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4장. 복(福)은 돌아온다. -04
서조운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표정도 살짝 변했다.
지금 예유화의 마음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이 가서였다.
막말로 평범한 사람도 뒷간에 들어가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달랐다.
그러니 예유화가 이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조금 실망한 건 사실이지만.
“아니요.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하늘에 맹세코 조금의 불만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오히려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저뿐만 아니라 부모님께서도요. 정말 큰 은혜를 입었고, 배은망덕한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아요. 제가 오라버니를 찾아온 건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게 가능한지 아닌지를 여쭈어보고 싶어서요.”
“부탁이라. 너도 알겠지만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서. 나도 이곳에서 얹혀사는 중이거든.”
예상했던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서조운은 표정을 풀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농담도 했다.
분위기가 너무 딱딱해진 것 같아서였다.
“그럼 들어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그래. 뭔데 이렇게 분위기를 잡아?”
“저희 부모님도 같이 일을 해도 괜찮을까요? 임금은 안 주셔도 돼요. 두 분 다 은혜를 갚고 싶다고 하셔서요.”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야?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신다고?”
“예. 어차피 작게 소작을 해서 말만 고향일 뿐 떠나도 하등 문제가 없다고 하셨어요. 큰 은혜를 입었는데 저에게만 의무를 떠넘기고 떠나는 것도 너무 미안하다고 하시고요.”
예유화가 서조운의 눈치를 살피며 조곤조곤 말했다.
눈치는 보지만 할 말은 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조운은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머리가 복잡해져서였다.
“그러니까 정리를 해 보자면, 이곳에서 머무르고 싶으시다는 거잖아?”
“정확히 말씀드리면 장원 근처에 집을 지어서 머무시겠다고 하셨어요. 엄밀히 말해서 부모님이 가솔은 아니니까요. 저야 당연히 이곳에서 머물러야 하지만요.”
“고향에 다른 가족은 없고? 친척이나.”
“없어요. 다들 돌아가시거나 다른 마을로 떠나서 저희 가족뿐이에요. 형제도 없고요. 자식은 저 하나라 어떻게든 살리겠다고 먼 길을 오신 거거든요.”
“그건 나도 들어서 알지.”
서조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부분은 그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정리하러 가긴 가야 하는데 재산도 별로 없고 말 그대로 집터만 정리하면 돼서 아빠만 다녀오시면 된대요. 물론 오라버니와 문주님께서 허락을 해 주셔야겠지만요.”
“그렇지. 난 결정권이 없어. 사실 이렇게 일을 벌이는 것도 좀 민폐긴 한데.”
서조운은 턱을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장원에 일손이 부족하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황매향에 이어 구명지은을 갚겠다고 여인들이 한 번 더 찾아오기는 했으나 일이라는 게 남자들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 곽춘을 받아들인 것이기에 예유화의 부모님이 일을 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오라버니께서 한번 여쭐 수 있을까요? 제가 직접 찾아가는 건 무례일 것 같아서요.”
“무례일 것까지야. 조금 당황하시기는 하겠지. 너 치료할 때 딱 한 번 본 게 다니까. 나는 너희 부모님께서 진심으로 원하신다면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형님 생각은 또 다를 수도 있으니까. 내가 한번 물어보고 알려 줄게.”
“감사해요, 오라버니.”
“감사는. 근데 오라버니는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다. 너무 오글거린다고나 할까. 그냥 오빠라고 해.”
서조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남들은 오빠보다 오라버니라는 호칭이 더 좋다고도 하는데 그는 아니었다.
온몸이 오글거리고 간질거렸다.
“알겠어요.”
“먹는 것도 팍팍 먹고. 배가 불러도 지금은 먹어야 해. 아직 정상 체중이 되려면 한참 멀었어. 앞으로 부모님께 건강한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도 효도야. 알겠지?”
“네. 명심할게요.”
“내공심법은 매일 수련하고 있지?”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잘 모르겠어요.”
시종일관 차분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던 예유화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열심히 노력은 하고 있지만 잘하고 있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예유화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잘하고 있는 거 같은데? 일단 공력은 꾸준히 늘고 있으니까. 치료가 되었다고 해서 지금 완치가 된 건 아냐. 완치에 가까운 상태일 뿐이지. 대혈에서 흘러나오는 극음지기를 방치하면 다시 과거처럼 돌아갈 수도 있어. 그러니까 진짜 열심히 해야 해. 치료받았다고 해서 끝이 아니야. 죽을 때까지 관리해야 해.”
“명심할게요.”
서조운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예유화 본인이 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서조운과 반호진 덕분에 잠잠해진 상태라고 말이다.
몸의 건강을 위해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극음지기를 제압하고 통제해야만 했다.
“너도 나중에는 시집가야지. 자식도 낳고. 그래야 부모님께서 좋아하시지 않으시겠어?”
“맞아요. 근데 아직은 생각 없어요.”
“뭐, 넌 아직 어리니까. 젊음이 좋지. 암! 나보다 빨리 치료가 되기도 했고. 그러니 천천히 생각해 봐. 부모님에게 효도도 하면서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네.”
예유화가 살포시 웃었다.
묘한 눈으로 서조운을 응시하면서.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그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
“들어와.”
“헙!”
문을 두드리기 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던 곽춘이 기겁했다.
구부린 손가락이 문에 닿기도 전에 방 안에서 반호진의 목소리가 들려와서였다.
그래서 곽춘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안 들어올 거야?”
“지금 들어갑니다!”
달칵!
