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6장. 반가운 손님. -01
가장 마른 체구의 소년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친한 친구를 넘어 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곽춘의 말을 듣고 무상문에 모든 것을 걸었기에 소년은 절박했다.
말 그대로 배수진을 친 상태였기에 소년은 어떻게든 시험에 붙어야 했다.
“너만 그러냐. 우리 다 같은 상황이지.”
“막말로 일자리는 찾아보면 있지. 다만 일당이 형편없어서 그렇지.”
“진짜 사기꾼 새끼들이 많아. 어떻게든 싸게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하니.”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있는 놈들이 더하다는 말이 있잖아. 딱 그 꼴이지.”
여기저기에서 푸념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당한 게 많았기에 다들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건 곽춘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무상문에 뽑히기 전에는 그도 친구들과 같은 처지였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야. 적어도 무상문은 달라. 하인, 잡부라고 해서 막 대하지 않아. 엄청 예의를 차려 주는 건 아니지만 업신여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어디야?”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착한 사람들이지. 대개는 우리를 노예로 생각하니까.”
“맞아.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지. 우리도 힘들고 지치는 건 똑같은데.”
곽춘의 말에 친구들이 눈을 빛냈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모두가 형제이고 가족이었다.
자신을 버린 부모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게 곽춘이었기에 소년들은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일만 잘하면 뭐라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어. 어떻게든 부려 먹으려고 없는 일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물론 일을 제대로 못 하면 쫓겨나겠지만.”
“열심히 하는 거야말로 우리가 가장 잘하는 거지!”
“근면성실!”
“임금만 밀리지 않고 제대로 챙겨 준다면 난 발바닥이라도 핥을 수 있어!”
극단적인 친구의 말에 곽춘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너무 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각오를 보여 주는 용도로는 아주 적당했다.
“적당히 해, 적당히. 괜히 실수하지 말고. 너희가 합격해야 나중에 또 사람을 뽑을 때 동생들이 들어올 수 있어. 내가 물꼬를 튼 것처럼 너희들이 이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알아들어?”
“음!”
소년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단순히 기대와 긴장만 서렸던 얼굴에 책임감이 덧씌워졌던 것이다.
자신만 잘살아서는 안 되었다.
또 다른 형제들, 동생들도 잘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했기에 소년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규모가 점점 더 커질 거라고 했지?”
“응. 아직은 문도가 단 한 명도 없어. 근데 현재 찾아온 곳이 남궁세가, 사천당가, 하북팽가, 모용세가야. 거기다 하오문도 있어.”
“조합이 꽤 특이하네.”
백도무림의 명문세가와 함께 정사중간의 하오문이 같이 있다고 하자 볼이 홀쭉한 소년이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웬만해서는 보기 드문 조합이어서였다.
물론 아예 교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처럼 한 곳에 모여 있는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았다.
“다 문주님의 높으신 덕망 덕분이지.”
“정확하게는 명성 때문이잖아. 천하의 소림검신이 웅크리고 있는 곳이니까.”
마치 자신이 반호진이라도 된 것마냥 어깨를 으쓱이는 곽춘을 보며 친구들이 피식 웃었다.
이곳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충성심이 너무 과한 것 같아서였다.
또 처음 보는 모습이었기에 적응이 안 되는 것도 있었다.
“명성을 생각하면 더 대단한 거지. 막말로 우리가 무림오대세가는 제외하더라도 십대세가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아? 정문에 다가가기도 전에 쫓겨날걸?”
“그렇긴 하지.”
“다들 알고 있겠지만 한 번 더 말할게. 이건 기회야. 그러니 반드시 잡아야 해. 다시 지옥 같은 노예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지?”
“물론이지.”
소년들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굳이 곽춘이 말하지 않더라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반호진과의 만남이 얼마나 큰 기회인지 말이다.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다들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드시지요.”
그때 문 밖에서 황매향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반호진이 도착한 것이었다.
그 목소리에 곽춘은 물론이고 여섯 명이 동시에 일어나서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낡고 해진 옷이지만 그나마 이게 가장 깨끗한 옷이었다.
끼이익.
이윽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흑의무복을 입고 있는 반호진이 황매향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곽춘을 위시로 소년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그래, 반갑다. 일단 앉아.”
잔뜩 긴장해 있는 아이들에게 자리를 권하며 반호진은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그 뒤에는 황매향이 시립하듯 섰다.
별다른 감정이 없는 반호진과 달리 황매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년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저는 나가 있을까요?”
“너 편한 대로 해. 있어도 되고, 나가도 되고.”
조심스럽게 곽춘이 물어 왔으나 반호진은 어느 쪽이든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곽춘이 있고 없고는 그의 결정에 크게 중요하지 않아서였다.
“그럼 저도 같이 있고 싶습니다. 형제들이나 마찬가지인 녀석들이라서요.”
“그런 것 같네.”
얼어 있는 아이들을 살펴보며 반호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옷은 나름 깔끔하지만 처음 곽춘을 봤을 때처럼 다들 건강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하나같이 목내이처럼 비쩍 말라 있는 모습에 반호진은 살짝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걸 티 내지는 않았다.
이런 것들이 아이들을 더더욱 의기소침하게 만든다는 걸 알아서였다.
