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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림-251화 (251/468)

제 82장. 누구 마음대로. -02

팽만철이 히죽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옆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나 남궁호는 동조하지 않았다.

머리도 머리 나름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근데 지금의 계략은 나쁘지 않았다.

‘어부지리라.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근데 이 녀석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점인데.’

현재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는 모용희수였다.

한데 문제는 모용희수만 있다는 게 아니었다.

옆에서 말하고 있는 팽만철 역시 강력한 경쟁자였다.

모용희수를 밀어내면 다음 상대는 하북팽가였다.

“어때? 우선은 공공의 적부터 치워 버리고 우리끼리 승부를 내는 건?”

“우리만 남아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우리한테 비벼 볼 만한 곳이 더 있나? 나는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는데? 나도 그렇지만 너도 호진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사방팔방에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렇긴 하지.”

“기껏해야 사천당가 정도이겠지. 근데 아직 감감무소식이고. 그러니 더더욱 이참에 끝내야 하지 않겠어? 께름칙한 작자가 오기 전에.”

남궁호가 피식 웃었다.

천하의 독왕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아마도 팽만철이 유일할 터였다.

하지만 일정 부분은 그도 동의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자네도 간과한 듯하이.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는 게 아닐세. 저쪽이 들고 있지. 그렇다고 우리가 강제로 빼앗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뺏으려다가 우리 목이 뎅겅 잘려 나갈 게야.”

“끄응!”

팽만철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애써 피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러쿵저러쿵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고 말이다.

남궁호의 말마따나 결정권은 반호진에게 있었다.

“그러니 나는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겠네.”

“흐음. 도전이라.”

“상대가 검신이라면 내가 도전자인 게 이상하지는 않지.”

남궁호가 씨익 웃었다.

제대로 붙어 보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한 번 검을 섞어 봤던 그였다.

그렇기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된통 깨질 텐데.”

“그러면서 배우는 게지. 어쩌면 깨달음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무상문주와의 비무가 흔한 경험은 아니니까.”

자신의 애검인 창천을 툭툭 건드리며 남궁호가 반호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여기에서 비무를 하게 된다면 후원에 모여 있는 모두가 대결을 보게 되겠지만 남궁호는 개의치 않았다.

단순히 비무를 본다고 해서 무조건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아마 봐도 얻는 게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남궁가주님.”

“여전히 부지런하구먼.”

“습관이 되어서요. 그보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흠흠!”

남궁호가 헛기침을 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용건을 물어볼 줄은 몰라서였다.

그러나 반호진의 성격을 모르지 않았기에 남궁호는 재빠르게 신색을 회복했다.

“말씀하시죠.”

“오랜만에 비무를 해 보는 건 어떤가? 자네도 몸을 제대로 안 풀어 본 지 꽤 됐을 텐데.”

“괜찮습니다.”

“음?”

“저는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몸을 풀고 싶으시다면 팽가주님과 대련을 하시지요.”

남궁호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정말 당황한 것이었다.

당연히 거절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이자 남궁호는 말문이 막혔다.

“저는 바빠서 이만.”

순간적으로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남궁호에게 반호진은 할 말만 하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남궁호가 남궁세가의 수장이고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인 염왕이라고 하나 그렇다고 비무에 꼭 응해 줘야 하는 건 아니었다.

더욱이 반호진은 남궁세가에서 있었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의 강압적인 태도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에 반호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하오문의 무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허어…….”

그런 반호진의 모습에 남궁호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입만 쩍 벌렸다.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나는 예상했지. 그래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거고.”

남궁호의 곁으로 팽만철이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예상했다고?”

“물론. 이제 더 이상 과거의 호진이가 아니니까. 일개 후기지수야 우리의 한마디를 거역하지 못하지만 호진이는 다르지. 막말로 너나 나나 때려잡는 게 가능하잖아? 굳이 움직일 필요 없이 이기어검만 날려도 우리는 접근조차 하지 못할걸? 그래서 비무하고 싶어 하는 거잖아. 강자와 붙기 위해서.”

“…….”

남궁호의 입이 다물어졌다.

인정하기 싫지만 팽만철의 말이 전부 다 맞았다.

남궁세가의 주인이고 염왕이라 불리는 절대고수가 그이지만 반호진 앞에서는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북해빙궁주에게 치명상을 날린 공격, 막을 자신 있어?”

“……없지.”

“나도 없어. 그러니 우리는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매달려야 해. 위치가 바뀌었으니 그에 맞게 행동할 수밖에 없어.”

“처량하구먼. 딸은 차이고 나는 까이고.”

“그래서 더 재미있지 않나? 나는 오히려 호승심이 활활 타오르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남궁호와 달리 팽만철은 눈을 빛냈다.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근데 그래서 더 의욕이 일었다.

애초에 힘들다고 포기하는 건 그의 성미에 안 맞았다.

“이왕이면 쉬운 길로 가는 게 좋지. 굳이 가시밭길을 갈 필요는 없지 않나?”

“그럼 너는 편한 길로 가. 물론 그러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겠지만.”

“으음!”

남궁호가 침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새삼스러운 눈으로 팽만철을 바라봤다.

