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장. 손님과 불청객의 차이. -02
그의 검을 튕겨 내기 무섭게 반호진의 검이 매섭게 파고들어서였다.
검과 도가 충돌했음에도 조금의 반동도 없다는 듯이 반호진의 검은 너무나 깔끔하게 유호량의 명치를 노리고서 쇄도했다.
스슥!
그런데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괜히 명치를 노린 게 아니라는 듯이 유호량이 오른쪽으로 이동하자 반호진의 소천검이 미끄러지듯이 따라붙었다.
검극이 그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갔던 것이다.
“흐읍!”
맹수가 물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것처럼 집요하게 따라붙는 반호진의 검에 유호량이 보법을 극성으로 펼쳤다.
비록 내공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육체단련을 꾸준히 해 왔기에 그는 자신 있었다.
진기를 일으키지 않아도 충분히 날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인지 유호량은 얼마 가지 않아 깨달았다.
쌔애애액!
반호진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유호량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속도, 힘, 기술 모든 것에서 반호진에게 밀렸다.
자신이 얼마나 헛된 자신감을 가졌는지 유호량은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까앙! 깡!
폭풍처럼 쇄도하는 반호진의 검세를 유호량은 본능적으로 막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부 다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워낙에 빠르고 세밀했기에 그의 수준으로는 전신요혈만 가까스로 막아 냈다.
“크윽!”
그리고 그 말은 다른 검격들은 막아 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예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검격에 유호량의 황의무복은 순식간에 넝마가 되었다.
그러나 유호량은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츠츠츠츠!
반호진의 검세를 막아 내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기에 유호량은 옷이 찢어지는지, 상처가 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본능적으로 도를 휘둘렀다.
마치 살기 위해 악착같이 도를 휘두르는 것처럼 말이다.
“으흑!”
물론 막아 냈다고 해서 완벽하게 받아 낸 건 아니었다.
딱 치명상만 피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유호량은 처음에 달려들었던 때를 제외하면 계속 뒷걸음질 쳤다.
반호진의 검격을 온전히 받아 내지 못해 물러나는 것으로 충격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차하압!”
그런데 놀라운 건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었음에도 유호량이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패색이 짙고 반전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유호량은 입을 앙다물고서 끝까지 도를 휘둘렀다.
시종일관 정중했던 것과 달리 두 눈에서 독기를 줄기줄기 뿜어 대면서 말이다.
‘대기만성의 무인이라서 그런가. 방이와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네. 기본기가 탄탄한 것도 그렇고, 변초보다는 정공법에 집착하는 걸 보니.’
근성은 있지만 냉정하게 말해 딱 그것뿐이었다.
반호진의 눈에 보이는 유호량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절정고수일 뿐이었다.
하지만 반호진은 집념 어린 눈빛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더불어 전생에서 도공이라 불리던 이가 눈앞에 있는 유호량이라는 걸 확신했다.
‘지금은 덜 여물었지만 계기만 있다면 방이처럼 씨앗을 발아할 수 있을 거야.’
이미 미래는 바뀌었다.
그렇지만 반호진은 안심하지 않았다.
인생이라는 게 애초에 파란만장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처음 돌아왔을 때의 목표였던 천하사패를 와해시켰으나 아직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인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가 찾은 게 아니라 알아서 찾아온 것이기에 반호진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행운이 자신에게 찾아왔다고 말이다.
또 단순히 절대고수와 비무를 한다고 해서 모두 다 재능을 만개하는 건 아니었다.
“헉헉헉!”
가볍게 검을 휘두르는 반호진과 달리 유호량은 비무가 시작된 지 고작 일다경이 지났을 뿐인데 전신이 홀딱 젖었다.
혼자만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온몸에서 땀을 흘렸던 것이다.
반면에 반호진의 얼굴은 뽀송뽀송했다.
유호량과 달리 땀 한 방울도 맺히지 않았다.
으득!
그걸 못 볼 수가 없기에 유호량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분노한 건 절대 아니었다.
처음부터 자신과 반호진의 실력 차이를 알고 있었기에 화날 것도 없었다.
다만 스스로의 턱없는 부족함에 화가 날 뿐이었다.
‘더욱 독하게 체력수련을 했어야 했어…….’
비무가 이어질수록 유호량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관성적으로 체력단련을 했는지를.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더 이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늘 하던 대로만 했다.
근데 그게 잘못이었다.
좀 더 열심히 했어야 했다.
극한까지 단련해서 한계를 계속해서 넘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게으름의 유혹에 넘어가 건방을 떨었다.
따다다당!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검격 속에서 유호량은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반호진은 그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딱 필요한 만큼만, 최소한으로만 움직여서 최대의 효율을 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반호진이 공격하는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방어하는 것보다 체력소모가 더 큰 게 공격하는 쪽이었기에 유호량이 먼저 지쳤다는 건 오직 한 가지만을 뜻했다.
반호진보다 그의 체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주르륵.
이미 땀은 비 오듯이 흐르고 있었고 정신은 멍해졌다.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이었다.
아랫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비릿한 피 맛이 잠시 정신을 차리게 해 주었으나 그건 말 그대로 잠깐일 뿐이었다.
이내 유호량은 두 눈이 풀린 채로 반호진의 파상공세를 반사적으로 받아 냈다.
“방이 형이랑 비슷한 과인 것 같은데요?”
“내가 보기에도. 아주 고지식해.”
“뭐라고?”
서조운과 모용척의 품평에 선우방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나 두 동생은 의견을 회수하지 않았다.
지금 유호량이 보여 주는 모습이 선우방을 처음 만났을 때와 아주 흡사해서였다.
“형도 느끼지 않아요? 되게 흡사한데. 외모는 다르지만.”
“인정.”
