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1장. 각자의 방식으로. -03
둘 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인상이 험상궂었으나 난희주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이런 인상은 하오문에서도 흔했기에 놀랄 것도 없었다.
오히려 진짜 살벌한 이들에 비하면 귀여운 편에 속했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철웅파의 철웅이라고 합니다!”
문지기의 공손한 안내를 받으며 난희주는 장원 가장 깊숙한 건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응접실에 도착했는데 딱 봐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장대한 체구를 가진 삼십 대 장년인이 우렁차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런데 곰보다는 멧돼지를 연상케 했다.
크긴 큰데 우람한 느낌이라기보다는 뚱뚱했다.
“철웅?”
“아, 예!”
철웅이 조금 늦게 대답했다.
한눈에 봐도 면사를 쓴 여인의 신분이 높아 보였는데 그녀가 아니라 수행원으로 보이는 여자가 물어서였다.
그러나 떨떠름한 티는 내지 않았다.
여자이고 그보다 나이는 어려도 무공고수라는 걸 느낄 수 있었기에 철웅은 최대한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억지 미소는 짓지 말고. 그게 더 불편해.”
“시정하겠습니다! 아, 이쪽으로 앉으시죠!”
못마땅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백설에게 각 잡힌 자세로 대답한 철웅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백설과 대화한다고 정작 고귀한 신분을 모시지 못해서였다.
그래서 철웅은 얼굴 가득 송구한 기색을 띠고서 난희주를 상석으로 안내했다.
스윽.
태사의처럼 크고 화려한 의자였으나 난희주는 선뜻 앉지 않았다.
나름 신경 쓴 티가 나긴 했으나 철웅이 앉았을 게 분명한 자리에 앉기가 께름칙했다.
본능적으로 꺼려진다고나 할까.
“앉는 건 됐어. 어차피 이곳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으니까.”
한참이나 나이 어린 난희주가 하대를 했으나 철웅은 조금도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무림도 그렇지만 암흑가 역시 나이보다 중요한 건 힘이었다.
눈앞에 있는 난희주는 바로 그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철웅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얌전히 서 있었다.
더구나 암흑가에서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보다 더 무서운 곳이 하오문이었다.
백도무림은 그래도 가식을 떨지만 하오문은 그런 게 전혀 없는 정사 중간의 문파였기에 철웅은 감히 반항할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 그럼 차라도 드릴까요?”
“싫어.”
철웅이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난희주는 단칼에 거절했다.
위험해서가 아니라 위생적으로 더러워서였다.
당장 이곳만 하더라도 말만 응접실이지 곳곳에서 고약한 악취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여자의 지분 냄새가 뒤섞인.
“아, 알겠습니다.”
면사를 쓰고 있음에도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느껴졌기에 철웅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인상을 펴야 했다.
미소를 짓기 무섭게 백설이 싸늘하게 노려봐서였다.
“서찰을 받아서 알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한 가지뿐이야. 그것만 이행하면 너와 철웅파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거야. 물론 내가 말한 것들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무식하지만 융통성이 있는 게 철웅이었다.
그렇기에 철웅은 몸을 최대한 낮추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해 봐.”
“어째서 남창의 뒷골목을 정리하려고 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남창이 크긴 하지만 하오문이 직접 신경 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요.”
“이유가 알고 싶다라. 간단해. 거슬리는 것들을 치워 버리기 위해서야.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랄까. 일종의 뇌물이기도 하고.”
“뇌, 뇌물요?”
철웅이 말을 더듬었다.
뇌물이라는 두 글자가 그에게는 토사구팽이라는 말처럼 들려서였다.
“걱정하지 마. 토사구팽을 할 생각은 없으니까. 물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본문과의 약속을 지키면 널 죽이는 일은 없을 거야. 이건 내가 약속해 줄 수 있어.”
“가, 감사합니다!”
