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장. 꼬리에 꼬리를 물고. -04
곽춘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지기 힘들 정도로 커졌다.
그뿐만 아니라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싫으면 말고. 강요하는 건 아니야.”
“제, 제가 배워도 되나요?”
“안 될 건 없지. 내가 문주니까. 근데 말하는 걸 보니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한가 보네?”
“물론이죠! 다만 언감생심이라 말을 꺼내지 못했을 뿐이에요.”
커진 자신의 목소리를 느낀 듯 곽춘이 점점 작게 말했다.
그러나 격동한 기색은 여전했다.
“언감생심이라. 그 말은 내심 기대했다는 뜻이렷다?”
“조, 조금은요. 혹시 이류무공 정도는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조금 기대했어요.”
“근데 무공은 왜 익히고 싶은 거야?”
“저와 친구들, 그리고 미래에 함께 살아갈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요.”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이 곽춘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런데 진지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반호진의 표정은 싸늘해졌다.
“왜 굳이 무공을 선택한 거지? 네가 말한 너 자신과 친구들, 가족을 지키기 위한 힘이 꼭 무공에만 있는 건 아니다. 금력도 있고, 권력도 있지.”
“맞습니다. 하지만 무식한 제가 그나마 얻을 수 있는 힘이 무력이기 때문입니다.”
“죽을 수도 있어. 어쩌면 암살자를 만나 비명횡사할 수도 있지. 무인이라는 존재는 결코 멋있거나 아름답지 않아.”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고, 죽기도 해요. 사람이라는 게 강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한없이 약하기도 하거든요.”
“합격.”
반호진의 표정이 일변했다.
언제 차가웠냐는 듯이 활짝 웃자 곽춘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마음가짐이 바로 잡혀 있네. 확실히 생존에 예민해서 그런가.”
“그, 그럼 저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시는 건가요?”
“제자가 되고 싶다고는 말 안 하네?”
“사람은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한다고 배웠어요. 또 분수에 맞게 살아야 인생이 고달프지 않대요.”
곽춘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어른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반호진의 눈에는 보였다.
미소 속에 숨겨져 있는 처연함이.
“타협하고 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기는 하지. 어떻게 보면 현명한 것이기도 하고. 나도 그걸 부정하지는 않아. 근데 포기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 넌 어느 쪽이야?”
“저는…….”
“뭐, 지금 당장 결정할 이유는 없고. 일단 무공을 배우고 싶다 했으니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자고.”
“자, 잠시만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왜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곽춘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에게 무재라 불리는 재능이 없다는 걸 곽춘은 잘 알았다.
만약 눈부신 재능이 있었다면 진즉에 은거고수에게 선택을 받거나 표국에서 데려갔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말해 주는 건 명백했다.
그 때문에 곽춘은 궁금했다.
반호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별다른 이유가 있나. 괜찮아 보여서 가르쳐 주려는 거지. 내 밑에서 일하고 있는 아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근데 배우고 싶지 않은 아이들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어. 선택은 결국 본인이 하는 거니까.”
“우와.”
“그렇게 존경하는 눈빛으로 볼 거 없어. 어떻게 보면 나를 위해서니까. 너만 특별히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내 비전절학을 알려 주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자그마치 무림의 검신이 가르쳐 주는 거잖아요. 이것만 해도 저에게는 엄청난 영광이죠.”
“영광까지야.”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 정도는 아니어서였다.
“정말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실망은 기대가 있어야 생기는 법이야.”
“그러니 더더욱 저에게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못난 모습을 보여 드려도 실망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비상하단 말이지.”
“헤헤헤!”
곽춘이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차마 부정할 수가 없어서였다.
“우선은 기초부터 가르칠 거야. 그걸 벗어나느냐, 못 벗어나느냐는 너 하기에 달렸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던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돼. 일은 확실하게 하면서 무공수련을 해야 해.”
“무공을 가르쳐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요. 당연히 공과 사를 구분해야죠.”
어찌 보면 매정하다고 할 수 있었으나 곽춘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기회를 주는 게 얼마나 큰 결정인지 잘 알았기에 속된 말로 목숨을 걸 생각이었다.
어쩌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인생역전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이해해서 다행이네. 다른 녀석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구분 못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모르지 않을 테니까요. 무림의 방식으로 무공을 회수하는 게 어떤 건지 저희도 알거든요.”
“호오. 그래?”
“예. 어려서부터 다들 무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으니까요. 동경도 하고요. 물론 진짜 무인이 되는 경우는 드물지만요. 대부분은 암흑가를 전전하게 되더라고요.”
무공은 배우고 싶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또한 무공서를 습득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죽을 고생을 해서 무공비급을 얻었다 해도 그게 완전한지, 진품인지 구분하는 건 쉽지 않았다.
재수 없으면 불완전한 무공을 익혀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 또한 각자의 선택이야.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그렇긴 하죠.”
“다른 아이들도 데려와. 이참에 모두에게 물어 보게.”
