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67화 (267/468)

제 87장. 꼬리에 꼬리를 물고. -02

실제 시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까마득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지만 지난 생에서는 수도 없이 제안받았었기에 딱히 특별한 건 아니었다.

인재를 원하는 곳은 어디든 있으니까.

오히려 인재를 원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게 맞았다.

“일정 기간 동안 표사들이나 표두들의 무공을 봐주는, 즉 무공교두를 해 보는 건 어때? 혼자서 많은 인원을 감당하기는 힘이 드니 소수만 받는 식으로. 일정 수준이 되는 이들을 받으면 실제로 투자하는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을 거야. 대신 가르치는 비용은 고액이어야겠지. 그러다가 여유가 생기면 점차 규모를 늘려 가고. 그러다가 괜찮은 인재가 있으면 문도로 받아들여도 되고. 재능이 있지만 그걸 몰라보는 경우는 의외로 많으니까.”

“정확하게는 소림사와 관계된 표국들이겠지요?”

“물론이지. 뿌리가 같아야 사제가 더 쉽게 조언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또한 배우는 이들도 사제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테고. 예상컨대 대부분 우리와 같은 배분이거나 아래일 테니.”

“나이는 제가 한참이나 어릴 텐데요?”

반호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일대제자 중에 가장 어린 게 그였기 때문이다.

배분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무인들이 신경 쓰는 게 바로 나이였다.

그리고 그 말은 그만큼 민감하다는 뜻이었다.

“무림에서 나이보다 중요한 게 실력이지. 더구나 실력 차이가 애매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데 누가 나이 가지고 따지겠어? 그럴 거면 아예 신청을 하면 안 되지.”

“그렇긴 하네요.”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거 없어. 일종의 무사부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그렇다고 강요하는 건 아니고. 이런 방안도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싶어서. 사제에게 직접 서신을 보내고 싶지만 이곳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곳은 별로 없어 나에게 보낸 듯해.”

“왔어도 다 안 봤을 겁니다.”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미 일전에 서신들을 어마어마하게 받아 본 적이 있는 반호진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제 모르는 곳에서 오는 편지는 받고 싶지 않았다.

“안 보는 거 반, 못 보는 것 반이겠지.”

“비슷합니다.”

“싫으면 하지 않으면 돼. 너무 부담 가질 거 없어.”

“고민은 해 보겠습니다. 사형 말씀대로 상부상조하는 일인 것 같아서요. 남이 아니니 어찌 보면 소림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반호진은 진심으로 법무의 말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기에 반호진은 꽤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도착 후 각자 바쁜 시간을 보낸 담현과 법무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반호진을 찾았다.

오랜만에 반호진과 식사를 같이 하기 위해서였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이 예상했던 대로 서조운과 선우방, 모용척, 사마의성이 먼저 와 있었다.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방장!”

“강녕하셨는지요!”

“안녕하십니까!”

반호진을 시작으로 일행들이 공경심을 가득 담아 포권을 해 오자 담현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 명 한 명이 대단한 후기지수였기에 절로 흐뭇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향후 중원무림을 떠받칠 이들이었기에 담현은 한 명씩 눈을 마주하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모두 반갑습니다.”

게다가 막내제자인 반호진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었기에 담현으로서는 더더욱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반호진의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담현은 그랬다.

“앉으시죠.”

법무와도 인사를 끝마치자 반호진은 자리를 권했다.

소림사에서는 그가 객식구였으나 이곳에서는 달랐다.

무상문의 주인이 그였기에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았다.

“허허허.”

그런 반호진의 모습에 담현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분명 처음일 텐데도 어색하지 않은 게 대견해서였다.

그래서인지 마음 한편에 있던 걱정도 서서히 흩어졌다.

끼이익.

그사이 문이 열리며 음식 냄새가 확 풍겨 왔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로 쟁반을 들고 오는 사람을 본 담현과 법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두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인물이 음식을 가져와서였다.

“허!”

“모용, 소저 아닙니까?”

얼마나 놀랐는지 웬만해서는 평정심이 흐트러지지 않는 담현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법무는 말을 더듬었다.

그 정도로 두 사람 다 모용희수의 등장에 놀랐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방장. 그리고 법무 대사님.”

대경한 둘과 달리 모용희수는 쟁반을 원탁에 내려놓고는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작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어…….”

모용희수의 인사에도 법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인사를 받아 주기보다는 딱딱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려 반호진을 쳐다봤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눈빛으로 묻는 것이었다.

“아,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모용 소저께서 직접 요리를 해 주신지 좀 되었습니다. 드셔 보시면 아시겠지만 실력도 뛰어납니다. 웬만한 숙수보다 더요.”

반호진의 말에 법무와 담현은 더더욱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분명한 건 모용희수가, 천하의 삼봉 중 한 명인 백봉이 직접 요리를 해 왔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게 믿기지가 않았다.

“호호호. 감사합니다.”

곤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두 사람과 달리 모용희수는 섬섬옥수로 입을 가리며 살포시 웃었다.

반호진의 칭찬에 기뻤지만 그런 티를 최대한 감추었다.

그러면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아시잖습니까. 저 빈말 안 하는 거.”

“그럼 좀 더 해 주세요.”

“야.”

언제 조신한 티를 내었냐는 듯이 당돌하게 요구하는 모용희수의 모습에 보다 못한 모용척이 나섰다.

자신들끼리만 있을 때는 상관없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담현과 법무가 있었다.

