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3장. 운명은 만드는 것. -02
서조운이 답답한 기색을 겨우겨우 숨기며 말을 이었다.
구양절맥을 앓아 봤기에 적어도 절맥에 한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바로 그였다.
“다시 한번 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희 마을 의원의 말로는 분명 삼양절맥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봐도 절맥이 아닙니다. 만약 삼양절맥이라면 고통도 고통이지만 체내에 순양지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의 몸에는 한 톨의 순양지기도 없습니다.”
“으음!”
단호한 서조운의 말에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두 눈에 서린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가 삼양절맥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진단한 의원을 찾아가세요. 저는 의술을 따로 배운 이가 아니니 진짜 의원에게 치료를 받는 게 맞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절맥이라는 게 아무나 치료할 수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서 대협께서는 구양절맥을 치료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아드님은 절맥이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왜 자꾸 저보고 치료해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서조운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째 대화가 평행선을 그리는 듯했다.
분명 그는 좋게 잘 설명하고 있었으나 아이의 아빠는 좀처럼 말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혹시 제자로 받아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지금은 몸이 약하지만 서 대협께서 잘 가르쳐 주시면 분명 크게 될 겁니다. 제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재능이 정말 충만합니다! 아직은 어려서 몸이 제대로 자라지 못했지만 서 대협의 가르침을 받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할 겁니다!”
남자가 결국 속내를 드러냈다.
애초부터 목적이 이것이었다는 듯이 긴 문장을 남자는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죄송하지만 저는 아직 제자를 받을 수준이 아닙니다. 그럴 나이도 아니고요.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죠.”
“제발 부탁드립니다! 서 대협!”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는데, 저는 대협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정도의 무인이 아닙니다. 진짜 대협이라 불리시는 분들이 욕해요. 그러니 이만 나가 주시죠.”
“한 번만,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시면……!”
“그렇다 한들 결정을 번복할 일은 없습니다.”
남자가 간절하게 매달릴수록 서조운은 더더욱 냉담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곤혹스러웠지만 지금은 달랐다.
몇 번 겪어 보았기에 당황하지 않고 냉정하게 할 말을 다 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서 공자님!”
“저야말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강제로 내보내지 않게 해 주세요.”
바닥에 엎드린 남자를 향해 서조운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부탁하고 있지만 서조운은 알고 있었다.
결국에는 강압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서조운은 깊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워,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바라는 건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이만 나가 주시죠.”
“서 공자님!”
눈곱만큼의 여지도 두지 않겠다는 듯이 서조운은 부자를 밖으로 내보냈다.
물론 순순히 나가려고 하지 않았기에 서조운으로서는 온갖 고생을 다해야 했다.
“하아.”
그래서인지 서조운은 진이 빠진 얼굴로 의자에 널브러졌다.
바닥에 누울 힘도 없었기에 의자에 몸을 맡긴 채로 눈을 감았다.
똑똑똑.
“누구세요?”
“나야.”
“아, 들어와.”
“완전 뻗었네?”
“너도 들었을 거 아냐.”
기진맥진한 얼굴로 서조운이 대답했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 상태로 말이다.
그런 친구의 모습에 사마의성이 아주 조금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들었지. 매번 같아서 놀랍기도 하고. 근데 달리 말하면 네가 그만큼 유명해졌다는 뜻이잖아. 어찌 보면 절맥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는 네가 마지막 희망이나 마찬가지지.”
“그렇긴 하지. 역사적으로도 구양절맥이 치료된 경우는 드무니까. 더구나 나는 나이도 적지 않았었고.”
“불치병이나 마찬가지인 게 절맥이니까. 치료가 되기보다는 대부분 죽으니까 부모로서 그만큼 간절한 건 이해가 되는데 문제는 절맥이 아닌데 억지를 부리는 경우지.”
“맞아.”
서조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짜 방금 전과 같은 일을 겪으면 수명이 몇 년씩 깎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몸도 정신도 그냥 진이 빠졌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았다.
“그래도 기쁘지 않아? 중원에서 유일하게 구양절맥을 이겨 낸 사람이 너잖아.”
“기분 좋긴 하지. 유명해진 건 맞으니까. 근데 이게 뭐 내가 잘나서 된 건가. 다 형님 덕분이지. 만약 형님이 날 찾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거의 죽어 가고 있거나, 죽었겠지.”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잖아. 그만 생각해. 그거 떠올려서 뭐가 좋다고. 네 정신건강에 하등 도움이 안 돼.”
“그렇긴 하지.”
“내가 도와줄까? 간단한 진법 하나 설치하면 좀 나을 텐데. 육체적으로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정신적으로만 좀 지치게 만드는. 정신을 아주 쏙 빼놓는 미혼진을 설치하면 쫓아내기가 훨씬 수월할 거야. 공간도 많이 안 차지하고.”
서조운이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슬슬 한계에 도달하던 차였다.
익숙해졌다고 해서 안 힘든 게 아니기에 서조운은 고민했다.
“그래도 될까?”
“안 될 건 없잖아? 상처 입히는 것도 아닌데. 처음에야 정신줄을 놓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져. 그렇다고 후유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잠깐 진 좀 빼놓는 건데. 언제까지 이렇게 일일이 할 거야? 너 이러다가는 얼마 안 가서 퍼진다. 네가 형님께 도움받은 것처럼 다른 이들을 도와주려는 마음은 이해해. 근데 모두를 배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흔한 말 있잖아. 선택과 집중.”