“넵!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목소리로 곽춘이 대답하고는 후다닥 뛰어갔다.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무공을 배우게 되어서 그런지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
낡았지만 잘 관리되어서 그런지 깔끔해 보이는 황의무복을 입은 삼십 대의 중년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정문이었지만 그 위에 걸린 현판을 보자 이상하게 몸이 경직되었다.
장원의 주인을 본 것도 아닌데 절로 긴장되는 몸에 중년인은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키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런데 문지기나 위사는 없나?”
굳게 닫힌 정문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던 중년인은 이내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막상 목적지에 도착을 하기는 했으나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평범한 무가나 문파였으면 위사나 문지기가 있어서 방문목적을 묻고, 안내를 해 주었을 텐데 무상문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정문은 닫혀 있고 목문(木門) 너머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중년인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냥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데.”
강호는 물론이고 일반 양민들도 아는 격언 중에는 이런 게 있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고 말이다.
그저 그런 문파였다면 고민이 짧았겠으나 지금 그가 와 있는 곳의 주인은 무림에서 자그마치 검신이라 불리는 무인이었다.
그렇다 보니 중년인은 섣부른 짓을 할 수가 없었다.
쿵쿵쿵.
결국 그가 선택한 건 문을 두드리는 일이었다.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으니 방문자가 있다는 신호를 보내야 했다.
그렇지만 결코 과하게 두드리지는 않았다.
어떤 관계든 첫인상이 중요하기에 중년인은 최대한 정중하게 느껴지도록 급하지 않게 정문을 두드렸다.
“지금 나갑니다!”
“다행이네.”
약간의 차이를 두고 여유롭게 문을 두드린 후 잠시 기다리던 중년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문 너머에서 앳된 음성과 함께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져서였다.
끼이익!
헐레벌떡 달려왔는지 호흡이 고르지 못한 소년이 문을 열더니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방문자를 확인하기보다는 손님에 대한 예의를 먼저 지킨 것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황급히 뛰어온 곽춘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문객은 제법 있었으나 하인인 그를 존중해 주는 이는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옷차림이 어떻든, 신분이 어떻든 일단은 하대부터 하고 보는데 눈앞의 중년인은 달랐다.
“방문하신 목적을 알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
“무상문주님을 뵈려고 왔습니다. 물론 지금 바로 만날 수 없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이걸 문주님께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곱게 밀봉되어 있는 서찰을 자신에게 조심스레 내밀자 곽춘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이게 뭔가 싶어서였다.
온갖 잡일을 다 해 본 곽춘이지만 무림문파에서 일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중년인이 내미는 게 무엇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아, 비무첩입니다.”
“이게 비무첩이군요!”
그 낌새를 알아차린 중년인이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인 만큼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거만한 무인이었다면 이조차도 무례라 여겼겠지만 중년인은 아니었다.
“맞습니다. 이걸 문주님께서 받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받으시기는 합니다. 대부분은 읽지 않지만요. 문주님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으셔서요.”
“그렇다고 듣긴 들었습니다.”
중년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암암리에 괴짜라고도 불리는 인물이 반호진이었다.
그렇기에 중년인은 수긍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전달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제 권한 밖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만약 문주님께서 비무를 받아들이시면 어디로 찾아가면 될까요?”
“당분간은 구향객잔에 머물 계획입니다. 혹시 아십니까?”
“예. 제가 남창 토박이라 웬만한 객잔은 다 알고 있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곽춘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남창의 거리에 대해서는 훤해서였다.
“그럴 것 없다.”
“문주님!”
대화가 마무리되어 갈 때 곽춘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반호진의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중년인 역시 퍼뜩 놀랐다.
비무를 청하러 오긴 했으나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당황한 것이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귀주 출신의 유호량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저를 찾아오셨다고요.”
“예!”
담담한 신색의 반호진과 달리 잔뜩 긴장한 유호량이 대답했다.
귀청이 울릴 정도로 크게 말이다.
그런 유호량을 한 차례 힐끔 본 곽춘이 들고 있던 비무첩을 반호진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이거 받으세요.”
“비무첩인가?”
“한눈에 알아보시네요?”
“내가 한두 번 받아 봤을 것 같아?”
“아.”
곽춘이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은 많이 편해졌지만 반호진은 무림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거물이었다.
그렇기에 곽춘은 금방 납득했다.
“슬슬 이곳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모양이군요.”
“저는 운 좋게 남창 중앙로에 왔다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세하게는 모릅니다.”
혹시나 반호진의 심기가 불편할까 싶어 유호량이 황급히 대답했다.
자신은 결백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반호진은 따지려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습니까?”
“감숙성에서 포달랍궁, 북해빙궁과 전투를 치를 때 제가 멀리서 문주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반호진을 보며 유호량이 반색했다.
반호진씩이나 되는 무인이 그를 알아봐 주는 것 같아서였다.
비록 스치듯이 마주치기는 했으나 분명 반호진과 만나기는 했었다.
‘그래서인가? 근데 그것치고는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인데. 잠깐만. 유호량? 유호량이라고? 설마 도공(刀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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