어째 오늘따라 맞는 말만 하는 게 남궁호는 이상했다.

제법 쓸 만한 계략을 떠올린 것도 그렇고.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야.”

팽만철이 투지를 불태웠다.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남궁호가 알아서 포기해 준다면야 그로서는 좋았다.

경쟁자가 하나 떨어져 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다만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자신의 목소리가 크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멀리서 그를 주시하는 시선이 있다는 걸 말이다.

‘역시 저렇게 나오나.’

백설과 함께 서 있던 난희주가 슬며시 팽만철과 남궁호를 바라봤다.

정확하게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비록 무공이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두 사람이 강기막으로 목소리를 차단한 게 아니기에 엿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는 옳은 소리를 하네.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지.’

면사를 쓰고 있는 난희주가 눈을 빛냈다.

그녀 역시 팽만철과 같은 생각이었다.

더해서 팽만철과 마찬가지로 남궁호가 알아서 포기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기해요.”

“뭐가?”

“염왕이랑 도왕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요.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저는 믿기지가 않아요.”

남궁호와 팽만철을 힐끔거리며 백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정도로 백설은 지금의 상황이 신기했다.

무림에서 거물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심지어 눈치를 크게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그녀를 더욱 흥분케 했다.

“사실 나도 그렇긴 해.”

“소문주님도요?”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맞아요. 그래서 문주님이 더 대단하게 느껴져요.”

도왕과 염왕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으나 반호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불편한 시선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게 백설의 눈에는 참으로 멋지고 대단해 보였다.

“오빠 덕분에 이곳이 일종의 안전지대가 된 거니까. 근데 너도 같이 수련해야지?”

“에이. 그럴 수는 없죠. 적어도 저만은 소문주님 곁을 지키고 있어야죠. 아무리 안전하다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설이 네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딱히 없을 것 같은데.”

“너무하세요.”

백설이 울상을 지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꼭 후벼 팔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최대한 많이 배워야지.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데. 최소한 금가장에 뒤처질 수는 없잖아?”

“다들 그래서 기를 쓰고 집중하잖아요. 남궁세가나 하북팽가, 모용세가에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금가장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얼른 가. 나는 괜찮으니까.”

난희주의 지시에도 백설은 선뜻 발을 떼지 못했다.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어서였다.

천하십대고수씩이나 되는 이들이 아무 이유 없이 난희주와 하오문을 핍박할 리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기에 백설은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난희주의 계속된 권유에 결국 호위대원들이 구르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장원의 뒷문으로 나온 반호진은 뒷짐을 지고서 느릿하게 걸었다.

오전에 비무를 청했던 남궁호에 대한 기억은 깔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천하십대고수의 일인이고 남궁세가의 수장이라고 하나 그렇다고 반호진이 꼭 그의 요청을 들어 줄 필요는 없었다.

남궁세가에서 남궁호가 주인으로서의 권위를 부렸듯이 반호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벅저벅.

여전히 경지가 정체되어 있었으나 반호진은 의외로 초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편했다.

잔소리를 하는 사람도 없었고,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이도 없었다.

“출가라는 게 이렇게 좋을 줄이야.”

반호진이 히죽 웃었다.

엄밀히 말해 소림사는 그의 집이 아니었다.

그런데 느낌은 이상하게 출가를 한 것 같았다.

특히 자유로운 게 반호진은 너무나 좋았다.

“이럴 거면 진즉에 나올걸.”

반호진은 새삼 직접 경험해 봐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숭산에서의 생활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보이지 않는 속박 같은 게 있었다.

방장의 제자로서, 그리고 소림사의 일대제자로서.

그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모습도 이대제자들에게 보여야 했기에 조금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짹짹짹.

새들의 지저귐도 비슷하고 풍경도 똑같은 산이기에 다를 게 없지만 편안함이 달랐다.

숭산에서는 얹혀사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온전히 그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평화로운 게 반호진은 가장 행복했다.

제일 우선시했던 목표인 천하사패와의 전쟁에서 승리했기에 반호진은 무공이 지지부진해도 그리 조급하지 않았다.

“흐흐흥.”

어차피 지금의 인생은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 상상도 못 했기에 바라지도 못했다.

그 때문에 반호진은 평소대로 노력은 하되 마음가짐은 편하게 먹었다.

그래서인지 산책을 하는 반호진의 입에서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뒷짐을 지고서 반호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겨울이 끝나 가는 걸 알려 주듯이 숲에는 생기와 활력이 가득했다.

움트기 직전의 꿈틀거림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 생동감 넘치는 자연의 기운에 반호진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진짜 텃밭을 한번 만들어 볼까.”

태동하는 자연을 느끼며 반호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지금껏 반호진은 무언가를 키워 본 적이 없었다.

변명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진짜 죽어라 수련만 했기에 반호진은 작은 텃밭을 가꾸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감나무나 복숭아나무를 심어도 괜찮을 듯했고.

끼잉. 끼이잉…….

“음?”

질리다 못해 미치도록 했던 무공에 대한 생각을 잠시 밀어내고 무엇을 키울까 고민하던 반호진의 귓가에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죽음을 향해 가는 희미한 울음소리에 반호진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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