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장. 보은(報恩). -02
언니들을 따라 소녀들도 입을 열었다.
잔뜩 긴장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이다.
“으음!”
그 모습에 반호진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였다.
옆을 돌아보니 일행들도 마찬가지인 듯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해? 대답은 해 줘야지. 안 그러면 다들 계속 이러고 있을걸?”
“무작정 허락해 주라고?”
“아하. 그걸 설명 안 해 줬구나. 모두 들었죠? 우리가 모두 급했어요.”
난희주의 말에 맏언니로 보이는 여인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 보니 앞뒤 자르고 본론만 말했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그래서 여인은 민망함에 얼굴을 살짝 붉히며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반 대협과 다른 분들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때마침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도 하고요.”
“할 수 있는 일요?”
반호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였다.
“네. 일손이 부족하지 않으세요? 저희는 웬만한 일은 다 할 수 있어요. 음식은 물론이고 침소를 정리하는 일, 뒷간을 청소하는 것도요.”
“그동안 열심히 배웠어요!”
“한 번 믿어 주세요!”
맏언니에게 힘을 보태겠다는 듯이 동생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소리쳤다.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의욕 가득한 여인들과 소녀들의 모습에 반호진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난희주를 바라봤다.
“참고로 말하자면 솜씨는 내가 보증할 수 있어. 내 두 눈으로 직접 봤거든.”
“나야 감사하기는 한데.”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 오빠나 다른 분들은 수련하기 바쁘잖아. 언제까지 단순하게 고기만 구워 먹을 거야?”
난희주는 조목조목 말했다.
눈에 확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정말 많은 게 필요했다.
예전이야 소림사에서 알게 모르게 자잘한 일들을 처리해 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달랐다.
모든 걸 스스로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써야 했다.
“그렇긴 하지.”
“오빠 성격에 아무나 고용하지도 않을 거고. 나는 충분히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언제까지 본문에서 지낼 수는 없는 거고. 아, 이건 내가 싫다는 게 아니야. 세간의 인식 때문이지.”
“알아. 내가 그걸 모를까.”
“혹시 몰라서.”
난희주가 싱긋 웃었다.
그녀라고 반호진이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반호진에게 보은하겠다는 여인들은 모를 수도 있기에 일부러 자연스럽게 알려 준 것이었다.
자신과 하오문이 절대 여인들과 소녀들을 내모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난희주와 대화만 할 뿐 아무런 대답을 해 주지 않는 반호진의 모습에 맏언니가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결정하지 않았다는 게 그녀에게는 불안하게 다가왔기에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허락은 무슨. 도와주겠다는데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지. 대신 이건 확실히 하자고. 도와주러 온 것도 감사하고, 은혜를 갚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겠어. 그렇지만 무급으로 봉사를 하는 건 안 돼. 너희들 마음은 알겠지만 이건 넘어갈 수 없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당연한 거야. 날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건 아니지? 그리고 너희들도 돈을 모아서 시집가야지.”
“아…….”
조건부 허락이지만 그녀들에게 있어 전혀 나쁠 게 없는, 오히려 좋은 조건이었기에 다들 고개를 들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시집 얘기가 나오자 모두 감동했다.
반호진이 거기까지 생각해 줄 줄은 몰라서였다.
“대신 맡은 바 일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
“네!”
“맡겨 주세요!”
“정말 열심히 할게요!”
반호진의 마음이 선명하게 전해졌기에 여인들과 소녀들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굴도 더없이 환해졌다.
“그럼 우선 몸부터 일으켰으면 좋겠는데. 내가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말이야. 부탁해.”
“네!”
스스슥!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엎드려 있던 여인들과 소녀들이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반호진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 오빠. 참고로 여기에 온 이들이 다가 아니야. 시간이 안 맞아서 우선 이들만 데려온 거야.”
“응?”
난희주의 말에 반호진이 당황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 정도로 놀란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어, 지금도 넘치도록 많은 것 같은데요.”
“지금은 많아 보여도 나중에는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살림이라는 게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거든요. 은근히 손이 가는 곳이 많아요.”
서조운을 바라보며 난희주가 싱긋 웃었다.
지금이야 불필요해 보이지만 그녀가 보기에 무상문은 이제 막 시작한 상태였다.
거기다 반호진을 제외하더라도 이곳에는 염룡과 검룡, 은룡, 비룡이 모두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없었기에 미리 준비해 두는 것도 난희주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뭐, 돈이 없는 건 아니니까.”
“저희는 조금만 받아도 괜찮아요.”
“그럴 수는 없지. 너희들이 조금 받으면 다음에 들어온 사람은 더 적어져.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건 안 돼.”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맏언니를 보며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돈이 없다면 모를까 이곳을 사고, 인근 땅을 구입했어도 반호진의 재산은 크게 줄지 않았다.
이자도 매일 늘어나고 있는 상태였고.
그렇기에 임금을 지불하는 건 걱정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문주님!”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들을 배려해 주는 반호진의 모습에 여인들과 소녀들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감격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곳에 오기로 마음먹길 정말 잘했다고 말이다.
“적당히 해, 적당히. 몸 상하게 하지 말고. 괜히 무리했다가 몸살 난다. 딱 해야 하는 것에서 조금만 더 잘해 주면 돼. 난 많은 거 안 바란다.”
“네!”
“명심할게요!”