그렇기에 선을 넘는 말이나 행동은 삼가야 했다.

“왜?”

“자제해.”

현실 남매라는 걸 보여 주듯이 두 사람의 대화는 짧았으나 의미는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굳이 모용척이 눈짓으로 담현과 법무를 가리키지 않아도 말이다.

“이 정도 가지고 뭘. 문주님도 별말씀 안 하시는데.”

“끄응!”

반호진을 걸고넘어지는 모용희수의 모습에 모용척이 앓는 소리를 냈다.

분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모용척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다른 요리도 가져올게요.”

“이것만 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두 분께서 오셨잖아요. 그래서 저도 평소보다 좀 더 신경 썼어요.”

반호진을 바라보며 모용희수가 싱긋 웃었다.

다른 손님도 아니고 반호진의 사부와 사형이었기에 모용희수는 이참에 확실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자신이 이만큼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기도 했고.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야 해.’

모용희수는 오늘 낮에 담현이 남궁호, 당우혁, 팽만철과 만났다는 걸 부친에게서 들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남들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담현이 세 사람을 만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모용희수는 높은 확률로 자신이 짐작이 맞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해.’

언제나 요리를 함에 있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오늘은 더더욱 정성을 쏟았다.

어쩌면 마지막 만찬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솔직하게는 담현과 법무에게 예쁘게 보이고도 싶었고.

탁. 탁. 탁.

그런 그녀의 마음이 전달된 것인지 원탁에 하나둘 놓이는 음식들을 보며 담현과 법무가 점점 더 눈을 크게 떴다.

모용희수가 가져오는 음식이 하나같이 쉬운 요리가 아니어서였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인데, 직접 가져오신 요리는 모용 소저께서 만드신 겁니까?”

“예. 제가 재료손질부터 전부 다 직접 했어요. 맛은 장담할 수 없지만요.”

“허어.”

담현과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법무가 입을 벌렸다.

그 정도로 모용희수의 요리는 수준이 상당해 보였다.

특히 고기를 안 먹는 그와 담현을 위해서인지 두부와 콩 요리가 꽤 많았다.

“모용 소저도 다 가져오셨으면 앉으시죠.”

“네.”

황매향이 마지막 음식을 원탁 위에 내려놓고 나가자 반호진이 자리를 권했다.

눈치껏 다 가져왔다는 걸 알아차리고 앉으라고 한 것이었다.

그 말에 모용희수는 생긋 웃으며 비어 있던 모용척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음식도 다 나왔으니 식사를 시작할까요?”

“그러자꾸나.”

대답과 함께 담현이 젓가락을 들어 올리자 다른 이들도 하나둘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딱 한 명, 모용희수만은 달랐다.

수저를 드는 대신에 반짝이는 눈으로 담현과 법무를 은근슬쩍 힐끔거렸다.

두 사람의 평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스윽.

모용희수의 시선을 느끼며 담현은 젓가락을 뻗었다.

그녀만큼이나 담현 역시 궁금했다.

모용희수가 직접 만든 음식이 말이다.

우물우물.

일단 육안으로 보기에 괜찮고, 향도 나쁘지 않다면 맛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되었다.

그래서 담현은 망설이지 않고 건두부볶음을 조금 집어 입에 넣었다.

“으음!”

조심스레 건두부와 볶아진 채소를 함께 씹던 담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기에 담현은 감탄한 눈빛으로 모용희수를 바라봤다.

“호오. 맛있는데요?”

담현이 건두부볶음에 손을 가져갔다면 법무는 가지볶음을 먹었다.

그러고는 담현과 마찬가지로 탄성을 터트렸다.

예상 밖으로 맛이 뛰어나서였다.

“정말요?”

“네. 모용 소저께서 직접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요.”

“확인을 원하시면 부총관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사실 저희도 처음에는 따로 확인해 봤습니다.”

농담인 법무의 말을 받으며 반호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그 말에 모용희수는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의심이 들 정도로 맛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단하십니다.”

“아니에요. 아직 부총관에 비하면 갈 길이 먼 걸요. 좀 더 연습해야 해요.”

진심이 담긴 법무의 감탄에 모용희수가 얼굴을 푹 숙였다.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이었다.

“정말 맛있습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맛있게 드셔 주셔서 감사한걸요.”

법무에 이어 담현마저도 극찬해 주자 모용희수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근데 입꼬리는 귀에 닿을 듯이 바짝 올라가 있었다.

“배운 시간에 비하면 이 정도도 대단한 거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반호진의 말에 담현이 동조했다.

요리도 재능이 크게 좌지우지하는 분야였다.

애초에 재능이 없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일정 수준 이상 오르기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담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모용희수를 바라봤다.

요리에 손을 댄 이유가 막내제자 때문이라는 걸 알았기에 담현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다른 음식도 드셔 보세요. 다 맛있습니다. 특히 가지튀김이 끝내줍니다. 일부러 고기를 안 넣었더라고요.”

“가지 좋지.”

평소에는 벽곡단으로 식사를 대신하지만 그렇다고 차려 준 진수성찬을 거절할 정도로 담현은 매몰찬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많이 먹지는 않아도 모용희수가 만든 음식들을 하나씩 다 집어 먹었다.

‘모용세가의 금지옥엽이 요리라.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야.’

담현은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더불어 모용희수가 얼마나 간절한지도 느낄 수 있었다.

남녀사이라는 게 단순히 노력만으로는 절대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정도 노력이라면 또 몰랐다.

‘호진이도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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