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제 85장. 달갑지 않은. -03
사마의성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꺼냈다.
남궁세가나 하북팽가, 사천당가보다는 그래도 모용세가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였다.
일단 다른 세 곳과 비교하면 가장 가깝기도 했고.
“척이 형한테 부탁을 해야 한다는 게 좀 그러네.”
“별수 없잖아. 다른 방법이 없는걸. 그렇다고 하오문에 부탁할 거야?”
“그럴 수는 없지. 이곳은 무상문인데.”
“마음 같아서는 미로진이라도 설치하고 싶지만 부총관이나 춘이를 생각하면 그건 무리고.”
얌전히 서 있던 곽춘이 움찔거렸다.
기문진법을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소문은 많이 들었기에 지레 겁먹은 것이었다.
“사람이 부족한 걸 이런 것으로 느끼게 될 줄이야.”
“앞으로는 날파리가 아닌 똥파리들이 모여들 수도 있어. 어차피 한 번은 겪고 넘어갔어야 할 일이기도 하고.”
“근데 언제까지 모용세가에 부탁할 수는 없잖아?”
“그렇지.”
사마의성이 입맛을 다셨다.
모용세가에 부탁한다고 해도 이건 말 그대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사람. 사람이 필요해.’
사마의성이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무상문은 단순히 지내기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반호진과 함께 일으킨 문파였기에 사마의성은 지금의 일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언젠가는 사마세가를 재건하기 위해 떠나겠지만 그 전까지는 집이라고 생각하며 의형제들과 함께 키워 나갈 계획이었기에 사마의성은 대책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형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문도들은 언제라도 들일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
“아마도?”
“흐음. 그럼 일단 척이 형한테 부탁해 놓자. 형님께서 따로 생각이 있으실 거야. 우리가 너무 나서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좀 그러니까. 의동생이긴 하나 엄밀히 따지면 빈객이니까.”
“웬일이래? 네가 맞는 말도 하고?”
“난 늘 옳은 말만 했거든?”
빈정거리는 말에 서조운이 미간을 모았다.
그러나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는 친구의 모습에도 사마의성은 여유롭게 웃었다.
“이상하네. 내 기억에는 없는데.”
“지금 싸우자는 거지?”
“그런 건 아니고. 일단은 모용세가에 부탁하자. 말 나온 김에 지금 바로. 안 된다고 하면 급한 대로 내 수하들에게 부탁하고.”
“사마세가의 가솔들에게?”
서조운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하니 사마의성이 수하들을 동원할 줄은 몰라서였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우라는 말도 있잖아. 무상문은 나에게 있어 단순한 곳이 아니야. 제이의 집이나 마찬가지야. 혹시 넌 아냐?”
“그럴 리가. 나도 마찬가지야. 서가장 다음으로 소중한 곳이 이곳이라고.”
서조운이 흥분했다.
누가 뭐래도 반호진의 오른팔이자 가장 가까운 동생은 그였다.
그렇기에 서조운은 사마의성의 말에 격렬하게 반응했다.
“정말? 요즘에 예 소저에게 빠져서 좀 등한시하는 것 같던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연히 무공을 봐 줘야 하니까 유화하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진 건데.”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지금 애랑 나를 엮으려고 하는 거야?”
서조운이 진심으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하늘에 맹세하건대 그는 단 한 번도 예유화를 여자로 본 적이 없었다.
“진심인가 보네. 난 엄청난 미인이기에 네가 좀 흔들릴 줄 알았는데.”
“미인?”
이어지는 사마의성의 말에 서조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지금은 말라서 미모가 안 드러나는 거야. 살이 좀 오르고 건강해지면 아마 엄청난 미인이 될걸? 모용 소저나 당 소저와 비교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을 거야.”
“설마.”
서조운이 코웃음을 쳤다.
분명 지금만 해도 미색이 상당하기는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무림삼봉에 버금갈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두고 봐. 일 년, 아니 반년만 지나도 내 말이 맞았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기대되는 정도인 건 사실이지만 무림삼봉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지.”
“내기할래?”
“좋아. 뭘 걸을까?”
“은자 백 냥?”
제법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서조운이었으나 은자 백 냥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서조운은 움찔거렸다.
“백 냥씩이나?”
“왜? 쫄려?”
“쓸데없이 금액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보다 돈도 많으면서 말이 많다? 네가 무조건 이길 거라며? 근데 왜 쫄아?”
“흥! 다 널 위해서 한 말이지. 친구의 주머니 사정도 생각해 줘야 하니까.”
서조운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판단을 믿었다.
사마의성이 틀렸고, 자신이 맞았다고 말이다.
“내 주머니 사정은 걱정 안 해 줘도 돼. 나름 소소하게 버는 게 있으니까. 무재 대신에 나에게는 두뇌가 있으니까. 돈을 버는 데는 무재보다 이쪽이 훨씬 더 유리하거든.”
“어쨌든 내기는 성립된 거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물론. 은자 백 냥. 계약서라도 쓸까?”
“안 써도 돼. 내 자존심이 계약서보다 더 확실하니까.”
콧대를 세우며 말하는 서조운을 보며 사마의성이 씨익 웃었다.
순순히 인정하기는 싫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서조운에 한해서는 계약서보다 자존심이 더 확실했다.
“그럼 정확히 일 년 후에 결과를 보자고. 판정은 형님께 부탁드리는 걸로.”