지나치게 의욕이 넘쳐 보이는 소녀들의 모습에 반호진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딱 봐도 첫날부터 무리할 것 같아서였다.
“오늘 하루는 여독을 푸는 데 쓰고 일은 내일부터 해. 먼 길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의성아, 아이들이 지낼 곳을 알려 줘.”
“네, 형님.”
이런 쪽의 일은 사마의성이 가장 잘했기에 반호진은 고민하지 않고 부탁했다.
사마의성 역시 자신이 잘한다는 걸 알고 있기도 했고.
다른 일행들은 섬세함이 부족했기에 사마의성은 웃으며 여인들과 소녀들을 데리고 응접실을 나섰다.
“기분이 어때? 보은하겠다고 찾아오니까.”
“좋지.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다는 뜻이니까.”
“저 사람들에게 오빠는 구원자나 마찬가지야.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난희주가 반호진을 지나 서조운과 선우방, 모용척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반호진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지분도 결코 적지 않았다.
반호진 혼자 한 게 아니라 다 같이 했기에 세 사람도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하하. 부끄럽네요.”
“저는 그저 옳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
“척이 형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어처구니가 없네요.”
민망해하는 선우방과 달리 거들먹거리는 모용척의 모습에 서조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반호진을 따라다닌 것밖에 없는데 이렇게 말하자 어이가 없어서였다.
스스로 나서고 저런 말을 한다면 인정하겠는데 서조운이 본 모용척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나도 언젠가는 협행을 했을 거야. 백도무림의 전도유망한 후기지수이자 모용세가의 소가주로서 나 역시 협의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세요. 형님을 못 만났으면 지금도 여전히 방구석에서 허송세월만 보냈을 거잖아요.”
“…….”
모용척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차마 아니라고 잡아뗄 수가 없어서였다.
그 스스로 생각해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기에 모용척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호호호.”
“빈 방은 많으니까 편히 쉬어.”
평소에는 보기 드문 모용척이 밀리는 모습에 난희주가 웃을 때 반호진이 말했다.
숭산에서는 머물 수 있는 공간이 협소했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장원이 엄청 넓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비좁게 지낼 정도는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호기롭게 말했다.
“너무 오래 머문다고 뭐라 하진 마?”
“그럴 정도로 매정하진 않아.”
“후후. 다행이네.”
난희주가 눈을 반짝였다.
묘하게 음흉한 눈빛이었는데 때마침 찻잔을 드느라고 반호진은 그걸 보지 못했다.
똑똑똑.
“접니다, 형님.”
“응. 들어와.”
무상문의 주인답게 이제는 따로 집무실을 갖춘 반호진이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의자에 앉아서 입을 열었다.
이윽고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서조운이 웃는 얼굴로 들어왔다.
“이렇게 집무실도 있으니까 왠지 성공한 거 같아요.”
“성공했지.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에이. 제가 어떻게 형님과 나란히 하겠습니까. 형님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구만리죠.”
“왜 그래? 염룡이라는 두 글자를 모르는 무인이 없는데.”
평소답지 않게 겸양을 떠는 서조운을 보며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솔직히 서조운 정도 되면 자랑을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자만으로만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그래도 소림검신에 비할 바는 아니죠.”
“검신이라.”
“이번 별호는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요. 신룡이라 불리셨을 때는 되게 싫어하셨잖아요.”
“내가 용이라 불릴 급은 아니지.”
“맞습니다!”
서조운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후기지수에 속할지 모르나 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이었다.
그렇기에 서조운은 격하게 긍정을 표했다.
“뭐, 그렇다고 용의 칭호를 폄하하는 건 아니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님께서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으시니까요.”
“그건 인정. 근데 안 아쉬워? 서가장에 좀 더 머물러도 되는데.”
서조운에게 차를 따라 주며 반호진이 말했다.
포달랍궁과 북해빙궁을 물리쳤기에 이제 더 이상 급한 일은 없었다.
언제까지 이 평화가 지속될지는 모르겠으나 반호진이 생각하길 당장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슬쩍 휴식을 권유했었는데 서조운은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었다.
“꼭 제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얼마나 달라졌는지 직접 보기도 했고요. 형님 말씀대로 편지도 주기적으로 보내고 있고, 보고 싶으면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흔치 않은 기회인데.”
“계약은 계약이잖아요. 목숨을 얻었는데 당연히 제대로 이행해야지요.”
서조운이 씨익 웃었다.
어떻게 보면 강압적인 계약일 수도 있는데 당사자인 서조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반호진은 그게 내심 고마웠다.
“충분히 잘 이행하고 있어. 내가 말했지?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고. 적절한 휴식은 반드시 필요해.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명심하고 있죠. 열심히는 하되 무리하지는 않는 것. 그게 형님의 말씀이시잖아요. 그런데 저도 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하고 싶은 거?”
찻잔을 입에 가져가던 반호진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란 것이었다.
“예. 예전부터 조금씩 생각하던 건데요.”
“뭔데? 말해 봐.”
반호진이 짐짓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의자까지 끌어당기면서 말이다.
그 적극적인 모습에 서조운이 오히려 당황했다.
“어, 거창한 건 아닌데요.”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혹시 나 몰래 장가라도 가려고?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어떤 여자야?”
“왜 그러세요. 저 만나는 사람 없는 거 아시면서. 아직 좋아하는 사람도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