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3장. 운명은 만드는 것. -01
“…….”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는 선우방의 모습에 팽수영의 양 볼이 붉어졌다.
이렇게 말해 주길 바랐으면서도 이상하게 눈을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선우방도 옅게 웃었다.
‘좋은 사람이야.’
사실 지금도 심심찮게 그를 향해 혼담이 들어오고 있었다.
많은 곳에서 구애의 손길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중에는 하북팽가보다 더 좋은 곳도 있었지만 선우방의 마음은 어느 정도 굳어진 상태였다.
부친과도 의견이 일치했고.
‘너무 차이가 나도 좋지 않아.’
단순히 강호에서의 위상만 따지자면 더 좋은 혼처가 분명 있었다.
그러나 선우방이 생각하기에 결코 최선은 아니었다.
또한 선우세가와 너무 차이가 나면 그가 주도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처가에 휘둘릴 수도 있었기에 오히려 하북팽가가 딱 적정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재의 위상만 따지면 선우세가보다 하북팽가가 당연히 위에 있으나 미래를 생각하면 선우세가도 결코 꿀리지 않았다.
‘내가 있으니까.’
선우방의 눈빛에 자신감이 서렸다.
예전이었다면 팽수영도 감히 쳐다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주변에서도 언감생심이라고 손가락질했을 테고.
하지만 지금은 반대가 되었다.
“저, 저거 먹어 볼까요? 냄새가 향긋해요.”
“꼬치구이 좋죠. 보니까 종류가 꽤 다양한 것 같네요.”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얼굴에 팽수영이 결국 화제를 돌렸다.
겸사겸사 몸도 비틀면서 말이다.
저잣거리에 음식이 빠질 수 없기에 팽수영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선우 공자님은 어떤 꼬치구이가 가장 좋으세요?”
“전 다 잘 먹습니다. 멧돼지 고기만 빼고요. 저는 멧돼지 특유의 비린내가 좀 그렇더라고요.”
“쓸데없이 양만 많기는 하죠.”
팽수영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고기는 다 좋아하는 그녀이지만 멧돼지처럼 비린내가 심하게 나는 건 싫어했다.
“하하하. 그렇긴 하죠. 그럼 멧돼지 고기는 빼고 종류별로 하나씩 먹어 볼까요?”
“네.”
팽수영이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두 개씩 사면 양이 상당하지만 그녀도 하북팽가 출신이었다.
태생적으로 거골(巨骨)을 타고났기에 이 정도 양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많이 먹는 모습은 별로지만 잘 먹는 모습은 남자에게 호감이었기에 팽수영은 최대한 예쁘게 꼬치구이를 먹었다.
***
왕! 왕! 왕왕!
“녀석들.”
이제는 제법 목줄이 익숙해졌는지 자연스럽게 거리 조절을 하며 앞장서서 걸어가는 삼형제를 보며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산책을 해도 될 정도로 넓은 곳에서 생활하고 있음에도 외출은 외출인 것인지 셋 다 꼬리가 쉴 새 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시간이 빠르긴 빠르네요. 주먹만 했던 꼬맹이들이 이제는 제법 성견다운 태가 나니.”
“그래도 아직 멀었지. 강아지야, 강아지.”
“죽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었는데.”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서조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반호진이 미리 정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을 때가 떠올라서였다.
“다행이지. 모두 건강히 잘 자라 줘서.”
왕!
반호진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인지 첫째인 일동이가 동생들을 데리고 늠름하게 걸어가다가 몸을 돌려 다가왔다.
목줄은 자신이 잡고 있었음에도 반호진에게 달려가서 몸을 비비는 모습에 서조운이 짐짓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네, 일동이. 간식은 내가 제일 많이 줬는데. 밥도 형님 다음으로 내가 가장 많이 챙겨 줬는데.”
“각인 효과가 있는 모양이지.”
“그건 이길 수가 없죠.”
