말 없이 바구니를 가져와 계란과 오리알을 적당히 담아서는 집으로 되돌아갔다.
“책임감이라.”
멀어지는 한륭의 뒷모습을 보며 반호진은 중얼거렸다.
새삼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이들이 많아졌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단순히 동생들을 챙기는 걸 넘어 이제는 식구들을 신경 써야 했다.
특히 한륭이 일자리를 걱정하는 게 반호진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망할까 걱정되는 수준처럼 보인단 말이지.”
한륭의 관점에서는 위태로워 보인다는 걸 뜻했기에 반호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나 동생들은 그의 재산이 상당하다는 걸 알지만 황매향이나 곽춘, 한륭 등등은 달랐다.
그래서 반호진은 이제라도 서서히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
휘이익! 휘익!
이런저런 상념에 빠진 채로 걸어가길 얼마.
뒷산의 구석진 곳에서 홀로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유호량의 모습이 보였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반호진 정도의 고수에게 이 정도 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편안하게 유호량의 도무(刀舞)를 지켜봤다.
“많이 나아졌네.”
보는 순간 반호진은 알았다.
유호량이 그의 조언을 십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얼마 안 된 시간이었지만 유호량의 도무는 지난번에 봤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미래가 또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네.”
***
휙. 휙. 휙.
산처럼 쌓여 있는 서신들이 허공을 갈랐다.
고급스럽게 밀봉되어 있는 서신을 반호진이 확인도 안 하고 던져 버리는 중이었다.
“양이 줄지를 않네요.”
“그러게.”
“뭔 놈의 연회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자식의 생일, 결혼식, 고희연. 심지어 모임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그러게나 말이다.”
서조운의 투덜거림에 반호진이 동조했다.
적어도 이 부분에 한해서는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처음에야 몇 번 뜯어 봤으나 나중에는 확인도 하지 않았다.
굳이 내용을 보지 않아도 어디서 보냈는지만 확인해도 왜 보냈는지 짐작이 갔다.
“이제는 형님 성격에 대해서 잘 알 텐데 말이죠.”
“알면서 보내는 거야.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보로. 되면 좋고, 아님 말고.”
“그게 더 기분 나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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