독촉하듯이 말하는 반호진의 목소리에 곽춘이 황급히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한가롭게 차를 들이켜는 반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위엄이 넘치는 모습에 곽춘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앉아.”
“어, 저는 서 있겠습니다!”
“왜? 내가 불편해?”
“그런 게 아니라…….”
곽춘이 우물쭈물거렸다.
일개 하인인 자신이 반호진과 독대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마주 앉아도 되나 싶어서였다.
평생 동안 눈칫밥을 먹고 살았기에 또래에 비해 눈치가 빠른 편이지만 지금은 좀처럼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부총관도 내 지시를 어기지 않는데.”
“죄송합니다! 바로 앉겠습니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어지는 반호진의 한마디에 곽춘은 득달같이 의자를 빼서 앉았다.
하나 편한 자세는 아니었다.
누가 봐도 기합이 바짝 들어간, 각 잡힌 자세로 앉았다.
“어차피 앉을 거면서. 그리고 편하게 앉아. 안 잡아먹는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보는 내가 불편해.”
“아, 그럼 시정하겠습니다!”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과해서였다.
동시에 아주 조금이지만 귀엽기도 했다.
“시정까지 갈 일은 아니고. 그냥 편하게 있어, 편하게. 간단하게 물어볼 게 있어서 보자고 한 거니까. 너 괴롭히려고 부른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너를 보면 내가 아주 쥐 잡듯이 잡는 줄 알겠다.”
“죄송합니다!”
“어후.”
반호진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곽춘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야 반호진에 대해 잘 몰랐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림 최강의 후기지수이자 천하십대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걸 넘어 천하제일인에 가장 가까운 무인이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반호진이었다.
그렇다 보니 아무리 편하게 있으라고 해도 심적으로 편할 수가 없었다.
꿀꺽!
‘무인이 경지에 이르면 반박귀진이 된다고 하더니 그게 진짜일 줄이야.’
처음에는 그냥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부잣집 공자님이라고 생각했다.
돈이 많아서 경험 삼아 독립한 공자님 말이다.
그러나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잘난 집안을 뒷배로 둔 철없는 공자님이 아니라 강호를 호령하는 절대고수가 눈앞에 있는 반호진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나에 대해서 좀 들었나 보네?”
“부총관이 알려 주었습니다.”
“매향이가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닌데.”
“저잣거리에서도 좀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게 안 들릴 정도로 형편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문주님의 은혜로 많이 좋아졌습니다.”
곽춘이 앉은 상태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만약 반호진이 거둬 두지 않았다면 몇 푼 안 되는 돈에 노예처럼 일했을 것이기에 곽춘은 반호진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동시에 부끄럽기도 했다.
진짜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무작정 찾아왔는데 아무런 편견 없이 반호진이 거두어 주어서였다.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알기에 곽춘은 다짐했다.
이곳에서 뼈를 묻겠다고 말이다.
“그건 참 다행이군. 오늘로 일한 지 나흘째인가?”
“넵!”
“일은 어때? 힘들지는 않고? 솔직히 말해. 이제는 내 성격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파악했을 거 아냐?”
“솔직히 말씀드리면 일은 많습니다. 그런데 충분히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아니, 이 정도 임금을 주시는데 이만큼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한 번 여쭙고 싶기도 하고요.”
곽춘이 빠르게 반호진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라도 반호진의 심기에 거슬리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한데 그의 걱정과 달리 반호진의 표정은 평온했다.
“왜? 너무 많이 주는 것 같아서?”
“예. 엄청 많은 수준은 아니지만 남창에서 평균적으로 받는 임금에 비하면 확실히 많은 정도거든요.”
“돈 몇 푼 아끼려고 하인들을 갈아 넣고 싶지는 않거든. 그리고 난 적어도 일한 만큼의 대가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쥐어짜야 해?”
“우와.”
곽춘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돈 많은 졸부가 부리는 허세와는 차원이 달라서였다.
명예와 돈, 거기에 젊음까지 가지고 있는 반호진이 하는 말이라서 그런지 곽춘의 눈에는 더없이 멋있어 보였다.
“물론 날 실망시키면 가차 없이 자를 거야.”
“헉!”
“그렇다고 무리하지는 말고. 임금만큼만 해. 딱 그만큼만. 임금보다 더 하려고 하지도 말고. 더 부려 먹을 게 있으면 그만큼의 추가수당을 지급할 테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건강히 오래오래 해.”
언뜻 들으면 전형적인 악덕업주의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기에 곽춘은 헤벌쭉 웃었다.
임금 가지고 장난질 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반호진은 돈도 후하게 주었다.
거기다 식사도 늘 따뜻하고 양도 원 없이 먹을 수 있었기에 곽춘은 무상문이 너무나 좋았다.
“예! 몸 관리에서 신경 쓰겠습니다!”
“아픈 건 어쩔 수 없고. 몸 상태가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 널 부른 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야.”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너무 긴장할 건 없고. 나흘 정도 일해 봤으니 슬슬 보였을 것 같아서. 개선해야 할 것들이라든가, 부족한 것들이라든가.”
“어…….”
시원스럽게 대답하던 곽춘이 처음으로 말끝을 흐렸다.
좋게 말해 개선점이지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지적질이 될 수도 있었기에 곽춘은 말을 아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 있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아서였다.
“눈치 볼 거 없어.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거니까. 네가 말한다고 해서 내가 곧바로 개선할 것도 아니고. 너보다는 부총관의 말이 더 신뢰가 가지 않겠어? 넌 그냥 참고용이야.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말해.”
“정말 말해도 될까요?”
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