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5장. 달갑지 않은. -02
당서린이 옅게 웃었다.
무상문이라는 이름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이름은 괜찮네. 어울리기도 하고. 물론 이걸 세우기 전에 본가로 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당우혁이 얼굴 가득 씁쓸한 기색을 띠었다.
숭산에서 나온 건 좋았지만 목적지가 사천성 성도가 아니라 남창인 게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왕 하산할 거라면 당가타로 왔으면 싶었기에 당우혁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가주님.”
“그래. 아직은 괜찮아. 아는 사람들만 알고 있으니.”
장남의 말에 당우혁은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창에 정착한 게 아쉽긴 하나 그렇다고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진 건 아니었다.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정리하는 것도 쉬웠다.
“쯧쯧! 아직도 헛된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구만?”
“자네가 왜 여기 있나?”
“왜 여기 있긴. 그쪽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나왔지. 그리고 나만 나온 게 아니야.”
팽만철이 히죽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화려한 청의무복에 장포를 걸친 남궁호가 나타났다.
거구의 팽만철에 가려져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둘 다 할 일이 없나 보군.”
“자네만 하겠는가.”
면전에서 대놓고 투덜거리는 당우혁을 바라보며 남궁호가 씨익 웃었다.
사돈 남 말하고 있어서였다.
“안 될 것 같으면 이만 돌아가지? 체면을 생각해야지. 가솔들이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하겠나.”
“미안하네만 모두가 같은 생각이라서 말일세. 천하제일가.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인가.”
“이번 생에서는 불가능할 게야. 그러니 포기하게나.”
“글쎄. 그건 두고 봐야지.”
타이르듯 말하는 당우혁을 보며 남궁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절대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는 않겠다는 미소였다.
“체면을 따지면 이곳에 오면 안 되지. 우리 셋 다 말이야.”
거기에 팽만철도 가세했다.
짐짓 위해 주는 것처럼 말했으나 당우혁이 원하는 건 하나였다.
그렇기에 팽만철은 가증스러웠다.
은근슬쩍 자신과 남궁호를 쳐 내려는 게 말이다.
‘물론 남궁호만 쳐 내 주면 나야 좋지만.’
팽만철이 속으로 히죽 웃었다.
둘이 치고받고 싸우다 같이 나가떨어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또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둘이 합심해서 날 방해하러 왔구만.”
“그런 것도 좀 있고, 마중 나온 것도 있고.”
“마중은 호진이가 나와야지.”
“호진이라니. 이제는 일문의 수장인데. 그에 맞게 대우해 주어야지.”
팽만철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이는 어려도 반호진은 이제 일파의 수장이었다.
더구나 실력은 당우혁보다 윗줄이었고.
그렇기에 아랫사람 대하듯이 말하는 건 무례였다.
“흐음. 맞아. 이제는 엄연히 수장인데. 내가 실언을 했어.”
“나야 자네가 말실수하면 좋긴 하지만.”
“헛된 꿈은 자네가 꾸고 있는 것 같은데.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면 빨리 접는 것도 현명한 방법일세.”
“맞는 말이긴 한데, 자네한테 듣고 싶지는 않군.”
“후후후!”
한마디도 지지 않는 팽만철을 보며 당우혁이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자 팽만철은 물론이고 남궁호도 기이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늦게 왔음에도 이상하게 여유가 있어서였다.
게다가 여유 아래에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기에 두 사람 다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당우혁을 바라봤다.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인데?
-그런 것 같군.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고서 팽만철과 남궁호는 전음을 주고받았다.
이것 말고는 당우혁의 여유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였다.
-무엇일까나.
-두고 보면 알게 되지 않겠나.
-성공하지는 않겠지?
팽만철의 동공에 걱정이 서렸다.
이러다가 닭 쫓던 개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는 화병으로 죽을지도 몰랐다.
-모르지. 근데 장담컨대 쉽지는 않을 거야. 우리가 그 산증인이지 않나. 호진이는 만만치 않아. 당가주보다 더.
-그렇긴 한데…….
팽만철도 남궁호의 말에 동의했다.
쉬운 남자였다면 반호진은 진즉에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을 것이었다.
하지만 당우혁의 수완도 보통이 아니기에 팽만철은 걱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무상문주는 어디에 있나? 자네들이 알고 있다면 문주도 내가 온 걸 알고 있을 터인데.”
“없어.”
“응?”
“외출했거든. 목적지는 우리도 모르고. 아마 저녁이 되기 전에는 돌아올 거야. 늘 그랬으니까.”
“흐음. 그런가.”
당우혁이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먼 길을 달려서 왔는데 정작 주인이 없다고 하자 허탈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안내해 줄 사람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가 있잖아?”
“네?”
“내가 물렸어. 이 몸이 직접 숙소로 안내해 주겠다고.”
알려진 성격답게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입을 열었던 당서린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도왕이 길 안내를 해 주겠다고 말하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자네가?”
“왜? 안 될 게 있나? 어차피 나도 빈객인데. 자네가 머물 곳은 우리가 머무는 곳 근처야.”
“으음!”
당우혁이 침음을 흘렸다.
두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당연히 견제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당우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래서 무상문주도 허락했지.”
“듣자 하니 인원도 그리 많지 않고 해서 말이지.”
“좋네. 가세나.”
거절할 명분도, 따질 명분도 없었기에 당우혁은 순순히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분란을 일으켜 봤자 그에게 좋을 건 없어서였다.
