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9장. 답은 늘 가까이에. -03
처소로 돌아온 반호진은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서 두 눈을 감았다.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을 확실하게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찾아왔기에 반호진은 진심으로 놀랐다.
더불어 안타까웠다.
하필이면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깨달음이 찾아와서였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만큼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 게 깨달음이었기에 반호진은 명상을 시작하면서 욕심을 버렸다.
‘기회가 꼭 이번만 있는 건 아니니까.’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었다.
그리고 무인에게 있어 화는 주화입마를 뜻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욕심을 버리고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번 왔으니 또 올 수도 있는 거니까.’
반대로 영영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모든 걸 순리에 맡겼다.
‘얽매임. 틀. 고집.’
깨달음이 찾아왔다고 해서 그 순간 모든 걸 알게 되는 건 아니었다.
또한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자각과 이해였다.
깨달음이 찾아왔다는 걸 알아차리는 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바로 그 깨달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더니.’
생각을 정리하던 반호진이 두 눈을 감은 채로 실소를 흘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조언을 해 주다가 깨달음이 찾아오다니.
심지어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정작 얽매어 있던 건 나였지.’
반호진은 반쪽짜리 기형검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반쪽짜리이긴 하나 이 기형검으로 반호진은 북해빙궁주를 잡았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반호진이 쌓아 온 무공의 정수라고 할 수 있었다.
한데 그 반쪽짜리 기형검을, 겨우겨우 만들어 낸 기형검을 반호진은 흩어 버렸다.
우우우웅.
강제로 만들려고 한 것부터 이미 틀렸다.
애초에 완성될 수가 없는 길을 갔던 것이다.
그걸 반호진은 이번에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쌓아 왔던 걸 미련 없이 털어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순서가 잘못되었어. 검을 억지로 형상화하려고 하면 안 돼.’
가부좌를 틀고 있는 반호진의 가슴 앞에서 눈부신 금광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하나의 형상을 이루어 나갔다.
반호진은 일부러 검을 떠올리지 않았지만 명치 앞의 허공에서 생성된 황금빛은 자연스럽게 검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동시에 주변의 대기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반호진의 가슴 앞에서 생성된 검에 동조하듯 크게 진동했던 것이다.
파아앗!
그와 동시에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광이 더욱 짙어졌다.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듯 사방팔방에 눈부신 금광을 흩뿌렸다.
스르륵.
그리고 반호진이 눈을 떴다.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두 눈만 뜬 반호진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허공에 떠오른 검이 완벽한 기형검(氣形劍)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게 진짜 기형검.”
아직은 단검 정도로 작은 크기였으나 그럼에도 기형검이 뿌려 대는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북해빙궁주에게 펼쳤던 반쪽짜리 기형검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형검을 생성하는 데 소모된 공력은 별 차이가 없었는데 말이다.
웅웅웅웅!
반호진의 중얼거림에 기형검이 반응하듯 공명음을 토해 냈다.
마치 진짜 검이 검명을 토해 내듯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기형검의 모습에 반호진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기형검이었기에 반호진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신기한 감촉이네.”
딱딱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청강검과는 확연히 다른 감촉에 반호진이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지금 눈앞에 기형검이 있는 게 안 믿겨졌다.
스스로 이룩한 경지임에도 아직은 얼떨떨했다.
“지금은 자그맣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커지겠지. 그리고 그다음에는…….”
반호진이 말끝을 흐렸다.
기형검을 완성했으니 이제는 그다음을 노려야 했다.
열망하던 기형검을 얻었지만 반호진은 여기에서 안주할 생각은 없었다.
천하사패의 야욕을 막아 냈으나 아직 그의 꿈은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강해져서 나쁠 건 없으니까. 힘이 없는 것과 힘이 있는데 사용하지 않는 건 완전히 다르니까 말이지.”
우우우웅!
반호진의 말에 동조하듯 기형검이 잘게 떨었다.
그러더니 이내 반호진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밤을 꼬박 새웠음에도 반호진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반호진은 쌩쌩했다.
탁.
먹물을 촉촉이 머금은 붓을 벼루 위에 올려놓으며 반호진은 미간을 좁혔다.
혹시라도 잘못 쓴 글자가 있나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이었다.
밤새 작성한 책을 반호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다.
“잘 써졌네. 의도도 확실하고.”
반호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맺혔다.
도움을 받았다면 그걸 갚는 게 당연했다.
괜히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한다는 속담이 있는 게 아니었다.
또한 반호진은 도움만 쏙 받고 입을 싹 닫을 만큼 얼굴이 두껍지 않았다.
“바로 가 볼까.”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서서히 올라오는 태양을 보며 반호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쯤이면 일어났을 것 같아서였다.
어제 늦게까지 수련했을 테지만 진짜 무인이라면 새벽에 일어나 운기조식으로 하루를 시작할 게 분명하기에 반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똑똑똑.
