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장. 꼬리에 꼬리를 물고. -03
담현이 은근슬쩍 반호진을 쳐다봤다.
호불호가 명백한 성격이기에 싫으면 싫다고 확실하게 티를 내는 게 막내제자였다.
한데 그런 티를 내지 않는다는 건 적어도 싫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또한 자신을 위해 요리해 주는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는 담현이 알기로 없었다.
‘얼굴도 예쁜데 요리까지 할 줄 안다라. 그것도 명문세가의 여식이.’
담현의 두 눈에 따스한 기운이 서렸다.
무작정 엉덩이부터 들이밀고 눌러앉은 이들과는 자연스레 비교가 되어서였다.
동시에 그는 반호진과 모용희수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나쁘지 않아.’
남궁세가, 하북팽가, 사천당가도 혼처로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이 마음에 든다는 뜻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딱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이 정도 노력이면 아무리 목석같은 남자라도 마음이 흔들릴 만하지. 단순히 외모만 보는 건 아닌 듯하니까.’
반호진이 바라는 여성상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담현은 모용희수에 대해서는 반호진에게 맡겨 두기로 결정했다.
“소면도 드셔 보세요. 고기로 육수를 내지 않고 채소와 버섯으로 육수를 내서 만든 소면입니다.”
“고맙구나.”
“가끔은 벽곡단 말고 이런 식사를 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음식도 중요하지만 누구하고 먹느냐가 더 중요하지.”
“사부님과 대사형이라면 저는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담현이 피식 웃었다.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서였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네가 본사에 자주 찾아오면 되지 않더냐.”
“본사에서 나오는 음식은 뻔하지 않습니까. 간도 약하고.”
“네가 자식을 낳으면 자주 오마.”
“당분간은 오시기 힘드시겠네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반호진의 모습에 담현이 역시나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크게 기대하지 않아서였다.
아직은 젊은 나이이기도 했고.
“그건 모르는 일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두 분 다 깜빡하신 거 같은데, 자식보다 혼인이 먼저입니다.”
스리슬쩍 대화에 끼어드는 법무를 바라보며 반호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둘 다 너무 앞서 생각하는 것 같아서였다.
“꼭 결혼을 해야지만 아이가 생기는 건 아니지.”
“맞습니다. 간혹 아이가 먼저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불가에 귀의한 승려가, 그것도 소림사의 현 방장과 차기 방장이 아무렇지 않게 혼전 출산을 말하는 모습에 반호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하니 담현과 법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다들 입을 쩍 벌렸다.
“뭘 그렇게 놀라? 꼭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그런 경우도 있다고 예를 든 것뿐인데.”
“사부님이 말씀하시면 단순한 일례로 들리지 않아서요.”
“너답지 않구나. 그런 약한 소리를 하다니.”
평소에는 보기 힘든 반호진의 약한 모습에 담현이 씨익 웃었다.
덩달아 모용희수와 사마의성도 웃었다.
두 사람에게도 반호진의 이런 모습은 흔하지 않아서였다.
반면에 선우방과 서조운, 모용척은 민망한 듯 식사에 집중했다.
“약한 소리가 아니라. 어후.”
반호진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담현에게 말린 상태였기에 무슨 말을 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반호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생선구이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
무거운 적막이 실내를 가득 짓눌렀다.
네 사람이 모였음에도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으음!”
그 모습에 눈치를 살피던 모용궁이 침음을 흘렸다.
다 같이 모여 있지만 다른 세 사람과 달리 그는 동등한 위치는 아니었다.
모용세가가 명문세가이기는 하나 남궁세가, 사천당가, 하북팽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뒤떨어지기에 모용궁은 어쩔 수 없이 셋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거 미안하외다. 사람을 불러 놓고 정작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당우혁이 입을 열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남궁호, 팽만철과 달리 그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적어도 그는 물러나야 하는 때를 알았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이유를 모용 가주도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오.”
“방장과 만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짐작하겠지만 더는 버틸 수가 없게 되었소이다.”
“역시 그렇게 되었군요.”
당우혁의 말마따나 예상하고 있었기에 모용궁은 놀라지 않았다.
더해서 세 사람이 왜 이런 자리를 만들었는지도 모용궁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듯하니 말 꺼내기가 편하겠군. 우리는 내일 떠나기로 했다.”
지금껏 조용히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팽만철이 통보하듯 말했다.
그러나 형식만 통보일 뿐 어조 안에 담긴 의미는 강요였다.
우리가 떠나기로 했으니 모용세가 역시 본가로 복귀하라는.
그걸 모를 수가 없었기에 모용궁은 내심 자존심이 상했으나 그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서 티를 내서 좋을 게 없어서였다.
힘이 약한 명문세가의 비애이기도 했고.
“알겠습니다.”
“음?”
그리고 이렇게 나올 걸 예상했던 만큼 모용궁은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피해 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굳이 셋과 날을 세울 필요도 없었기에 그는 순순히 강요에 따랐다.
“정말인가?”
이런저런 핑계를 내며 거절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흔쾌히 받아들이자 팽만철은 물론이고 남궁호도 놀랐다.
반대로 당우혁의 눈빛은 가라앉았다.
오직 그만이 단박에 모용궁의 속내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예. 아들도 볼 만큼 봤으니 이제는 돌아가야지요. 딸과 함께 내일 출발하겠습니다.”
“흠흠! 그럼 우리와 같이 출발하면 되겠구먼.”