“고마워할 것까지는 없고. 이건 엄연히 약속이자 거래이니까. 나도 했던 일을 또 반복하고 싶지는 않거든. 얼마나 귀찮아? 했던 걸 또 해야 하면. 그러니까 잘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철웅이 목이 터져라 크게 대답했다.
어찌 보면 그저 한마디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철웅에게는 달랐다.
그리고 지금 당장 그가 믿을 수 있는 건 이것밖에는 없었다.
“궁금증은 풀어 줄게. 그래야 나중에 딴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까. 최근에 남창 외곽에 새로 생긴 장원 알지?”
“소식은 들었습니다. 젊은 애송…… 아니, 젊은 사람들이 부지를 사서 장원을 직접 지었다고요. 이름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젊은 애송이라. 소림검신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네.”
덜덜덜덜!
감히 상상조차 못 한 네 글자에 철웅은 몸을 떨었다.
그러나 정작 철웅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소림검신이라는 별호를 들은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서였다.
동시에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면사여인이 누구인지도 알아차렸다.
‘하, 하오문의 소문주!’
호위무사들 전원이 절정고수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부터 철웅도 어느 정도 짐작하기는 했다.
눈앞에 있는 면사여인이 하오문에서 상당히 높은 인사일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소문주일 줄은 몰랐기에 철웅은 대경했다.
“너 지금 한 말 저잣거리에 퍼졌으면 염룡과 검룡, 비룡이 찾아왔을 거야. 네 모가지를 잡으려고.”
꿀꺽!
철웅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서였다.
아니, 목을 잡히는 걸 넘어 사지 중 한두 개가 잘렸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냥 죽거나.
“그리고 내가 누군지도 알았겠지?”
“예, 예!”
철웅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더불어 백설과 호위무사들의 눈빛은 비례해서 날카로워졌다.
난희주의 신분이 밝혀진 만큼 눈빛으로 경고하는 것이었다.
허튼 수작을 부리면 즉시 죽이겠다고 말이다.
“미리 말한 대로 네가 해 줄 것은 딱 하나야. 철웅파 말고 나머지 세 군데를 날려 버려. 잡것들이 남창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물론 조심해야 하는 건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쥐 죽은 듯이 살아. 소란 일으키지 말고. 내가 바라는 건 딱 그거 한 가지뿐이야. 시끄럽게 하지 말고 무상문에 일절 피해를 끼치지 말 것. 만약 조금이라도 오빠와 무상문에 폐를 끼친다면, 약속할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 주겠다고.”
“가,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쿠웅!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서 있던 철웅이 오체투지를 하며 이마를 박았다.
굳이 난희주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그는 절대 반호진과 척을 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척을 지고 말 급이 아니었다.
반호진은커녕 당장 염룡 서조운만 와도 철웅파는 풍비박산 날 게 분명하기에 철웅은 바닥에 이마를 찍으며 크게 대답했다.
“절정고수 다섯을 붙여 줄 거야. 이 정도면 충분하지? 부족하면 더 붙여 주고.”
“충분합니다! 확실하게 뒷골목을 청소하겠습니다! 또한 검신께서 남창을 돌아다님에 있어 불편함이 없게 만들겠습니다!”
“아주 좋아.”
철웅의 대답에 난희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뢰는 가지 않지만 그래도 말귀는 잘 알아들은 것 같아서였다.
너무 똑똑해도 다루기 힘들었기에 적당히 무식한 게 오히려 좋았다.
“상납은 할 필요 없어. 우리가 푼돈에 연연할 정도로 작은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상문에 찾아갈 생각도 하지 말고. 무상문은 너희 같은 것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좋아. 바로 시작해. 정문에 나가면 다섯 명의 절정고수들이 있을 거야. 그들을 데리고 지금 당장 움직여.”
“예!”
강압적인 어조였으나 철웅은 눈곱만큼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난희주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서였다.
당장 거슬린다는 이유로 그의 목을 베어 버릴 수 있는 게 난희주였기에 철웅은 절도 있게 일어나서는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후 응접실을 나섰다.
