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장. 누구 마음대로. -04
“중요한 거?”
난희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똑똑한 그녀지만 지금의 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현실적인 부분들 말이야. 너와 나는 너무 다른 곳에서 살아왔어.”
“으음!”
이어지는 말에 난희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반호진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단박에 이해한 것이었다.
신분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반호진은 말 그대로 현실적인 문제를 거론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한 적 없지?”
“……응.”
“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원래 인생이라는 게 이런저런 실수도 하고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성숙해지는 거지.”
“이럴 때 오빠가 또래로 전혀 안 느껴진다는 거 알아?”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지. 세상 천지에 철딱서니 없는 것들만 있으면 어떡해?”
실없는 소리에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릿속을 채운 생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욱 무거워졌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굳이 오빠가 그럴 필요는 없지.”
“이 말을 해 주고 싶어서 따로 보자고 한 거야.”
“알고는 있는데 막상 들으니까 가슴이 답답하네.”
“혼인이 괜히 인륜지대사인 게 아니지.”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두 개의 가문이 만나는 게 결혼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혼인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마음만으로는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일단 거절은 아니라서.”
“거절해 줄까?”
“에이. 왜 이러실까. 기회는 모두에게 줘야지. 그래서 말인데 오빠는 솔직히 누가 가장 마음에 들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백봉이 가장 앞서 있는 거 같은데. 명문세가의 금지옥엽이 요리를 배우는 게 드문 일인 건 알지?”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지금은 딱히 생각이 없어. 내가 장남도 아니고. 당장 혼인을 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궁핍한 것도 아니니까.”
반호진은 담담히 대답했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반호진은 당장 할 생각이 없었다.
“마음은 없어도 솔직히 눈이 가는 사람은 있을 거 아냐? 아니면 이상형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라든가.”
“흐음. 이상형이 딱히 없어서. 사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는 다 비슷비슷해. 취향이 확실한 사람이 오히려 드물지.”
“그냥 예쁘기만 하면 되는구만?”
“정확해.”
“참나.”
난희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속내는 달랐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기에 난희주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오면서 미녀 싫다는 남자를 본 적이 없어.”
“예쁜 여자 싫어하는 남자는 없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맞아.”
“근데 나나 백봉이 성에 안 차는 거면 대체 어느 정도의 미인을 원하는 거야? 진짜 경국지색은 되어야 하는 건가?”
“자연스럽게 본인을 삼봉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네?”
반호진이 입꼬리를 대놓고 올리며 물었다.
하지만 난희주는 당당했다.
객관적으로 따져 봐도 자신이 절대 밀린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미의 기준이 개개인마다 다르다지만 그래도 통상적인 기준이라는 게 있었다.
“나 정도면 삼봉에 비벼 볼 만하지. 아니라고 생각해?”
“본인이 그렇다는데 내 의견이 중요하나?”
“어머? 내가 부족해? 어디가?”
“난 부족하다는 말은 안 했는데.”
능구렁이처럼 쏙 빠져나가는 반호진의 발언에 난희주가 눈을 흘겼다.
하지만 고작 째려보는 눈빛에 기죽을 반호진이 아니었다.
“어쨌든 오빠도 예쁜 여자가 좋다는 거 아냐.”
“당연하지.”
“그럼 이건 어때? 두 명이나 세 명을 받아들일 생각은 있어?”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반호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이번 생에서는 혼인을 꼭 해 보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첩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확실하게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반호진도 사람이기에 나중에는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었고.
“적어도 지금은 한 명만 고집하지는 않겠다는 거네?”
“또 모르지. 나중에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고. 사람 마음이라는 게 변덕스러우니까.”
“우와. 역시 고단수라니까.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 봐.”
“그래서 나쁠 건 없잖아.”
끼이잉.
히죽 웃은 반호진이 찻잔을 들어 올릴 때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바로 강아지들이 잠에서 깨어났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죽은 듯이 잤던 게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찰싹 달라붙어서 잠들었던 강아지들이 개집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와 반호진에게 다가왔다.
“신기하다. 셋 다 오빠한테 가네. 한 마리 정도는 딴 길로 샐 법도 한데.”
“날 부모로 아는 것 같아. 새끼인데도 다른 사람이 주면 안 먹어. 안겨 있고, 노는 건 잘 놀면서.”
“영특하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아는 거지. 이곳에서 가장 힘 센 사람이 오빠라는 걸.”
두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서 반호진에게 애교를 부리는 세 마리의 강아지를 보며 난희주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잘 때도 깜찍했지만 움직이니 더더욱 귀여웠다.
특히나 오동통한 배가 그녀의 시선을 빼앗았다.
“처음 본 사람이 나라서 그렇지. 만지고 싶으면 만져도 돼. 이 녀석들 낯을 안 가려. 그냥 다 좋아해. 들개답지 않게.”
“완전 새끼 때부터 사람 손을 타서 그런 걸 거야. 본능적으로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아는 거지.”
담담한 어조와 달리 난희주의 입매는 쉴 새 없이 씰룩였다.
분홍빛 통통한 뱃살을 만지자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서였다.
아직 새끼라서 씻기지도 못했을 텐데 의외로 반호진이 관리를 잘해 준 건지 개 특유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너무 사람을 좋아해도 안 되는데.”
“좀 더 자라면 낯을 가릴 거야. 자기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개는 본능적으로 알거든. 살기에도 민감하고. 자주 보는 사람에게야 배를 보이지만 낯선 사람을 보면 경계부터 할 거야. 엄청 짖을 수도 있고.”
“잘 아네?”
“나도 어렸을 적에는 키웠었거든. 열두 살까지 살다가 내 곁을 떠났어. 개치고는 진짜 오래 살았지. 천수를 다 누리고 갔지.”