곧장 손님에게 내주는 객실로 향한 반호진은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확인하고는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살짝 놀란 표정의 유호량이 나타났다.
“문주님?”
“말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일어나 있었던 걸요. 우선 들어오시죠.”
이른 아침의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으나 유호량은 개의치 않았다.
반호진은 이곳의 주인이기도 할뿐더러 어제 비무를 비롯해서 조언까지 많은 걸 받았기에 유호량은 조금도 기분 나쁜 티 없이 자리를 권했다.
“떠날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 예. 어제는 기절을 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저는 문주님께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머문 게 아니지 않습니까. 더는 폐를 끼치면 안 될 것 같아서 안 그래도 문주님을 찾아뵈려고 했습니다.”
“나가라고 한 사람은 없을 텐데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유호량이 머쓱하게 웃었다.
반호진의 말대로 나가라고 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가려고 한 건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제 허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으니 이 자리에서 말하면 되겠네요. 정식 빈객으로 머무르시면 됩니다.”
“제가요?”
“예. 안 어울리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빈객이라고 하기에는 제가 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요.”
유호량이 멋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나이가 적지 않은 만큼 그는 무림에서 꽤 오랫동안 활동해 왔다.
그를 아는 이는 별로 없지만 말이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유명하지 않다는 뜻이었고, 때문에 유호량은 자신이 빈객이라 불릴 만한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부족할지 모르나 나중에는 또 모르지 않겠습니까. 혹시 압니까? 유 소협이 천하를 진동시키는 고수가 될지.”
“하하하. 상상만 해도 기쁘네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요.”
유호량의 얼굴에 언뜻 자조적인 기색이 서렸다.
하지만 그건 창졸간에 사라졌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능성은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를 말씀드리면 방이가 있고요.”
“선우 공자는 명문세가 출신이지 않습니까.”
자신과는 비교대상이 아니라는 듯이 유호량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애초에 같은 선상에 있지 않아서였다.
“검룡이라 불리기 전의 평가는 거의 밑바닥이었습니다.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도 모르는 이들이 더 많았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유호량은 크게 동조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생각해서였다.
“신분이 아니라 실력만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선우세가의 소가주가 아닌 선우방이라는 무인만요.”
“으음.”
무거운 침음을 흘리는 유호량을 보며 반호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지금의 말이 그에게 딱히 다가오지 않을 거라는 걸 반호진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한 건 용기를 북돋아주고 싶어서였다.
스윽.
“받으시죠.”
“이게 무엇입니까?”
반호진이 내미는 제목 없는 책자를 보며 유호량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설명 대신 씨익 웃기만 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어젯밤에 유 소협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역시 그러셨군요.”
“그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보답은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만.”
유호량이 어색하게 웃었다.
크게 기대도 하지 않았던 비무도 했고, 하룻밤 편히 머물기도 했다.
거기에 조언까지 들었기에 보답은 이미 넘치도록 받았다고 생각했다.
“저는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이상 주고받는 건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이 더 받았거나 덜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 관계는 틀어져 버릴 수밖에 없지요. 전 유 소협과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어…….”
유호량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반호진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라서였다.
동시에 어젯밤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지만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에는 말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앞으로 유 소협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빈객으로 머물러 달라고 제가 말씀드린 겁니다.”
“너무 과분합니다.”
“그럼 나중에 넘치는 것만큼 돌려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
반호진의 말에 유호량의 동공이 흔들렸다.
까놓고 말해서 빚을 지워 두겠다는 뜻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선뜻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림검신이 그를 위해 내놓은 책자였다.
무공서는 아니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내용이 담겨 있을 게 분명했다.
때문에 유호량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도 사람인지라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되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아닙니다. 상승절학도 아니고요. 그저 현재 유 소협께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것들을 간략하게 적어 두었습니다. 혹시 지금까지 독학하시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따로 배움을 받은 적은 있지만 사제지간을 맺지는 않았습니다.”
유호량이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지만 한눈에 이걸 알아볼 줄은 몰라서였다.
더해서 자신이 새삼 어설프게 무공을 익혔음을 깨달았다.
“대단하십니다. 독학으로 절정에 이르기가 정말 어려운데.”
“운이 좋았습니다.”
유호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운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안타깝게도 딱 거기까지였다.
벌써 몇 년째 정체되어 있었기에 유호량은 자신의 한계가 여기까지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운도 실력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제가 드리는 게 타개책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
유호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정도로 반호진의 말은 유혹적이었다.
당장 손을 뻗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순수한 보답입니다. 유 소협께 따로 원하는 건 없습니다. 이것만 받고 떠나셔도 됩니다. 그러니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그걸 바라지 않고요.”
“그럼 염치 불고하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무상문주님.”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고민을 끝내고 책자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유호량을 보며 반호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했던 대로 조금도 원하는 게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말한 건 사실이었다.
좀 더 머물기를 바라지만 떠나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었다.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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