“잘할까요?”
“왜? 미덥지 않아?”
“생긴 게 딱 봐도 멍청하게 생겼잖아요. 힘도 썩 좋아 보이지 않고.”
“초일류에 발을 갓 디딘 수준이긴 한데, 그래도 남창의 뒷골목을 사등분한 남자인데 능력은 있겠지. 아니면 능력 있는 부하가 있거나.”
난희주로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시킨 일을 완수하느냐, 못 하느냐였다.
“그놈이 그놈인 것 같던데요.”
“일단 지켜보자고. 이것도 못 해내면 다른 이를 쓰면 되니까. 최후의 방법이지만 본문이 직접 관리해도 되고.”
“제 생각에는 그게 가장 깔끔할 것 같아요.”
“근데 보기에 좀 그렇잖아. 괜히 티내는 것 같고. 어쩌면 감시하는 거라고 오빠가 생각할 수도 있고.”
“의심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기는 하죠. 소문주님께서는 선의로 한 행동이지만 그 의도가 문주님께 온전히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가장 손쉬운 방법을 놔두고 굳이 철웅파를 찾아온 이유가 이것이었다.
의도가 순수하다 해도 받아들이는 입장은 다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저분한 일은 마찬가지로 지저분한 것들이 가장 잘했다.
“또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을 수는 없으니까. 낭비야, 낭비. 이런 놈들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어.”
“맞아요.”
“이런 일은 우리가 전문이기도 하고. 겸사겸사 지금까지 받은 빚도 갚고.”
“그래도 너무 모르면 안 되니까 제가 적당한 시기에 은근슬쩍 흘릴게요. 아주 자연스럽게요.”
“안 그래도 돼. 선행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
난희주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반대로 아예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요. 특히나 남자들은 둔하잖아요. 이런 걸 말하지 않으면 전혀 모른다고요. 게다가 문주님은 외출을 거의 안 하시잖아요. 저희 오고 밖으로 나가신 거 본 적 있으세요?”
“……없네?”
“밤에 혼자 산책을 나간 적은 있으시겠지만 시전에 나온 적은 없어요. 즉 문주님께서 알게 될 확률이 극악하다는 얘기죠.”
백설이 확신 어린 어조로 말했다.
암만 봐도 반호진에게 흘러 들어갈 구석이 없었기에 적당한 때 누군가 흘려 줄 필요가 있었다.
“듣고 보니 그러네?”
“아니면 두 분이서 자연스럽게 외출을 나와도 되고요. 남창은 성도잖아요. 볼거리가 의외로 많죠. 북동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포양호도 있고. 동정호보다는 작다지만 포양호도 제법 큰 호수잖아요.”
“거기까지는 안 갈걸. 오빠 성격상. 그보다 우선 나가자. 여기 더 이상 있기 싫어. 찝찝해.”
난희주가 출입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볼일도 다 봤으니 더 이상 악취 나는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지분 냄새가 왜 나는지 이유를 알기에 난희주는 고운 아미를 잔뜩 찡그리며 응접실을 나갔다.
***
보름달이 뜬 야심한 밤에 사마의성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딱 봐도 구김 하나 없이 깔끔한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사마의성은 다시 한번 옷차림을 확인하고는 반호진의 집무실로 향하는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갔다.
똑똑똑.
“들어와.”
입을 열기도 전에 방 안에서 들려오는 반호진의 목소리에 사마의성은 느릿하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늘 그렇듯이 고고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반호진의 모습이 보였다.
책상 위에는 지필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정작 종이는 깨끗했다.
“늦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죄송하긴.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데. 아마 지금 침상에 누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일단 앉아.”
반호진은 자리를 권한 후 차를 따라 주었다.
할 말이 있어 독대를 청했다는 걸 알지만 반호진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먼저 묻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사마의성이 알아서 말할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또 어떤 말을 하려는 것인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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