난희주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헤어진 개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십이 년이 긴 거야?”
“보통은 십 년도 못 넘겨. 야생에서 살면 더 줄고.”
몰랐던 사실이기에 반호진은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세 녀석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계산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잘해 줘야 해. 나이를 먹으면 해 주고 싶어도 못 해 주는 게 많거든.”
“아직 걸음마도 못 뗀 애들을 앞에 두고 너무 앞서간 것 같은데.”
“히힛. 좀 그런가?”
“인간으로 치면 갓난아기 앞에서 죽음 운운하는 꼴이지.”
“괜찮아. 아직 어려서 우리 말을 못 알아들을 테니까. 근데 진짜 귀엽다. 나 한 마리 주면 안 돼? 키우던 개를 보내고 다시는 키우지 말아야지 다짐했는데, 이 아이들을 보니까 다짐이 흔들린다.”
세 마리 중 유독 눈이 큰 삼동이를 안고서 난희주가 눈을 빛냈다.
셋 다 귀여웠지만 이상하게 가장 작은 삼동이한테 시선이 갔다.
“형제는 같이 있어야지. 부모도 없는데. 나중에 새끼 낳으면 줄게.”
“셋 다 수컷이니 짝 찾아 주는 것도 일이겠다. 어쨌든 약속한 거다?”
“응.”
당장 데려가지 못하는 대신에 셋과 질리도록 놀겠다는 듯이 난희주가 일동이와 이동이도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진짜 행복한 얼굴로 세 마리와 놀아 주기 시작했다.
***
팽수영은 수줍은 얼굴로 옆을 힐끔거렸다.
그러자 든든한 인상의 선우방이 보였다.
살짝 긴장했는지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는데 팽수영은 그조차도 귀엽게 느껴졌다.
“시전은 오랜만이네요.”
“늘 수련만 하셨으니까요.”
“제가 먼저 말을 꺼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지금이 선우 공자님께 중요한 시기라는 걸 저도 알고 있는걸요. 오히려 이렇게 시간을 내 주셔서 고마워요.”
팽수영이 살포시 웃었다.
잘생긴 외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생긴 얼굴도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팽수영은 외모보다는 인성을 봤다.
진중하고, 허세 없고, 예의 바른 선우방은 그녀가 바라는 이상형에 매우 근접해 있었다.
“아닙니다. 감사 인사는 오히려 제가 해야 하는걸요. 저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저는 호진이처럼 수련은 못 하겠더라고요.”
“엄청 지독하게 한다는 말은 들었어요.”
“맞습니다. 보통 체력으로는 따라가기 힘들 정도예요. 지금은 그나마 좀 나아진 거예요. 체력을 유지하는 정도로만 하고 있어서요. 처음에는 진짜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척이가 엄청 고생했죠.”
“그랬을 것 같아요.”
모용척은 나름 유명했다.
재능만 믿고 허송세월 보냈던 것으로 말이다.
그러니 제대로 몸을 만들려면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근데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저희가 있는 거라 호진이에게는 고마울 뿐이에요. 아무것도 아닌 저에게 먼저 다가와 준 게 호진이거든요. 사실상 지금의 저를 만들었죠.”
“저도 그 얘기 들었어요. 문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셨다고.”
“예. 전 지금도 이유가 궁금해요. 별호도 없던 저와 달리 호진이는 그때도 유명했거든요. 천룡 남궁 소협을 제압했을 때라.”
선우방이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만 떠올리면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날을 기점으로 운명이 바뀌었기에 아마도 그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터였다.
“안 물어보셨어요?”
“당연히 물어봤죠. 근데 말을 안 해 주더라고요. 그냥 친해지고 싶었다고. 이상하게 편한 느낌이었다고만 말하고 끝이에요.”
“이상하긴 하네요.”
“팽 소저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죠?”
“네.”
사소한 대화였지만 팽수영은 이런 게 참 좋았다.
꼭 화려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며 거리를 거니는 게 말이다.
그녀의 고향인 북경에 비하면 남창은 상당히 낙후되어 있으나 그렇기에 사람도 적고 알아보는 사람도 없어 편한 점도 있었다.
물론 내심은 어느 정도 소문이 나길 바라고 있었지만 말이다.
“나중에 둘 다 늙으면 그때 다시 한번 물어보려고요. 그때쯤이면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을까 싶어서요.”
“저에게도 말해 주세요.”
“물론이죠.”
“참, 아버지 말씀은 그냥 잊어버리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요.”
“하하하.”
선우방이 어색하게 웃었다.
팽수영이야 딸이니 무시해도 상관이 없다지만 그는 달랐다.
농담도 선우방은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빠는 물론이고 저나 화영이도 알고 있는걸요. 문주님이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요.”
“소신이 있는 친구죠. 근데 아집이나 편견은 없어요.”
“알죠. 권위의식도 없으시잖아요. 그래서 금가장, 하오문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계시고.”
“근데 팽가주님께서 기대하시는 건 사실이니까.”
선우방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편을 들어 주어서 고맙긴 하지만 이게 해결책이 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선우방은 마음이 무거웠다.
“화영이에 대한 건 아버지에게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게 어때요?”
“그럴까요?”
“제가 싫으신 건 아니죠?”
“싫다면 이렇게 시간을 내지 않았을 겁니다.”
팽수영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너무나 듣기 좋은 말이어서였다.
“이 순간을 모면하려는 말은 아니죠?”
“저도 빈말을 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오히려 솔직한 편이지요.”
팽수영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바로 이 말을 듣기 위해서 한 번 더 물어본 것이었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
선우방의 진지한 표정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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