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9장. 답은 늘 가까이에. -01
얼얼함과 동시에 곽춘의 고개가 돌아갔다.
난데없는 손찌검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었다.
다행히 내공을 싣지는 않았지만 오랜 시간 단련된 육체였기에 충격은 상당했다.
순간적으로 곽춘이 비틀거릴 정도로 말이다.
“어…….”
하지만 곽춘은 고통보다도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지금껏 무상문에서 일하면서 별의별 군상을 다 겪어 봤지만 이렇게 대뜸 따귀를 때리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곽춘은 머리가 하얘졌다.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뺨이 붉어진 채로 넋을 놓고 있는 곽춘의 모습에도 장년인은 노기를 거두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곽춘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더더욱 목소리가 커졌다.
스윽!
그뿐만 아니라 재차 따귀를 때리려는 것인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이독제독이라고 맞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또 다른 고통으로 정신 차리게 만들면 된다고 장년인은 생각했다.
휘이익!
무상문 소속이라고 하나 기껏해야 하인, 혹은 잡부였다.
이깟 애송이 하나 잡는다고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장년인은 망설이지 않고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부디 한 방에 정신 차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턱!
그런데 장년인의 손은 곽춘의 뺨에 닿지 못했다.
도중에 나타난 손이 그의 팔뚝을 붙잡아서였다.
“배짱도 좋군. 정문에서 대놓고 손찌검이라니. 아, 남창을 대표하는 명문정파라서 그런가? 요즘 명문정파들은 무작정 손부터 휘두르는 게 유행인가 보군.”
“웬 놈이냐! 이걸 놓지 못하겠느냐?”
“놈이라.”
팔이 붙잡힌 장년인이 대성일갈했다.
갑자기 나타난 청년을 죽일 듯이 노려봤던 것이다.
그런데 청년의 반응이 이상했다.
코앞에서 터져 나오는 노호성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어?! 어?!”
대신 등 뒤에서 요상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깜짝 놀란 듯이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이런 대접은 처음인데. 인사를 무시한 이는 있어도 대뜸 날 놈이라고 부른 자는 없었는데 말이지.”
“종놈이라서 그런 걸 겁니다.”
“……!”
여전히 팔이 붙잡힌 채로 있는 장년인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의 뇌리로 한 가지 가정이 떠올라서였다.
거기에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신분으로 보이는 모용척이 나타나자 장년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화룡점정은 곽춘이었다.
“무, 문주님!”
덜덜덜덜!
왼쪽 뺨이 벌게진 곽춘의 외침에 장년인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반호진에게 놈이라고 칭했기에 장년인은 머리가 하얘졌다.
“팔극문에서는 종놈을 막 대하는 모양이니 내가 똑같이 해도 별 말은 없겠지.”
“끄아아악!”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아 있던 장년인이 비명을 질렀다.
반호진에게 붙잡혀 있는 팔에서 지독한 고통이 느껴져서였다.
“왜 이래? 무공도 익힌 놈이. 본인 스스로도 알 거 아냐? 뼈는 안 부러졌어.”
“끄으으으!”
“아니면 고통 없이 보내 줄까? 얼마나 나를 만만하게 봤으면 정문 앞에서 이따위 짓을 하지?”
“죄, 죄송합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였으나 장년인은 반호진의 음성을 듣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동시에 온몸의 털이란 털은 전부 바짝 섰다.
자칫 잘못하면 목이 잘릴 것 같은 공포에 장년인은 납작 엎드렸다.
“사과할 사람이 더 있을 텐데?”
“미, 미안하다!”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장년인이 곽춘에게 사과했다.
마음 같아서는 사과고 뭐고 당장 드러눕고 싶었으나 자그마치 검신이 눈앞에 있었기에 장년인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저 이쯤에서 반호진이 끝내 주길 바라는 것 말고는.
“어…….”
근데 사과를 했음에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계속 이어지는 묵묵부답에 장년인은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만약 곽춘이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태가 악화일로로 향해 갈 것임이 분명해서였다.
“부담스러워할 거 없다. 너 역시 무상문의 식구이니까. 찾아오는 이들을 정중히 대할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무시를 당할 필요는 없다. 이유도 없고.”
“아……!”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장년인과 달리 멍하니 서 있던 곽춘의 얼굴이 붉어졌다.
식구라는 두 글자에 감동한 것이었다.
어디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든든함과 소속감에 곽춘의 두 눈이 또렷해졌다.
“저기…….”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알 필요 있나. 끽해야 팔극문의 종놈인데.”
“…….”
모용척의 일침에도 장년인은 고개를 숙였다.
조금도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런 장년인의 모습이 곽춘은 이상하게도 안쓰러워 보였다.
반호진 때문에 잠잠해서 그렇지 모용척은 기본적으로 오만한 성미를 가지고 있어서 지금처럼 남의 속을 후벼 파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무상문주님!”
“반 대협!”
그때 마차의 문이 열리며 이남일녀가 황급히 내렸다.
반호진의 등장에 팔극문의 문주 일가가 뒤늦게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환한 미소와 함께 다가오던 세 사람은 이내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표정의 모용척이 세 사람을 가로막아서였다.
“오늘은 팔극문주님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다음에 정식으로 약속을 잡고 뵈었으면 합니다.”
정중하지만 날이 바짝 서 있는 반호진의 한마디에 팔극문주가 손을 뻗던 자세로 굳어졌다.
