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5장. 달갑지 않은. -01
곽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 건너는 심정으로 말이다.
“말한다고 너한테 불이익은 없을 거야. 내 명예를 걸까?”
“아니에요. 제가 어찌!”
곽춘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그는 가슴이 벌렁거렸다.
부모 잘 만난 졸부같이 앉아 있지만 반호진은 무림을 호령하는 절대고수였다.
염왕과 도왕마저도 눈치를 보는 인물이 반호진이었기에 곽춘은 긴장을 절대 풀지 않았다.
“뭐, 내가 어려울 수밖에 없긴 하겠네. 아직은.”
“앞으로도 어려울 것 같아요.”
“고용주이긴 하니까. 어쨌든 말은 안 하겠다고?”
“개선할 점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고, 조금 아쉬운 게 있어요.”
“예를 들면?”
반호진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말했던 대로 그냥 편하게 말하라는 듯이 말이다.
절대 강요하거나 강압적인 어조로 묻지 않았다.
이런 대화는 편한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옆집 사는 형의 느낌으로 가볍게 물어봤다.
“노새나 당나귀가 있지만 소나 말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의외로 둘 다 쓸모가 많거든요. 빨리 이동할 때는 말이 아무래도 좋고, 이런저런 잡일을 할 때는 소가 좋거든요. 암소는 젖도 얻을 수 있고요. 그리고 공간이 넓은 만큼 닭을 키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지금은 시전에서 다 구입해 오는데 오고 가는 거리와 비나 눈, 혹은 태풍이 왔을 때를 대비하려면 직접 사육하는 게 좋아요.”
“호오.”
반호진이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대부분 사 먹거나 황매향이 만들어 주는 음식만 먹었기에 식재료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도, 관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점점 커질 무상문을 감안하면 곽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당장 빈객으로 머물고 있는 이들에게 들어가는 식재료도 상당했고.
“금전적인 부분만 따져 봐도 이득이니까요. 좀 더 규모를 키운다면 양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곳에는 강아지도 있으니까요. 전문적인 목양견은 아닐지라도 산짐승들을 쫓아내는 건 가능할 테니까요. 필요하다면 목양견을 알아볼 수도 있고요.”
“먹는 데 관심이 많구나?”
“살아가는 데 있어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으니까요. 헤헤.”
“중요하긴 하지. 닭이랑 양이라.”
반호진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공간이 없다면 모를까 땅은 넘치도록 있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큰 규모로 한다면 따질 게 많겠지만 소규모라면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었다.
“닭은 계란도 나오니까요. 신선도는 두말할 것도 없고 일단 비축이 되기도 할뿐더러 계란은 여러 가지로 활용도 가능합니다.”
“그렇지. 이건 진지하게 의논해 봐야겠네.”
“저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해. 아니거나 선을 넘는 거라면 내가 알아서 끊어 줄 테니까.”
누가 봐도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곽춘의 모습에 반호진이 판을 깔아 주었다.
그러면서 눈짓으로 찻잔을 가리켰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따라 준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서였다.
입술은 바짝 말라 있는데 말이다.
“혹시 일할 사람이 더 필요하시지는 않으세요?”
“왜? 추천할 만한 애들이 있어?”
과할 정도로 눈치를 보는 곽춘의 모습에 반호진이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굳이 면박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예유화의 부모님이 무상문에서 일하기로 했으나 일손이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
앞으로 가축까지 기를 걸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고.
“많지는 않은데, 있긴 있습니다.”
“전부가 다 너처럼 일을 잘할 것 같지는 않은데.”
“저만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문주님을 실망시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로 자부한단 말이지.”
“잘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모두 열심히 할 줄은 아는 아이들입니다.”
쓸데없이 기대치를 높일 수도 있지만 곽춘은 솔직하게 말했다.
어려서부터 보기도 했을뿐더러 같이 일하기도 했기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다들 근면성실하다고 말이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한 번 볼 가치는 충분히 있겠지. 시간 조율해서 말해. 내 시간이랑 맞춰서 한번 보자.”
“저, 정말요?”
“내가 실없는 소리를 할 정도로 한가해 보여?”
“네! 조율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좋아. 독대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고. 차는 다 마시고 나가. 마른침 좀 그만 삼키고. 나가서 매향이 들어오라고 하고.”
반호진의 지시에 곽춘이 허겁지겁 차를 마셨다.
식어 있어서 그런지 더욱 시원하게 느껴지는 차를 한 번에 다 마시고는 반호진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오냐.”
아침부터 기운 찬 곽춘의 인사에 반호진은 고개만 가볍게 끄떡거렸다.
잠시 후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황매향이 조신스러운 걸음걸이로 들어왔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응. 앉아. 얘기가 좀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
“네.”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는 황매향을 반호진은 지그시 바라봤다.
부총관이라는 직위가 생겨서 그런지 이제는 제법 관리자다운 분위기가 풍겼다.
“이제 제법 태가 나는데?”
“그, 그런가요?”
“응. 잘하고 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감사합니다.”
반호진이 따라 주는 차를 경건한 자세로 받으며 황매향이 옅게 웃었다.
칭찬에 인색한 건 아니지만 평소에 듣기 힘든 건 사실이었기에 황매향은 기뻤다.
“힘든 건 없고?”
“네. 다 좋아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만족하고 있어요. 오히려 너무 후하게 대우해 주시는 것 같다고 걱정하는걸요.”
“후하기는. 다 일한 만큼 가져가는 건데.”
“그래도 저희는 은혜를 갚으러 온 입장이니까요.”
“나를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이미 반 이상은 갚았어. 그러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걸로. 곽춘은 어때? 부총관이 주로 데리고 다니며 일을 알려 줬을 거 아냐.”
