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43화 (243/468)

제 79장. 보은(報恩). -03

당황했는지 서조운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관심 있는 여자는 많잖아. 미녀들만 보이면 눈이 돌아가던데.”

“그, 그건 본능이에요! 제 뜻이 아니라고요!”

“다들 그렇게 변명을 하곤 하지. 솔직하지 못하게.”

후르릅.

반호진이 느긋하게 차를 들이켰다.

뜨끈한 차를 마시자 몸도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에 서조운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었다.

“너무하세요.”

“여자와 관련된 건 아닌 모양이네. 그럼 어떤 건데?”

“저처럼 절맥을 앓고 있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구양절맥은 물론이고 태음절맥이나 칠음절맥, 구음절맥을 앓고 있는 아이들에게요.”

말하면서 차분해진 서조운의 목소리를 들으며 반호진이 눈을 크게 떴다.

진심으로 놀란 것이었다.

서조운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기에 반호진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호오.”

“제가 주제넘은 걸까요?”

“전혀. 나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을 거야. 너처럼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혹은 전혀 모르고 있거나.”

“맞아요. 그래서 증상이 있는 아이들을 찾아보고 도움을 주고 싶어요. 형님처럼요.”

서조운이 눈치를 살폈다.

기미를 보아하니 반대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였다.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 있기에 반호진이 반대하면 할 수 없었기에 서조운은 마른침을 삼켰다.

“좋은 생각이야. 근데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너무 퍼 주지 마. 그것도 좋은 게 아니야. 선의가 사람을 망칠 수도 있어.”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허락하고 말 게 뭐가 있어?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나는 너와 서가장주님에게 중원을 수호하는데 도와 달라고 했지 언제나 내 곁에 있어 달라고 하지는 않았어.”

“어?”

서조운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반호진의 말이 맞았다.

그때 반호진은 절대 서조운을 거두거나 자신이 부려 먹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도와달라고만 했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어떻게 보면 네가 하고자 하는 일도 중원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절맥을 앓고 있는 이들의 재능은 확실하니까. 당장 너만 봐도 알 수 있고.”

“감사합니다!”

“고마울 것까지는 없고. 사람이 태어나서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지. 나도 그래서 독립한 거고. 근데 쉽지는 않을 거야. 알지? 삼음절맥이나 삼양절맥도 만만치 않아. 남자아이들은 네가 구양절맥을 앓았으니 어느 정도 지식이 있겠지만 구음절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잖아?”

서조운의 결정을 응원하지만 그렇기에 반호진은 현실적인 문제를 꺼냈다.

이상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기에 반호진은 이 부분을 콕 짚었다.

“예. 그래서 따로 관련 서책을 구해서 공부하고 있어요. 의술에 관한 책들도 보고 있고요. 음한계열의 무공도 난 소저에게 부탁해서 필사본을 구입할 예정이에요.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기본은 될 테니까요.”

“이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

양강기공은 축융신공이 있으니 따로 필요 없었다.

문제는 음한계열의 무공이었는데 서조운의 말을 들은 반호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장으로 다가가서는 서책 한 권을 뽑아 가지고 돌아왔다.

툭.

“이, 이건?”

“북해빙궁의 무공이야. 아마 기본적으로 익히는 무공 같은데 그래도 웬만한 음한기공보다는 나을 거야. 북해빙궁의 빙공이니까 안정성도 확실하고. 똑같이 익히는 건 힘들겠지만 그래도 참고 정도는 될 거야.”

“제가 이걸 받아도 될까요?”

“안 될 것도 없잖아? 너도 북해빙궁과 싸웠는데. 그리고 이것도 필사본이야. 연구용으로 꽤 많이 풀렸어. 또 다른 문제도 있고. 한번 펼쳐 봐.”

“네!”

반호진의 말에 서조운이 허겁지겁 제목도 없는 무공비급을 펼쳤다.

그러고는 이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생소한 글자들이 곳곳에 적혀 있어서였다.

아는 글자도 있지만 모르는 글자들도 상당히 많은 모습에 서조운은 반사적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우리하고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니까. 일단 거기 나오는 글자부터 완벽하게 해석해야 할 거야. 연구는 그다음이고.”

“이건 생각지도 못했어요.”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은, 혹은 미완성된 무공을 구입하는 것보다는 누가 뭐래도 북해빙궁의 무공이 훨씬 나았다.

일단 위력이 증명되었으니까.

“그건 그렇죠. 기본공일지라도 북해빙궁의 무공이기도 하고.”

모든 문파와 무가의 뿌리는 기본공이었다.

당장 무당파만 하더라도 태극권에서 최고의 무공이자 장문무공인 태극혜검이 나온 만큼 기본공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어. 쉽게 얻어진 건 쉽게 잃기 마련이고. 연구하면 너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감사합니다, 형님! 정말 열심히 할게요!”

“무공은 치료의 기본 조건이라는 거 알고 있지? 해야 할 일이 많을 거야. 막상 만나면 여러 가지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을 테고. 그런데도 할 거야?”

“네. 일단 부딪쳐 보겠습니다. 그리고 형님이 제게 베푼 것처럼 저도 저와 비슷한 상황에 빠진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이런 안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안배?”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듯한 느낌에 반호진이 갸웃거렸다.

안배라는 단어가 너무 뜬금없어서였다.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구천문과 포달랍궁, 북해빙궁이 여전히 존재하지 않습니까. 또 새외에 이 세 곳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흐음?”