“으음!”
사마의성의 말에도 서조운은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힘든 건 사실이지만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여기는 서가장이 아니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소란은 나뿐만 아니라 형님께도 들려. 만약 형님께서 명상을 하다가 깨달음이 찾아왔는데 그거 놓치면 어떡할 거야?”
“바로 설치해야겠다.”
서조운은 고민을 끝냈다.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고민이 무의미해졌다.
그에게 있어 그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은 당연히 반호진이었다.
정이 들 대로 든 형들과 사마의성도 반호성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거봐. 쓸데없는 고민이었지?”
“응. 무뢰한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는데 말이지.”
똑똑.
“서 공자님. 매향입니다.”
“들어오세요.”
사마의성이 미리 챙겨 온 물건들을 이리저리 풀어 놓는 사이 문이 열리며 황매향이 안으로 들어왔다.
늘 그렇듯이 차분한 분위기의 황매향은 서조운의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섰다.
“편하게 대해 주세요, 서 공자님.”
“에이. 그럴 수는 없죠. 저도 엄밀히 말하면 손님이니까요. 형님께서 아직 가신으로 받아들여 주시지 않아서. 한마디로 빈객이나 마찬가지죠.”
황매향이 벌써 몇 번이고 같은 말을 꺼냈지만 서조운은 거절했다.
나이도 그보다 많을뿐더러 황매향은 무상문 소속이어서였다.
반호진과 가까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상문 소속은 아니기에 서조운은 이 점을 다시 한번 짚었다.
“손님이라기보다는 의동생이시지 않나요. 그리고 손님이시라면 더더욱 편하게 지내셔야지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곰곰이 생각하던 서조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듣고 보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어서였다.
“그래도 각자의 입장이 있으니 이렇게 서로 존중하면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사마의성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적절한 타협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건 좀…….”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어떤 쪽으로는 결과가 나올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서조운이라면 모를까 말로는 사마의성에게 반론을 꺼내기가 힘들었기에 황매향은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애초에 그녀가 강요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고.
그렇기에 황매향은 이쯤에서 이 사안을 마무리 짓고 본론을 꺼냈다.
“서 공자님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오늘은 바로 이어지네요.”
“어떻게 할까요?”
보통은 뜨문뜨문 찾아오는데 오늘따라 곧바로 방문객이 있다고 하자 서조운이 살짝 놀라기는 했으나 그 기색은 창졸간에 사라졌다.
대부분은 좀 전과 같은 경우이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였다.
자식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만 리 길을 걸어오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기에 서조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나가 볼게요.”
“같이 나가자. 아참, 아예 정문에서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굳이 아닌 사람과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잖아?”
“흐음. 그래도 먼 길을 찾아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시달리고 힘들어할 거면 네 뜻대로 하고.”
서조운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에 비해 제법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아직 그는 어렸다.
심지어 반호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상에서 보냈기에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는 어수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고민해 볼게.”
“가자. 나도 궁금하기도 하고.”
“네가 왜?”
“너와 달리 가주가 될 이 몸은 안목도 높여야 하거든. 특히나 사람을 잘 봐야 해서. 이건 지름길이 없어. 그냥 많이 보고, 겪어 봐야 해.”
거들먹거리는 사마의성의 모습에 서조운이 코웃음을 쳤다.
이유는 납득이 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상황이 썩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나도 나중에 가문을 세울 건데.”
“너보다는 내가 빠르지 않겠어?”
“그건 모르지.”
“아마도 내가 더 빠를 거야.”
“그만큼 형님을 빨리 배신하겠다는 뜻이렷다?”
사마의성이 움찔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한 방을 맞아서였다.
그런 사마의성의 모습에 서조운은 킬킬 웃으며 정문으로 향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대인.”
사마의성과 아옹다옹하며 정문으로 걸어가던 서조운의 눈에 일가족이 들어왔다.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주름살을 가진 부부와 여자아이였는데 몸이 상당히 안 좋은 모양인지 부친이 메고 있는 지게에 앉혀져 있었다.
그런데 서조운의 시선이 비쩍 마른 여자아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보는 순간 그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절맥이군요.”
“마, 맞습니다. 대인께서 절맥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한눈에 딸의 병을 알아본 서조운의 모습에 아빠로 보이는 중년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머나먼 길을 걸어온 보람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살 수 있다는 희망과 동시에 치료비가 걱정이 되어서였다.
꾸욱!
그 마음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옆에 있던 아내가 그의 손을 말없이 붙잡았다.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현재만 생각하자는 듯한 말이 손을 통해 전달되어지는 느낌에 중년인은 마음을 다잡았다.
“오음절맥 아니면 칠음절맥이겠군요.”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을에 있던 의원도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고 해서요.”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올해 열여섯 살입니다.”
“으음!”
옆에 있던 사마의성이 침음성을 흘렸다.
겉보기에는 열두어 살 정도로 보이는데 열여섯이라고 하자 충격을 받았다.
“많이 힘드셨겠군요.”
주르륵.
별거 아닌 말인데도 중년여인이 눈물을 흘렸다.
서조운의 한마디를 듣는 순간 그동안의 고난이 떠올라서였다.
그런데도 중년여인은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
혹시라도 딸이 들을까 봐서였다.
“대, 대인. 제 딸은 치료가 가능할까요?”
“저는 대인이 아닙니다. 그런 호칭을 들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요. 치료는, 우선 살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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