반호진이 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다를 수도 있었다.
그의 눈에 보일 때만 열심히 했을 수도 있기에 반호진은 황매향의 평가를 기대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야무져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일을 해서 그런지 할 줄 아는 것도 많고요. 깊이는 없지만 넓고 다양하게 많이 알더라고요.”
“나이를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한 거지. 오히려 그게 대단한 거야. 눈칫밥 먹으면서 어깨너머로 배웠다는 뜻이니까.”
“맞아요.”
황매향은 반호진의 말에 동의했다.
대견하기도 했지만 안쓰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의 수준까지 오르기 위해 어떤 고생을 했을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결론은 일을 잘한다는 거지?”
“네. 아직은 초반이라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요. 지금이 한창 의욕이 넘칠 때니까요. 눈치도 많이 볼 때고요.”
“그렇지. 어쨌든 지금까지는 괜찮다는 말이로구나.”
“네.”
“게을러지면 자르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반호진이 싱긋 웃었다.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으나 반호진은 결코 맺고 끊음에 무른 남자가 아니었다.
태도가 변한다면 언제라도 내칠 생각이었다.
꾸준히 일을 잘한다면 그만큼 챙겨 줄 생각이었고.
“제가 계속 잘 지켜볼게요.”
“그래. 부총관이 해 줄 건 그거면 돼. 늘 말하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고. 혹시 손님들 중에 핍박하는 이들이 있으면 바로 말하고. 난 내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무시받는 거 아주 안 좋아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
“네.”
“참, 곽춘이가 이런 점이 아쉽다고 말하던데 부총관의 생각도 궁금해.”
반호진은 조금 전 곽춘과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서 짧고 간략하게 요약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나쁘지 않았으나 현재 무상문의 안살림을 관리하고 있는 건 황매향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말씀은 안 드렸지만 매일 장을 볼 때마다 가져오는 짐이 적지 않았거든요. 짐마차가 있기는 한데, 실어 온 것들을 다시 나르는 건 저희들이 하니까요.”
“힘이 많이 필요하단 말이지.”
“지금은 괜찮은데 만약 손님이 더 늘어난다면 그만큼 필요한 식재료도 늘어날 테니까요.”
“만약 가축을 키운다면 관리는 할 수 있겠어?”
일을 줄이려다가 오히려 일을 더욱 키울 수도 있었다.
게다가 가축을 돌보는 일은 단순히 먹이만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의외로 손이 많이 갔기에 반호진은 그 부분에 대해서 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자신은 없어요. 집에서 몇 마리씩 키워 본 아이들은 있을 수 있는데 제대로 사육해 본 아이들은 없을 거예요. 배우면 되긴 하겠지만 시간이 좀 필요해요.”
“소규모로 점차 키워 나가는 방향도 있긴 한데, 어쨌든 업무 강도가 늘어나는 거겠지?”
“할 수는 있어요.”
황매향이 다부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든 닥치면 하게 되는 법이었다.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할 뿐이지 키울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부족한 전문지식은 배우면 되었다.
“아니야. 일이 많아지면 당연히 인력을 충원해야지. 사람의 몸은 한계가 분명히 있어. 괜히 무리해서 끙끙 앓아 봐. 그 빈자리를 누가 채울 거야? 가까스로 유지하는 건 좋지 않아. 한 명이 무너지면 연쇄적으로 쓰러지거든. 일단은 알았어.”
“사람을 더 뽑으시려고요?”
“생각 중이야. 지금 있는 손님들이 얼른 떠나면 좋겠는데, 그럴 것 같아 보이지는 않거든.”
반호진의 말에 황매향은 미약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쉽게 떠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떠나라고 눈치를 줘도 끝까지 버틸 게 분명했다.
“제가 보기에도 근시일 내에 떠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바쁘신 분들이 왜 여기에 눌러앉아 있는지. 모용 소저는 여전하고?”
“네.”
“불편하게 하지는 않고?”
“처음에는 조금 어려웠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많이 친해지기도 했고요. 근데 실력이 정말 빨리 늘더라고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황매향의 말을 들으며 반호진이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일 같이 음식을 하며 연구를 하는 게 놀라워서였다.
심지어 자신의 집도 아니고 남의 부엌이었다.
그런데도 식솔들과 딱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잘 어울리는 게 반호진은 신기했다.
“얼마 못 갈 줄 알았는데 말이지.”
“저도 솔직히 문주님과 같은 생각이었어요.”
“뭐, 자기가 하겠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는 없지. 모용 대협과 척이도 먹으니까. 많이 불편하지 않으면 일단 지금처럼 지내고,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바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황매향이 황송하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손을 휘휘 흔들었다.
보기에 과하다는 행동에 황매향은 싱긋 웃으며 집무실을 나섰다.
***
저벅저벅.
일단의 무리가 무상문의 정문으로 다가왔다.
소수로 이루어진 무리였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다.
한 명 한 명이 예리한 기도를 풍겼던 것이다.
“뭐야? 문지기도 없어?”
“이제 막 개파한 곳이지 않습니까. 개방과 하오문, 금가장이 정보를 은근슬쩍 차단하기도 했고요. 아마 이곳의 위치를 아는 곳은 얼마 없을 겁니다.”
“그래도 문지기가 없는 건 좀.”
고급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녹의무복을 입은 당우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리 문도가 없다고 하나 그래도 반호진의 이름값이 있는데 너무 관리에 소홀한 것 같아서였다.
특히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남궁세가와 하북팽가가 있음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저는 반 공자님다운데요? 아, 이제는 무상문주님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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