또한 원하는 걸 이뤄 낼 거라는 자신이 있었기에 당우혁의 고민은 짧았다.
‘너만 믿는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남궁호와 팽만철을 일별한 당우혁의 시선이 당서린에게로 향했다.
이제 모든 건 그녀에게 달려 있었다.
***
이른 아침부터 반호진은 정문으로 향했다.
새벽부터 시작된 소란으로 인해 그가 직접 움직인 것이었다.
그런 반호진의 양옆에는 서조운과 사마의성이 있었다.
끼이익.
정문에 도착하자 곽춘이 눈치껏 문을 열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반호진을 이곳에 오게 만들었던 이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마치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있던 청년들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반호진의 등장에 오체투지를 하듯 이마를 차디찬 땅바닥에 대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반호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에게 죄를 지었나?”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나지막하지만 묘하게 가슴을 철렁이게 만드는 반호진의 목소리에 다섯 명의 청년들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헐레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체투지를 별로 안 좋아하는 듯하자 빠르게 자세를 바꾼 것이었다.
덕분에 반호진은 다섯 명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무슨 일이지? 이 이른 시간에 날 불러내고 말이야. 보아하니 내가 누군지 아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더 의문이 든단 말이지. 나에 대해서 아는데 이렇게 무례하게 나온다? 그 말인 즉슨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겠지?”
“무, 문주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할 자신이 있습니다!”
“온몸을 바쳐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충성으로 모시겠습니다!”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년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용이 상당히 이상했다.
“한마디로 본문에서 일하고 싶다고?”
“예!”
“그렇습니다!”
청년들의 대답에 반호진은 물론이고 서조운과 사마의성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뜸 찾아와서 이런 말을 지껄이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마의성의 눈빛이 차가웠다.
반호진만 아니었다면 벌써 몇 번은 대성일갈했을 듯이 매서운 안광으로 청년들을 쏘아봤다.
부르르르!
동시에 곽춘은 몸을 떨었다.
다섯 명이 찾아온 게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였다.
좋은 일자리를 얻게 되어 자랑한 게 이런 사태를 초래한 것 같았기에 곽춘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필요 없다.”
“예?!”
“부, 분명 일손이 필요하단 말을 듣고 왔습니다만.”
다섯 명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런 식의 반응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다섯 명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너희들은 알고 있는 모양이야.”
“정말 열심히 할 자신이 있습니다!”
“한 번만 믿어 주십시오!”
“저 녀석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점점 더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에 청년들의 얼굴에 다급함이 서렸다.
쉽지 않을 거라 예상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여지조차 없을 줄은 몰랐기에 다섯 명 중 한 명이 손가락으로 곽춘을 가리켰다.
열세 살이지만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게 곽춘이었다.
그런 곽춘에 비해 자신들은 딱 봐도 탄탄한 체격을 갖추고 있었기에 이십 대 안팎으로 보이는 사내는 바로 그 점을 꼬집었다.
‘정 안 되면 나라도 들어가야 해! 나 혼자서라도! 아니면 저 녀석을 치워 버려서라도!’
다섯 명이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다.
가장 좋은 건 모두가 무상문에 고용되는 것이었지만 그게 힘들다면 자기 혼자라도 붙어야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자신만 붙는 게 가장 좋았다.
하인에 대한 처우가 그 어떤 곳보다 좋은 건 둘째 치고 청년들이 노리는 건 바로 반호진이었다.
정확하게는 소림검신이라 불리는 반호진과의 인연이었다.
시작은 하인일지 모르나 그 끝이 무상문도가 될지, 반호진의 제자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기에 다섯 명은 반호진의 휘하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필요 없다고.”
“예?”
“사람을 뽑을지 말지는 내가 결정한다. 네 녀석들이 아니라. 조운아. 쫓아내.”
“예.”
반호진은 무미건조한 한마디를 내뱉고는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반호진을 대신해 서조운이 앞으로 나섰다.
안 그래도 다섯 명의 행동이 거슬렸던 서조운은 살벌한 안광을 흩뿌리며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했다.
꿀꺽!
오금이 저리는 서조운의 눈빛에 다섯 명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쳐다보는 것뿐인데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건방진 것들. 정식으로 약속을 잡아도 모자랄 판에 다짜고짜 찾아와?”
“그게, 그러니까…….”
서조운이 나이는 그들보다 어렸으나 세상은 약육강식이었다.
나이보다 중요한 게 신분이었고, 힘이었다.
그걸 두 개 다 가진 이가 서조운이었기에 다섯 명은 감히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아니면 강제로 치워 줄까?”
“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손에서 불꽃을 일으키는 서조운의 모습에 다섯 명이 몸을 돌려 헐레벌떡 뛰어갔다.
한데 그러면서도 다섯 명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듯이 여지를 두었다.
“별 거지 같은 것들이.”
“벌써부터 날파리들이 모여드네.”
“그러니까. 문지기로 세워 둘 사람을 찾아봐야 하나.”
서조운과 사마의성이 미간을 좁혔다.
이대로 놔두면 개나 소나 찾아 올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저런 어중이떠중이들이 찾아왔다는 건 달리 말하면 반호진이 이곳에 정착한 사실이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는 걸 뜻했다.
“아무나 뽑아서는 안 돼.”
“그렇다고 우리가 돌아가면서 설 수도 없잖아? 다들 할 일이 있는데.”
“척이 형한테 도움을 좀 구해 볼까? 임시방편으로 모용세가의 무사들에게 부탁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