서운하긴 하지만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서조운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제외하면 널 가장 잘 따르잖아? 너니까 그나마 얌전한 거야. 방이나 척이가 잡으면 난리도 아냐. 그냥 제멋대로야.”
“아직 애기니까 그게 정상이기는 하죠.”
“네 말은 나 다음으로 잘 따르잖아.”
“흐흐흐!”
언제 서운했었냐는 듯이 서조운이 헤벌쭉 웃었다.
그러나 반호진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이동이와 삼동이도 다 그가 아닌 반호진에게 다가가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왕! 왕!
“호호호.”
마치 어미 몸에게 자신을 비비는 것 같은 삼형제의 모습에 뒤따르던 황매향과 여인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원래도 편했던 무상문이지만 세 마리의 강아지 덕분에 요즘은 더더욱 행복했다.
아기들이라서 귀엽기도 하지만 같이 산다는 걸 아는 모양인지 애교도 엄청 많았다.
“이 녀석들을 키우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모두 좋아하더라고요.”
“손이 많이 가지만 말이지.”
“좀 더 자라면 형님한테 덜 매달리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반호진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런데 무덤덤한 말과 달리 삼형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반호진의 손길은 따스했다.
헥헥헥헥!
그걸 삼형제도 아는지 아예 길 한복판에서 배를 까고 누웠다.
머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아구, 요 깜찍한 것들!”
아예 뒤집고 누웠기에 온 털에 흙과 모래가 달라붙었다.
그런데도 삼형제는 그저 좋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이제 그만 가자.”
격렬한 요구에 삼형제의 배를 한 차례씩 만져 준 반호진이 직접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아직 어린데도 용케 반호진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다시 늠름한 자태로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애들 진짜 똑똑한 것 같지 않아요?”
“떼도 안 쓰고. 행동이 좀 과하기는 해도 말썽은 크게 안 부리잖아요.”
“천만다행이지.”
“진짜 천재 아닐까요? 똥과 오줌도 정해진 장소에만 싸더라고요. 사람이 뒷간을 이용하는 것처럼요.”
“그건 너무 멀리 갔고.”
팔불출이라는 게 이런 것이다라는 것처럼 서조운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 냈다.
반호진은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알고 봤더니 영물인 거 아니에요?”
“그럼 내가 모를 리 없지. 그냥 이 아이들이 조금 더 똑똑한 거야. 사람이면 일단 다 좋아하잖아.”
“에이. 그건 애기라서 그렇죠.”
“그러니까 다 클 때까지는 지켜보자고. 그보다 매향아.”
반호진의 부름에 조용히 뒤따르고 있던 황매향이 퍼뜩 놀랐다.
너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서였다.
한데 놀란 건 황매향만이 아니었다.
같이 생필품과 식재료를 사러 나온 여인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문주님.”
“내가 불편해?”
바짝 긴장한 황매향을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리며 물었다.
이제는 제법 편해졌을 때도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였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럽게 저를 부르셔서요.”
“싫은 건 아니지?”
“네. 문주님이 싫었으면 저도 그렇고 아이들도 무상문을 찾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흐음. 그래?”
“정말이에요.”
살짝 미심쩍어 하는 듯한 반호진을 향해 황매향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자신의 진심을 가득 담아서 말이다.
그리고 그건 함께 걷던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무상문주님!”
“안녕하세요!”
“문주님! 감사합니다!”
“무상문주님 덕분에 너무 살기 편해졌어요!”
반호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주변 상인들이 그를 향해 말을 걸어서였다.
막 저잣거리의 입구에 들어섰을 때는 긴가민가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들이 상인 한 명이 반호진을 알아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확신을 가지지 못하다가 어느 한 명이 반호진을 알아보자 뒤따라서 말을 쏟아 낸 것이었다.
“아, 네.”
“정말 감사합니다! 만날 깨부수고 폭력을 휘두르던 놈들이 무상문주님께서 남창에 자리를 잡자마자 싹 다 꼬리를 말았어요!”
“요즘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남창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주님!”
“이거!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오늘 아침에 밭에서 딴 거예요.”