“허참.”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는 모습에 선우방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면에 예유화는 눈을 반짝였다.
늘 대단한 고수들의 대련만 보다가 그보다 아랫줄의 무인을 보게 되자 느껴지는 게 많았다.
일단 육안으로 어느 정도 볼 수 있었기에 재미있었다.
“근데 누구일까요? 형님께서 초면인데도 비무를 받아 주신 걸 보면 분명 무언가 있다는 얘기인데.”
“나도 그게 궁금해. 내가 보기에는 딱히 특별한 게 없어 보이는데.”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서조운과 달리 모용척은 탐색하듯 날카롭게 유호량의 전신을 훑었다.
무공은 물론이고 옷차림을 보건대 신분도 딱히 명문 출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명한 무인도 아닌 듯했기에 모용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뭐 특별해서 이 자리에 있나.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호진이는 본 거겠지. 지금까지 호진이의 안목이 실패한 거 본 적 있어?”
“없죠.”
“없었죠.”
선우방의 말에 모용척과 서조운이 곧바로 대답했다.
굳이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지금까지의 결과가 모든 걸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이유가 있을 거야. 말해 주면 좋겠지만 호진이 성격상 먼저 말해 주지는 않을 테니 지켜보자고.”
“다행히 이제는 손님도 별로 없으니까요.”
“비우면 채워지는 게 세상이기도 하고.”
속 시원하다는 듯이 서조운이 말했다.
입 밖에 꺼내지 않아서 그렇지 남궁세가와 하북팽가, 사천당가는 많이 불편했다.
특히나 욕심이 덕지덕지 묻은 시선으로 반호진을 쳐다보는 게 말이다.
그렇다고 염왕과 도왕, 독왕이 비무를 해 주는 것도 아니었기에 서조운에게는 빈대나 다름없었다.
“문도로 받아들이실까요? 경지에 비해 익힌 무공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은데.”
“모르지 뭐. 결정은 호진이가 하는 거니까. 문도를 단기간에 늘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빈객으로 머물 수도 있지.”
서조운이 본 걸 선우방이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았다.
친구라지만 그에게도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기에 선우방도 반호진의 생각을 짐작하는 건 어려웠다.
“끝났네요.”
대화하는 사이 비무는 어느새 끝을 맺었다.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반호진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일행들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집중했다.
“근성은 있네.”
“체력은 진즉에 바닥났는데 말이죠.”
“무인이라면 저 정도 악과 깡은 있어야지.”
다만 감탄하기보다는 다들 당연하다는 기색이었다.
자신들이 그렇게 매일 수련했기에 유호량의 태도는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
“일단 최소한의 자격조건은 갖추었네요. 저 정도 각오는 되어야지 형님의 시간을 빼앗을 자격이 있죠.”
“맞아.”
“근데 저 사람 못 걸어갈 것 같은데.”
서조운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딱 봐도 탈진한 상태라 혼자서 움직이는 건 불가능해 보여서였다.
그리고 불안한 예상은 역시나 틀리지 않았다.
“조운아.”
“예! 형님!”
“빈방에 이분 좀 모셔 가.”
“예에.”
울상을 지었지만 서조운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서였다.
“제가 할까요?”
“어린애가 무슨. 됐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유호량에게 다가가는 서조운에게 예유화가 따라붙었다.
이곳에서야 막내라지만 서조운은 무림에서 나름 방귀 좀 뀌는 염룡이었다.
그렇기에 예유화는 자신이 하려고 했으나 서조운이 만류했다.
“저도 할 수 있는데.”
“그럼 나 보고 배워. 나중에는 네가 할 수 있게.”
“네!”
예유화가 활짝 웃었다.
지금은 함께 걸어가는 게 전부지만 나중에는 진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서조운은 예유화가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기절한 유호량을 들쳐 메고서 숙소로 향했다.
***
“이리 오너라!”
쿵! 쿵! 쿵!
아침부터 정문이 시끄러웠다.
일단의 무리가 찾아와서는 대뜸 정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호화스러운 사두마차에 스무 명이 훌쩍 넘는 무인들이 호위대처럼 서 있었는데 그중 시종으로 보이는 장년인이 거칠게 정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상문주님을 뵈러 왔다. 여기 계신 분들은 팔극문(八極門)의 문주님과 소문주님, 그리고 아가씨이시다.”
“저희 문주님과 약속을 잡으셨는지요?”
근처에서 일하던 중에 정문을 연 곽춘이 정중하게 물었다.
그런데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선두의 장년인이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허튼소리 하지 말고 얼른 안에 알려라! 팔극문주님께서 방문하셨다고! 아니면 무상문주님께 안내하든가!”
“죄송합니다만 미리 약속이 되어 있지 않으신 분은 장원에 들어가실 수 없습…….”
“이놈! 잡것이면 잡것답게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말이 많다!”
장년인이 시뻘게진 얼굴로 노성을 토해 냈다.
지나칠 정도로 흥분해서는 곽춘을 윽박질렀던 것이다.
한데 누구도 그걸 말리지 않았다.
같은 일행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지켜보기만 하는 광경에 곽춘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일단 어떻게든 장원 안으로 들어가려는 속셈인가.’
밑바닥 삶을 전전했던 만큼 곽춘의 눈치는 비상했다.
한눈에 팔극문의 목적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곽춘은 기죽지 않았다.
비록 하인의 신분일지언정 그 역시 무상문의 식솔이었다.
“어허! 어서 안내하지 않고 무엇을 하는 것이냐! 우리들이 기다리는 게 안 보이느냐!”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미리 약속을 잡은 게 아니라면 장원으로의 출입은 안 됩니다. 대신 제가 들어가 팔극문의 방문을 알릴 터이니 잠시…….”
짜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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