수하의 실수로 인해 반호진의 심기가 크게 상했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인사조차 나누지 않겠다는 눈빛과 표정에 팔극문주는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팔극문이 대단하긴 한 모양입니다. 무림십대세가의 가주도 여기에서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데 이렇게나 간 큰 짓을 저지른 걸 보면. 강서성 남창에 와룡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말문이 막힌 팔극문주를 직시하며 모용척이 이죽거렸다.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존대를 취하고 있긴 하나 특유의 오만한 어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거기다 모용척은 경고의 의미까지 담았다.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팔극문주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어렸으나 모용척은 모용세가의 소가주이자 차기 모용세가의 주인이었다.
팔극문이 남창을 대표하는 무림문파라고 하나 중원 전역에 영향력을 끼치는 모용세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팔극문주는 조금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그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눈짓했다.
얼른 사과하라고 말이다.
그런 부친의 시선에 아들과 딸이 황급히 허리를 깊게 숙였다.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반호진은 세 사람의 사과에도 용서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쌀쌀맞게 축객령을 내리고는 몸을 돌렸다.
벌겋게 부어 오른 볼을 쓰다듬은 곽춘을 데리고서 말이다.
뒤이어 모용척이 살벌한 안광으로 쏘아본 후 정문을 닫아 버리자 팔극문주는 침음과 함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돌아가야지. 이 이상 억지를 부리면 좋은 꼴을 당하지는 못할 게다.”
깊은 한숨과 함께 팔극문주는 아들에게 대답하고는 딸에게 손짓했다.
모든 것이 어그러진 이상 그가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팔극문주는 이 사태를 발발시킨 수하를 한 차례 싸늘하게 노려보고는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백설이 곱게 웃으며 문을 열었다.
이윽고 방에 들어가자 늘 그렇듯이 말끔한 복장의 난희주가 서 있는 게 반호진의 눈에 들어왔다.
“시끄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앉아서 천 리를 보네?”
“당연하지. 나 하오문의 소문주야.”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지.”
“사람 좀 빌려줄까? 오빠 눈에 차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름 쓸모 있는 인재들이 본문에는 많아.”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서 앉는 반호진을 향해 난희주가 슬쩍 물었다.
다른 이라면 모르겠으나 반호진이라면 그녀는 비천대원도 보내 줄 용의가 있었다.
“괜찮아. 귀찮긴 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냐.”
“다른 분들이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춘이를 비롯해서 아이들도.”
“안 그래도 방법을 찾는 중이야.”
“오빠만 괜찮다면 비천대원 중 일부를 파견 형식으로 보낼 생각도 있어.”
어떻게 보면 비천대를 만든 게 반호진이었다.
가장 크게 일조를 한 만큼 반호진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하면 지원자가 적지 않을 거라고 난희주는 생각했다.
“비천대는 하오문을 위해 일해야지. 지금은 과도기라서 힘이 든 것뿐이야.”
“오빠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난희주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기서 더 말하는 건 주제넘는 짓이었기에 그녀는 딱 여지만 주었다.
언제라도 도움을 청하면 응하겠다고 말이다.
“날 보자고 한 걸 보니 슬슬 떠날 생각인가 봐?”
“귀신같네. 어떻게 알았어?”
“딱 보면 알지. 다른 사람들이 다 떠나기도 했고.”
“사실 나 벌벌 떨었었거든. 방장께서 날 호출하시면 어떡하나 하고.”
“떨긴 왜 떨어.”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난희주가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담현도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정사중간이라고 해서 무작정 싫어하거나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오빠는 우리 입장이 안 되어 봐서 몰라.”
“우리 사부님 그렇게 꽉 막힌 성격 아니셔. 이유 없이 살계를 열지도 않으시고. 편견은 조금 있으시지만 그렇다고 막 살수를 뿌리는 성격은 절대 아냐.”
“알지. 근데 막상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온몸이 굳어지는데 어떡해? 지은 죄가 없어도 그냥 무서워.”
“뭐, 그럴 수도 있지.”
완벽히 이해되지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더 이상 따지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따로 부르시지는 않았지만 나도 눈치가 있거든. 제법 오래 머물기도 했고.”
“너는 눈치 볼 필요 없는데. 내 동생이잖아.”
“후후. 언제 들어도 고마운 말이야, 그건.”
“누가 눈치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기는 한데, 나도 하오문의 소문주니까. 겸사겸사 나가는 거야. 적당한 시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렇지만 포기한 건 절대 아냐. 물러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할 일이 있어서 나가는 거야.”
이 부분을 명확하게 밝히겠다는 듯이 난희주가 손가락을 휘휘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도망치는 게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런 그녀의 말에 반호진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도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아직도?”
“일생이 걸린 문제인데 대충 결정지을 수는 없잖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럼 서로에게 시간이 필요한 걸로.”
난희주가 싱긋 웃었다.
무언가에 쫓기던 예전과 달리 여유가 서린 미소에 반호진도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네.”
“나는 떠나지만 하오문은 남창에도 있어. 그러니까 본문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해. 연락하는 방법은 매향이에게 알려 두었어.”
“철두철미하네.”
“아직은 오빠, 동생 하는 사이니까? 오빠 성격상 부담 되는 부탁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도 하고.”
마음 같아서는 난희주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더욱이 다른 경쟁자에 비해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 눌러앉아야 했지만 난희주는 멀리 보기로 했다.
흔히 말하는 이보전진을 위해 일보후퇴를 했다.
“또 모르지. 어려운 부탁을 할지.”
“그건 그것 나름대로 우리에게도 나쁘지 않으니까. 아, 그리고 삼형제가 새끼 낳으면 나한테 한 마리 주기로 한 거 잊으면 안 돼?”
“아직 성견도 아니다.”
“개는 금방 자라거든. 정이 들기도 했고. 또 우리 인연에 강아지 한 마리 정도는 괜찮잖아? 아, 이거 깜빡할 뻔했다. 요즘에 광서성이랑 광동성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