“아주 정확하겠군.”
서조운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라면 모르겠으나 반호진이라면 어떤 결과라도 수긍할 수 있었다.
“자, 그럼 척이 형한테 가자. 내기도 내기지만 할 일은 해야지.”
“물론.”
자신에게 괜히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서 있는 곽춘을 데리고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
사위에 어둠이 짙게 내린 야심한 시각에 반호진은 침상에 누운 상태로 두 눈을 떴다.
아주 미세한 기척이 그의 기감에 잡혀서였다.
게다가 반호진의 신경을 건드리는 건 다가오는 기척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기운이 전각 주변을 은밀하게 잠식했다.
스르륵.
웬만한 절정고수도 감지하기 힘든 변화였으나 반호진에게는 소용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지금의 일을 벌인 이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즉 전각 주변의 기운을 흐트러뜨린 목적은 반호진이 아니었다.
그걸 단박에 알 수 있었기에 반호진은 몸을 일으키며 실소를 흘렸다.
“당 소저.”
“역시 눈치채셨군요.”
“모를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조금은 그러길 바랐어요. 알아차릴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긴 했지만.”
“그럼 이제 제가 무슨 말을 할지도 아시겠군요.”
무미건조한 반호진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창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모포를 대충 걸친 듯한 차림의 당서린이 침소 안으로 들어왔다.
“죄송하지만 저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전에는 이 방을 나설 생각이 없어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저야말로 묻고 싶어요. 이렇게까지 거절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본가가 성에 차지 않으신가요?”
“말은 바로 합시다. 사천당가의 욕심이 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침의를 입은 상태로 반호진은 침상에서 벗어나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당서린에게 자리를 권하지는 않았다.
“본가가 꼭 데릴사위만 허락하는 건 아니에요. 본가는 문주님의 결정을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다만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처가에 얹혀사는 삶은 제가 원하는 삶이 아닙니다만.”
“꼭 그렇게만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말씀드렸다시피 데릴사위가 싫으시다면 제가 이곳으로 올 수도 있어요.”
당서린은 망설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미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부친과 얘기가 끝난 상태였기에 그녀는 반호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싫습니다.”
“……대체 왜 제가 싫으신 거죠?”
“아무 이유 없이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 반대도 있는 게 남녀사이니까요.”
당서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천하의 독봉이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에, 그것도 혼자서 남자의 침소에 찾아왔음에도 반호진의 표정은 건조했다.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게 그녀는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다.
“본가 때문인가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정말, 정말 저는 안 되는 건가요?”
“예.”
반호진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보통의 남자라면 얼씨구나 하고 좋아하겠지만 반호진은 달랐다.
결혼은 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애정도 없는 여자하고 할 생각은 없었다.
주르륵.
매몰찰 정도로 단호한 반호진의 대답에 당서린의 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끝내 방울져 볼을 가로질렀던 것이다.
하지만 당서린의 눈물에도 반호진의 표정과 눈빛은 미동도 없었다.
꾸욱!
그런 반호진의 모습에 당서린은 몸을 감싸고 있는 모포를 움켜쥐었다.
눈물 공격이 통하지 않았으나 아직 그녀에게는 마지막 한 수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당서린은 그 한 수를 차마 꺼내지 못했다.
준비한 한 수는 말 그대로 최후의 방법이었기에 아무리 그녀라도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만약에 실패한다면?’
당서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마음 한구석에서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는 게 들려왔다.
그리고 당서린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지금까지 반호진이 보여 준 모습이라면 성공할 가능성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더 컸다.
“여기까지 하시죠. 지금 이 자리에서 더 무엇을 한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알고 계셨군요.”
“최후의 수단이 무엇일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요.”
“…….”
당서린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모포가 온몸을 감싸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
“이만 돌아가시죠. 참고로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고요.”
“……고마워요.”
진짜 눈곱만큼의 여지도 주지 않는 반호진의 태도에 당서린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몸을 돌렸다.
지금의 말이 자신의 청백지신을 위해서라는 걸 알았기에 망설이지 않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쿠웅.
그와 동시에 활짝 열렸던 창문이 닫혔다.
반호진이 무형지기로 창문을 닫은 것이었다.
“아무래도 더 확실하게 해야겠어.”
다시 고요해진 방 안에서 반호진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눈치껏 알아차릴 줄 알았는데 역시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느끼며 반호진은 거칠게 기도를 일으켰다.
이 사태의 원흉에게 자신의 분노를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우우우웅!
이윽고 반호진을 중심으로 거대한 파동이 일어났다.
동심원을 그리며 주변을 잠식한 기운들을 삽시간에 밀어내 버렸다.
***
곽춘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갈증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지금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목은 물론이고 입술도 바짝 말랐다.
“우,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
“얼마 전에 무작정 찾아왔던 사람들은 크게 혼쭐나고 쫓겨났다며?”
“그러니까 무조건 잘해야 해, 무조건!”
곽춘만큼이나 긴장한 또래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다리를 떨었다.
긴장으로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다들 진정해.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들보다는 상황이 낫잖아. 무상문주님께서 얼굴을 직접 보고 결정하시겠다고 하니까.”
여섯 명 중 가장 침착해 보이는 소년이 입을 열었다.
물론 그나마 가장 낫다는 점이지 이 소년도 긴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큰 기회인 건 분명 맞지.”
“나는 미풍객잔도 때려치우고 나왔어. 반드시 붙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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