“감사합니다!”
“뭘 감사까지야. 나이는 동갑이고?”
“예! 올해 열셋입니다!”
감사 인사를 하고 빠진 곽춘을 대신해 가장 똘똘하게 생긴 아이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작게 말해도 다 들려. 그러니까 굳이 크게 말할 필요 없어.”
“죄, 죄송합니다!”
“사과할 것도 없고. 이곳에 대해서는 춘이에게 대략적으로 들었을 테고.”
“그렇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큰 거 없어.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돼. 근면성실하게. 다른 건 보지 않아. 나이, 성별, 집안 같은 건. 솔직히 그런 걸 볼 필요는 없잖아? 중요한 건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이지.”
꿀꺽!
나지막한 목소리지만 여섯 명의 아이들에게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귀에 콕콕 박히는 것 같은 음성에 여섯 명에게서 동시다발적으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춘이를 봐서 알겠지만 나는 급여 이상의 일을 원하지는 않아. 서로 편하게 나는 주는 만큼, 너희는 받는 만큼만 일하면 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확인을 해야 하니. 각자 특기 하나씩 얘기해 봐. 내가 가장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
생각했던 것만큼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편안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마지막에 특기를 말해 보라는 소리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선뜻 떠오르는 게 없었기에 소년들은 자기도 모르게 서로를 바라봤다.
“어, 그게 그러니까요…….”
정적이 이어지자 곽춘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본능적으로 이 고요함을 끝맺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자신의 인맥으로 운 좋게 들어 온 아이들로 비춰질 수도 있었기에 곽춘은 다급한 얼굴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한 가지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어서 콕 짚어 말씀드리기가 애매합니다.”
“웬만한 건 두루두루 할 줄 아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나게 잘하는 건 없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소년들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특기라고 할 만한 게 없어서였다.
한데 반호진은 그 말에 도리어 옅게 웃었다.
이런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도 말했다는 건 그만큼 솔직하다는 걸 뜻해서였다.
“사과할 것까지는 없고. 좋아. 일단은 열흘 정도 지켜본 후에 고용할지 말지에 대해서 결정할 거야. 물론 일하는 동안 하루 일당은 나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미리 말해 두는데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일하지는 마라. 다치거나 아프면 자신의 몸 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할 테니까.”
“네, 넵!”
고용이 된 건 아니지만 소년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 자리를 만들어 준 곽춘도 며칠간은 확답을 듣지 못한 상태로 일을 했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일단 탈락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여섯 명은 만족했다.
“아, 여기는 부총관. 열흘 동안은 너희들의 상관이다. 앞으로 너희들이 할 일을 정해 줄 거야.”
“잘 부탁드립니다!”
“…….”
소년들이 허리를 꾸벅 숙였으나 황매향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냉정한 눈으로 마주 인사하기만 했다.
“일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부총관에게 물어보면 돼. 부총관이 없으면 춘이에게 물어보든가.”
“알겠습니다!”
“부총관은 안내해 주면서 다른 사람들도 소개시켜 주고.”
“네.”
“자, 가서 일 시작해.”
앉은 상태로 반호진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곽춘과 여섯 명은 동시에 직각으로 허리를 숙여서 인사하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통통한 애들이 없네. 얼마나 부려 먹었으면.”
조용해진 방 안에서 반호진이 혀를 찼다.
곽춘 때도 느꼈지만 다들 영양 상태가 심히 좋지 않았다.
지금이야 성장기니까 어찌어찌 버티지만 나이를 먹으면 다들 골병이 들 게 분명했다.
“그래도 확인할 건 해 봐야지.”
직접 만나 본 여섯 명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패기는 조금 부족할지 모르나 그건 아이들의 환경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반호진이 중점적으로 본 건 능력이 아니라 인성이었다.
부족한 능력은 차차 키워 가면 될 일이었기에 반호진은 여섯 명의 평가를 내심 긍정적으로 내리고는 하오문이 보내 온 책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
“무상문이라.”
“사제가 무상대능력에서 이름을 따온 듯합니다.”
“반 정도는 그럴 테고 나머지 반은 야망의 표현이지 않을까 싶구나.”
직접 검으로 새긴 듯한 현판을 올려다보며 담현이 빙긋 웃었다.
다른 이들은 그저 잘 새긴 글자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달랐다.
담현의 눈에는 현판에 새긴 반호진의 각오가 온전히 느껴졌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야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재능까지 있으니까요.”
“내 제자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천재이기는 하지.”
“그렇다고 사제가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도 않지 않습니까. 유혹에 넘어간 것도 아니고요.”
법무의 말에 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그 역시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 젊은 나이에 명성을 얻으면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하기 마련인데 반호진은 그렇지 않았다.
가진 힘을 표출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용히 지냈기에 담현은 그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애늙은이가 따로 없지.”
“사고 치고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습니까. 저는 대단하기도 하지만 신기하기도 합니다. 제가 만약 사제였다면 이렇게 생활할 자신이 없습니다.”
불가에 귀의한 몸이지만 법무 역시 사람이었다.
또한 무인이었다.
그렇기에 법무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반호진처럼 할 자신이 말이다.
“들어가 보자꾸나. 밖은 얼추 봤으니 안에도 들어가 봐야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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