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장. 손님과 불청객의 차이. -01
반호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름을 곱씹자 뇌리 구석에 있던, 거의 잊히다시피 한 별호가 번뜩이듯 떠올라서였다.
동시에 반호진의 시선이 벼락처럼 유호량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러자 낡은 도병과 함께 도를 감싸고 있는 도갑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는지요?”
“아, 아닙니다. 잠깐 기억을 더듬어 봤습니다. 저도 모르게 잊고 있었던 때라.”
“하하하. 시간이 제법 지나기는 했지요.”
심상치 않은 반호진의 표정에 바짝 긴장했던 유호량이 어색하게 웃었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나름 노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안타깝게도 반호진에게 닿지 않았다.
도공이라는 두 글자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서였다.
‘전생에서 말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본 적은 없으니까.’
숭산이 불타고 거의 미치광이처럼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최전방이든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참전했기에 반호진도 도공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말은 많이 들었었다.
그것도 꽤나 좋은 쪽으로.
그래서 반호진은 궁금했다.
전생에 그토록 유명했던 도공의 실력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이 말이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만 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십니까?”
“예?”
“비무첩에는 날짜가 적혀 있겠지요?”
“……날짜까지는 못 적었습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지라 정중하게 비무를 청하는 내용만 담았습니다.”
유호량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였다.
“그럼 지금 어떠십니까?”
“지, 지금요?”
“힘드시다면 내일이나 모레도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지금도 좋습니다! 아니, 영광입니다!”
침을 꿀꺽 삼킨 유호량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럽긴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엄청난 기회라는 걸 알았기에 유호량은 고민하지 않고 반호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들어가실까요.”
“감사합니다!”
“춘이는 볼일 보고.”
“넵!”
빠르게 정리된 상황에 곽춘은 공손히 대답한 후 따로 떨어져서 이동했다.
아직 업무 시간인 만큼 자기 할 일을 하러 떠난 것이었다.
그런 곽춘을 잠시 바라보던 반호진은 딱딱한 걸음걸이로 따라오는 유호량을 이끌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어? 누구셔?”
“손님.”
대련을 하거나 혹은 따로 수련을 하던 일행들이 유호량의 등장에 눈을 빛냈다.
경계하기보다는 궁금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던 것이다.
“손님이라고?”
“응.”
선우방은 물론이고 서조운과 모용척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짙게 서렸다.
단순히 찾아왔다고 해서 반호진이 아무나 만나 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게다가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는 것도 세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귀주성 출신의 유호량이라고 합니다. 별호는 아직 없습니다.”
집중되는 시선에 유호량이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자 일행들의 호기심이 더욱 짙어졌다.
더더욱 유호량이 궁금해진 것이다.
“또 전우이기도 해. 감숙성에서 같이 싸웠다고 하셨어.”
“아, 정말요?”
“그러시구나!”
함께 싸웠다는 말에 서조운과 선우방이 눈을 반짝였다.
같은 전장에서 전투를 치렀다가 하자 호의가 생긴 것이었다.
“이렇게 환영해 주실 정도로 큰 활약을 펼친 건 아닙니다.”
“활약보다 중요한 게 중원을 지키겠다는 마음이지 않습니까. 한 손 거들어 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전쟁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만의 힘으로 승리한 게 아니니까요.”
“……감사합니다.”
진심이 담긴 선우방의 말에 유호량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 해도 감동을 받을 텐데 말하는 이가 검룡이라 불리는 선우방이었기에 유호량은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던 자신을 인정해 주는 느낌이 들었기에 감정이 복받쳤다.
“안녕하세요.”
유호량이 감동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작은 인영이 반호진에게 슬쩍 다가왔다.
이제는 완치가 되어 살이 제법 오른 예유화가 다가와 공손히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수련은 할 만하고?”
“아직은 괜찮아요.”
예유화가 반호진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칠음절맥을 치료해 준 건 서조운이지만 그 서조운을 치료한 게 반호진이었다.
즉 그녀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어찌 보면 반호진 덕분이었다.
거기다 서조운이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이가 반호진이었기에 예유화는 늘 과할 정도로 예의를 차렸다.
“다행이네.”
“모두 문주님 덕분이에요.”
“내 덕이라기보다는 조운이 덕분이지.”
“조운 오빠를 살려 주신 게 문주님이시잖아요. 그러니까 거슬러 올라가면 문주님 덕분이지요.”
“굳이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는데.”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쓸데없이 논리정연한 것 같아서였다.
“그만큼 문주님께 감사하고 있단 걸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사람은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그게 맞긴 하지. 근데 아이는 아이다워야 하는 법인데. 철이 일찍 든다고 해서 꼭 좋은 게 아니거든.”
“저도 다 컸어요. 벌써 열여섯 살인걸요.”
“열여섯이면 아직 애지. 안 그래?”
“맞습니다. 한창 먹고, 자야 할 때죠. 그래야 키가 크니까요.”
서조운이 시기적절하게 맞장구를 쳤다.
특히 키를 거론하자 예유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칠음절맥이 완치되어 삐쩍 마른 몸에서 탈피했지만 키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단기간에 대나무처럼 쑥쑥 자라는 게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또래보다 키가 많이 작았다.
“저, 저도 여자예요!”
예유화가 소심한 반항을 했다.
키는 작지만 그래도 여자였다.