반호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서조운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다른 이들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지만요. 그냥 승리한 사실에만 기뻐하더라고요. 정작 네 곳 중에 확실하게 멸문시킨 건 철혈성밖에 없는데.”

“어쩔 수 없지. 원정을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가려고 해도 과연 얼마나 갈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만 하더라도 뜻이 갈리겠죠.”

“맞아. 여력이 없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 원정은 일단 모든 게 불리해.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지 않는 이상 이기기 힘들어. 괜히 새외무림이 실패한 게 아니야. 역사가 알려 주기도 하고. 성공보다 실패가 많으니까.”

반호진이라고 뿌리 뽑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다만 현실적으로 득보다 실은 크기에 이 정도에서 납득하는 것이지.

만약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하고 전력을 상당 부분 보전했다면 반대로 새외무림으로 넘어가는 것도 고민해 봤을 터였다.

그러나 결과는 안타깝게도 겨우 승리한 정도였기에 반호진은 욕심을 버렸다.

“저는 그래서 더더욱 후학양성에 대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래에 침공해 올 것을 대비해서. 물론 저 혼자 이렇게 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예 손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좋은 생각이야. 나도 그것 때문에 어느 정도는 독립한 것이기도 해. 이번 전쟁이 끝났을 뿐 다음 전쟁이 남아 있으니까. 어쩌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한 번 더 부딪칠 수도 있고.”

“그러니까요.”

“나는 네 꿈을 응원해. 하지만 수련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으면 해.”

“물론이죠. 저는 무인이니까요. 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저와 가족, 그리고 형님입니다!”

서조운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밖에까지 다 들릴 정도로 말이다.

하나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난 빼도 돼.”

“절대 뺄 수 없습니다!”

“언어는 금가장 쪽에 부탁하면 될 거야. 새외 쪽으로 상행을 나가는 이들이라면 잘 알 테니까.”

“넵!”

“자, 그만 가 봐. 꿈을 이루려면 바쁠 텐데.”

반호진은 자연스럽게 축객령을 내렸다.

굳이 서조운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도 않았고, 이제부터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다.

반호진 역시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느라 정신없기도 했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오냐.”

반호진이 검공과 내공심법을 새로 만들기 위해 연구한다는 걸 서조운도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게다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기에 서조운은 깍듯하게 인사한 후 집무실을 나섰다.

탁.

“나도 베풀고 싶다라. 이런 게 선순환이라는 건가.”

방금 전까지 서조운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며 반호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동시에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천하사패를 물리친 것처럼 미래를 크게 바꾼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보람이 느껴졌다.

“경쟁자가 있겠지만, 그 또한 인생이니까.”

의도는 좋았으나 모든 계획이 처음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많은 시행착오도 겪어야 했고, 경쟁자들과도 싸워서 이겨야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얻는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기에 반호진은 서조운을 응원했다.

집무실의 문 앞에 선 사마의성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독대는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반호진과 불편한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옷자락을 만지고 있었으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벌써 꽤 오래된 고민이었으나 사마의성은 아직 답을 내놓지 못했다.

“뭐 해? 안 들어오고.”

“아, 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반호진의 목소리에 사마의성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절도 있게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바쁜데 부른 건 아니지?”

“아니에요. 연구야 늘 하는 거니까요.”

“사마세가의 무공? 아니면 기문진법?”

“급한 불은 꺼서 지금은 생각나는 대로 하고 있어요. 언제까지 해내야 한다고 정해 놓은 건 아니니까요.”

“좋은 생각이야. 급할수록 되돌아가라는 말도 있으니까.”

사마의성에게 자리를 권한 후 반호진은 자연스럽게 차를 따라 주었다.

소림사에서 늘 마셨던 차라서 그런지 장소가 달라졌음에도 어색함은 없었다.

“형님은 어떠세요?”

“나야 좋지. 책임감도 느끼고. 소림사에서와 달리 이제는 책임져야 하는 이들도 생겼으니까.”

“솔직히 저는 많이 감동했어요.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모두가 다 갚으려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런데 잊지 않고 찾아와 주었잖아요.”

“나도 신기하긴 해. 고맙기도 하고. 그때 당시에는 그냥 평범하게 잘 살기만을 바랐었는데.”

반호진이 바란 건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 책임져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모든 걸 다 책임져 줄 게 아니면 차라리 관심을 주지 않는 게 나았다.

한데 그럼에도 여인들과 소녀들은 은혜를 잊지 않고 조금이라도 갚겠다고 찾아오자 반호진도 가슴이 뭉클했다.

“다 형님께서 덕을 쌓으셔서 돌아온 것이지 않을까요?”

“덕은 무슨. 그냥 좋은 사람들인 거지.”

“그것도 맞고 형님이 좋은 사람이시기도 하고요.”

사마의성이 씨익 웃었다.

하지만 웃는 사마의성과 달리 반호진은 코웃음을 쳤다.

“내 손에 묻은 피가 얼마인데.”

“필요한 살생이지 않았습니까. 중원을 지키기 위한 일이기도 했고요.”

“됐다. 그런다고 업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내가 널 보자고 한 건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야.”

“경청하겠습니다.”

“그렇게 바짝 얼어서 들을 필요는 없고. 편하게 들어. 편하게.”

반호진이 웃으며 말했으나 사마의성은 꼿꼿한 자세를 풀지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반호진이 쓸데없이 자신을 따로 불러 독대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사마의성은 집중한 얼굴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