“짐을 꾸리다 보면 약간의 시간 차이는 있겠지만, 얼추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어쨌든 좋게 받아들여 줘서 고맙군. 나는 또 우리가 압박하는 것처럼 보이면 어떡하나 걱정했었거든. 그런데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결정을 내려 줄 줄이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팽만철의 모습에 모용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좋게 말해 압박이지 그의 입장에서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모용궁은 이번에도 옅은 웃음으로 팽만철의 말을 받아넘겼다.
“저도 염치라는 게 있으니까요.”
“커험! 그리 말하면 우리도 좀 그렇지 않나!”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사과할 것까지는 없고.”
덥석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모용궁의 모습에 팽만철이 그답지 않게 살짝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면 그가 모용궁을 협박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였다.
“모용 가주는 아쉽지 않소이까? 지금 우리들 중에 가장 앞서 있는 게 모용 가주의 딸이지 않소.”
원하는 걸 얻었기에 잠잠해진 팽만철을 대신해 당우혁이 넌지시 물었다.
모용궁의 속을 떠보듯이 말이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할 만큼 했는데도 안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는 기다려 볼 수밖에요.”
“하긴. 저희 모두 할 만큼 하기는 했으니.”
진심이 담긴 모용궁의 말에 당우혁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모용궁과 같은 생각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체면까지 버리고 최후의 방법까지 썼으나 실패했다.
그렇기에 당우혁은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별수 있나. 무상문주가 저리 철벽으로 나오는데. 아직 젊으니 다음 기회를 노려 보자고.”
“우리에게 남은 방법이 그것뿐이기는 하지.”
“서로 비겁한 수는 쓰지 말자고.”
팽만철이 짐짓 위협적인 눈빛으로 세 사람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만약 배신을 하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자네야말로 한 입으로 두말하지 말게.”
“허어! 남아일언 중천금이라는 일곱 글자를 가슴에 평생 담고 살아온 사람이 바로 나야!”
남궁호의 한마디에 팽만철이 버럭 했다.
자기도 모르게 발끈한 것이었다.
그런 팽만철의 모습에 남궁호는 물론이고 당우혁도 콧방귀를 끼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게 어이없어서였다.
‘역시 쉽게 포기할 마음은 없나 보군.’
티격태격하는 세 사람의 모습에 모용궁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순순히 포기하지 않아서였다.
이 정도 했으면 자존심 때문에 포기할 법도 한데 셋 다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까지도 서로를 견제했다.
‘그래도 결국 마지막에 웃는 건 우리다.’
객관적으로 따져 봐도 가장 앞서 있는 건 모용희수였다.
게다가 그에게는 모용척도 있기에 하북팽가, 사천당가, 남궁세가와 달리 끈이 계속 이어져 있었다.
최측근이기에 중요한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정확하게 입수하는 것도 가능했고.
즉 네 명 중 가장 유리한 고지에 있는 게 그였다.
‘하오문의 소문주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맺어지는 건 불가능하지.’
여기 있는 네 명이 떠나면 무상문에 남은 손님은 하오문의 소문주뿐이었다.
그러나 모용궁은 그녀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소림사 방장의 무기명제자와 하오문의 소문주가 맺어지는 건 불가능했다.
그걸 알기에 남궁호, 당우혁, 팽만철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다.
‘두고 보자고.’
웃는 얼굴로 모용궁은 칼을 갈았다.
비록 지금은 힘이 없어 납작 숙이지만 나중에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는 말처럼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었다.
***
반호진이 오랜만에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알게 모르게 그에게 부담을 주던 이들이 오늘 아침에 모두 다 떠나서였다.
짹짹짹!
거기다 완연한 봄이 되어서 그런지 장원 곳곳에 싱그러움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메마르던 땅도 녹색으로 물들었다.
“참으로 평화롭구나.”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반호진은 오랜만에 여유를 만끽했다.
뒷짐을 지고서 장내를 휘적휘적 가로질렀던 것이다.
멍! 웡! 왈!
그때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제법 성견처럼 짖는 삼형제가 우렁차게 짖으며 반호진에게 달려왔던 것이다.
헥헥헥!
거의 다 컸음에도 여전히 강아지처럼 다리에 정신없이 몸을 비비는 삼형제의 모습에 반호진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서 첫째부터 한 마리씩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손이 닿는 족족 발라당 눕더니 배를 깠다.
“안녕하세요, 문주님!”
“오늘은 네 차례인가 보네?”
“제 차례라기보다는 시간이 맞는 사람이 밥을 주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밥을 줬는지 확인한 후에요. 배가 불러도 강아지는 일단 먹고 보는 성격이라 주는 대로 다 먹거든요.”
“의외로 세심하네?”
“생명이잖아요. 또 저를 이렇게 좋아해 주기도 하고요.”
곽춘이 해맑게 웃었다.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싸우고 죽이기도 하지만 개는 아니었다.
특히나 사람에게 길들여진 개는 함부로 공격하지 않기에 어떻게 보면 인간보다 더 낫기도 했다.
멍!
“녀석들.”
반호진에게 하듯이 격렬한 애교를 부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곽춘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애초에 비교 대상이 안 된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처음에 경계하며 다가오지도 않았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장족의 발전이었다.
적어도 이름을 부르면 왔으니까.
월! 워얼!
“그렇게 짖어도 간식은 없어. 너희들은 이미 많이 먹었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삼형제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곽춘의 손을 핥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삼형제의 애교에도 곽춘은 어림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적정량을 먹었기에 더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끼이잉…….
단호한 곽춘의 말에 삼형제의 귀가 축 늘어졌다.
누가 보더라도 크게 낙심한 기색이었으나 곽춘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곽춘아.”
“예! 문주님!”
“너 무공 배워 볼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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