아이나 소녀라고 불릴 나이는 지났기에 예유화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그러나 예유화의 정정에도 반호진과 서조운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일찍 어른이 되어서 좋을 거 없다.”
“원래 어른들은 자기가 어른이라고 말 안 해. 왜인 줄 알아? 굳이 어른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거든. 아직 덜 큰 아이들만 이제 자신도 다 컸다고 말을 해. 왜냐. 본인도 알거든. 지금 나이가 애매하다는 걸.”
한마디를 툭 내뱉는 반호진과 달리 서조운은 사실과 진실로 때리겠다는 듯이 조목조목 말했다.
도저히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게 말이다.
결국 예유화는 울상을 지었다.
“그만해. 애 울겠다.”
“냉혹한 현실을 가르쳐 줄 필요가 있어요, 형.”
“애한테 벌써 그걸 알려 줄 필요는 없지. 설사 알려 준다고 해도 그렇게 적나라하게 할 것까지는 없고.”
“흐음.”
보다 못한 선우방이 나섰다.
툭 건들면 울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서조운은 생각이 다른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차근차근해. 내가 보기에는 너랑 비슷한데 뭘.”
“예?”
생각지도 못한 반호진의 말에 서조운이 당황했다.
동시에 예유화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는 것 같아서였다.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문주님!”
다른 일행들에게는 오빠라고 해도 반호진에게만큼은 깍듯하게 문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유화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였다.
다음 내용을 꼭 듣고 싶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자 서조운의 동공이 흔들렸다.
“혀, 형님!”
“이상한 것도 아닌데 왜.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그게 아니라……!”
서조운이 황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반호진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구양절맥을 갓 치료했을 때 조운이도 너랑 비슷했어. 자기도 다 컸다고 말했지.”
“어머어머.”
서조운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반대로 예유화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박수를 쳤다.
중간에 서조운을 힐끔거리면서.
“그러니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거지. 아니, 정확하게는 미리 겪어 봤기에 자연스레 훈계가 나오는 거랄까.”
“역시 그랬군요.”
“근데 아직 어린 건 맞으니까 더는 부정하지 말고.”
“네에.”
이어지는 반호진의 말에 예유화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쨌든 결론은 달라지지 않아서였다.
“조운이는 유화 데려가고.”
“예!”
“일행들과 인사를 다 나누신 듯하니 우리도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요?”
“저는 좋습니다.”
예유화를 서조운에게 보낸 반호진이 유호량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인사도 나누고 긴장도 충분히 풀렸을 것 같아서였다.
그 예상이 맞았는지 유호량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처음에는 검룡과 염룡, 비룡과의 대면에 흥분했지만 지금은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눈앞에 검신이 있는데.’
나이는 그보다 열 살 이상 어렸으나 강호에서의 위상은 감히 비교불가였다.
그리고 그건 천하의 염룡과 검룡, 비룡도 마찬가지였다.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손꼽히는 강자들이 세 사람이었으나 반호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규칙을 하나 정했으면 하는데요.”
“저는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비무신청을 받아 주는 것만으로도 유호량은 감사했다.
그렇기에 거절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떤 규칙이든 그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로 내공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하죠. 오직 육체적인 능력만 사용하는 겁니다.”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기는 한데…….”
“싫으십니까?”
“아닙니다.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저에게는 그럴 수 있는 자격도 없고요.”
유호량이 손사래를 쳤다.
그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먼저 부탁하면 모를까.
한데 반호진이 먼저 말해 주었기에 유호량은 고마웠다.
“그럼 동의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예.”
“시작할까요?”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스르릉.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호량은 도를 뽑았다.
성격이 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미적거리는 걸 반호진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곧바로 비무에 집중했다.
스릉.
언제 미소를 지었냐는 듯이 유호량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반호진 역시 검을 천천히 뽑았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유호량에게는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왔다.
단순히 검을 뽑은 것뿐인데도 온몸이 저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꿀꺽!
절정의 경지에 겨우 턱걸이 한 수준이었으나 중요한 그 역시 엄연한 절정고수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유호량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반호진이 딱히 기세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 스스로 만들어 낸 압박감인가? 아냐.’
유호량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압박감이 허상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서였다.
‘검신의 존재감인가.’
고수는 굳이 기운을 일으키지 않아도 기도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달리 존재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유호량은 그걸 지금 느끼고 있었다.
그저 평범하게 검을 늘어뜨리고 있었을 뿐인데도 유호량은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휘이이잉.
그 순간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봄의 기운을 물씬 풍기는 훈풍이었는데 덕분에 유호량은 정신을 차렸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자신이 꼼짝도 하지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오시죠.”
“……예.”
민망함으로 잔뜩 붉어진 얼굴로 유호량이 땅을 박찼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겠다는 듯이 유호량의 낡은 도(刀)가 맹렬한 파공음을 터트리며 반호진에게 쇄도했다.
정수리를 쪼개 버릴 기세로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따아아앙!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빠르고 강력한 참격을 반호진은 맞받아쳤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반호진은 그러지 않았다.
회피만 해서는 유호량의 실력을 제대로 볼 수 없어서였다.
“흡!”
한편 반호진이 정면으로 맞받아칠 줄은 몰랐던 유호량은 강렬하게 튕기는 애병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고통에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유호량은 그 고통을 계속 느낄 새가 없었다.
쉬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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