시전 상인들은 단순히 고마움만 표하지 않았다.
초면인데도 살갑게 다가와서 반호진에게 자신들이 파는 물품들을 쥐여 주었다.
과일, 채소, 고기, 생선 등등 거의 물건들이 반호진과 황매향, 그리고 따라 온 여인들의 품을 가득 채웠다.
“……안 주셔도 되는데요.”
“고마워서 그래요, 고마워서.”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가 웃으며 건네는 계란을 반호진은 받을 수밖에 없었다.
거절하면 도리어 상처를 주게 될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고마워서 주는 것들이었기에 초반에는 몇 번 거절하다가 이내 다 받았다.
“지게를 가져올 걸 그랬어요.”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나.”
개 줄을 팔에 묶고서 양손 가득 짐을 든 채로 서조운이 울상을 지었다.
무게는 조금도 무겁지 않았지만 부피가 상당하다 보니 들기가 불편했기에 서조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기에는 아까운데. 시간만 있으면 지게는 금방 만들잖아요.”
“빌려 보자. 말하면 빌려줄 것도 같은데.”
저잣거리의 절반도 가지 못한 상태로 반호진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빌리는 건 문제가 안 될 것 같지만 그래도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여유롭게 있거나 당장은 사용하지 않을 것 같은 지게나 작은 마차들을 반호진은 빠르게 찾았다.
무인인 그나 서조운은 크게 문제가 없었으나 황매향과 아이들에게는 무거울 것이기에 반드시 싣고 갈 무언가가 필요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흔쾌히 짐마차를 빌려주는 상인에게 감사를 표하며 반호진은 생각에 잠겼다.
시전 상인들이 이렇게 호의적인 데에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였다.
반호진은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의심이 가는 곳이 있기는 한데.’
저잣거리를 어지럽히고 사고치는 이들은 대개 흑도의 무리들이었다.
그런 흑도 무리들을 쥐 잡을 듯이 잡을 수 있는 곳을 반호진은 알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곳의 거물이 무상문에 머무는 중이기도 했고.
“어휴. 이 녀석들이 언제 다 커서 짐마차를 끌려나.”
반호진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서조운은 짐마차를 끄는 노새와 강아지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렇게 나란히 두고 보니 새삼 삼형제가 작다는 게 느껴져서였다.
“다 자라도 짐마차는 무리지. 황소만큼 자란다면 모르겠지만 부모를 보면 그 정도는 아니야.”
“꽤 크게 자랄 줄 알았는데…….”
서조운이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삼형제가 짐마차를 끄는 걸 보고 싶었기에 아쉬움은 배가되었다.
“애초에 바란 게 그게 아니었잖아. 집 잘 지켜 주고, 건강하게 쑥쑥 잘 자라면 되지. 안 그래?”
왕! 왕! 왕!
자신들에게 묻는 걸 아는 모양인지 삼형제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반호진이 흐뭇하게 웃었다.
“아, 매향이랑 너희들도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허심탄회하게 말해. 괜히 눈치 보지 말고. 집무실에 있을 때는 언제라도 방문해도 괜찮으니까. 연공실에 있을 때는 말고.”
“알겠습니다.”
“네!”
어려워하긴 해도 불편해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반호진도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앞으로는 하인이 무조건 필요하다고 말이다.
언제까지 서조운이나 선우방, 모용척, 사마의성이 도와줄 수는 없었다.
‘모두 중요한 시기이니까.’
지금의 수련이 향후 십 년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만큼 반호진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
“죄송하지만 절맥은 아닙니다.”
“그, 그렇습니까?”
광동성 땅끝마을에서 남창까지 아들을 데리고 온 남자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양절맥까지는 아니더라도 삼양절맥은 될 줄 알았는데 서조운이 아예 절맥이 아니라고 하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예. 그냥 고열일 뿐입니다.”
“우리 아들이 되게 고통스러워했습니다만…….”
“몸이 태생적으로 약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절맥은 단순히 몸에서 열이 나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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