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41화 (241/468)

제 79장. 보은(報恩). -01

착. 착. 착.

속도에 치중해서 그런지 글씨가 거의 날림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호진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했다.

달마삼검에서 시작했으나 이제는 자신만의 무론을 담긴 검공에 대해서.

그러자 지금껏 상대했던 이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탁.

정신없이 움직이던 붓이 드디어 멈췄다.

먹물을 머금은 종이 수십 장을 쌓아 놓고서 말이다.

“후우.”

동시에 반호진이 긴 날숨을 내쉬었다.

쓰는 동안 숨도 안 쉬었기에 이제야 호흡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길게 내쉬는 날숨과 달리 반호진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확인해 볼까.”

두서도 없고 무론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었으나 이제 반호진은 시간이 많았다.

급할 게 없기에 차분하게 휘날려 쓴 내용들을 차근차근 확인했다.

“이거 생각을 잘못 했는데.”

천천히 살펴보던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내용은 좋았으나 문제가 하나 있어서였다.

완성본이냐, 실패냐를 떠나서 지금의 내용은 지극히 현재 반호진의 수준에 어울렸다.

즉 입문용으로는 절대 사용할 수 없었기에 반호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지. 심화편으로 놔두면 되니까. 전반부, 후반부로 나누어 놔도 되고.”

고민하던 반호진이 눈을 빛냈다.

꼭 이걸 버릴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아서였다.

또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데 처음부터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몇백 번, 몇천 번의 시행착오를 각오했기에 반호진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얼떨결에 심화편을 얻게 되었다고 말이다.

물론 뼈대라고 하기에도 어설픈 수준이지만 중요한 건 핵심적인 내용이 상당 부분 들어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무공비급을 그렇게 많이 살펴봤던 게 도움이 되네.”

지난 생보다 최근 이 년 동안 읽은 무공비급이 훨씬 많았다.

그렇기에 알게 모르게 그런 것들이 도움이 되었다.

“뭐, 시간이야 많으니까.”

완성까지 갈 길이 구만리였으나 그래도 이미 만들어 둔 게 두 개나 있었기에 마음은 가벼웠다.

이론에 대해서는 빠삭하기도 했고.

그래서 반호진은 편안한 마음으로 작업에 다시 집중했다.

***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마차와 달리 호위하는 무사들의 분위기는 범상치 않았다.

복장은 평범했으나 흘러나오는 기도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예리한 눈빛 때문인지 더욱 매서워 보이는 인상으로 호위무사들이 정문 곳곳을 살펴봤다.

달칵.

마차가 멈춰 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며 두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뒤로 다양한 나이 대의 아이들이 우르르 내렸다.

“무상문이라.”

“대협과 잘 어울리는 이름 같아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미친 거 아니냐고 따질 텐데 오빠라서 그런지 수긍이 되네.”

“소림검신 보고 미쳤다고 할 사람이 지금 무림에서 존재할까요?”

“모르지. 투왕도 시비를 걸었었는데.”

면사를 쓴 난희주가 진지하게 말했다.

세상에는 별의별 미친놈이 존재한다는 걸 잘 알았기에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때와 지금은 위상 자체가 다르잖아요. 그땐 반 대협의 실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때이니까요.”

“위상이 천지차이기는 하지. 이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으니까.”

고개를 주억거리며 난희주는 정문을 지나 장원을 찬찬히 살펴봤다.

백설의 말대로 강호에서 위상이 대단한 게 반호진인데 장원의 규모는 그 명성에 비하면 소박했다.

나름 신경 써서 지은 티가 나기는 하나 그녀가 생각한 규모에 비하면 한참 작았다.

“역시 반 대협은 욕심이 별로 없으신 거 같아요. 보통 사람이었으면 자신의 위신에 맞게 무조건 크고 화려하게 지었을 텐데.”

“오빠가 물욕이 별로 없긴 해.”

“호호호. 반 대협을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도 별로 없고 말이죠.”

“내가 알기로는 아직 없지. 그리고 외양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 진짜 중요한 건 실속이지.”

“그렇게 따지면 여기는 꽉꽉 차 있죠.”

백설이 능글맞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자신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반호진 정도쯤 되면 무얼 하든 다 상관없었다.

“독립을 할 거라 예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

“저도요. 낌새는 조금 느끼긴 했는데.”

“법무 대사도 있으니까. 난 적당한 시기라고 생각해. 너무 늦으면 또 나오기가 애매하니까. 지금이 딱 적당하지.”

“무림 전체가 어수선하니 자리를 잡기에도 수월하고 말이죠.”

백설이 그리 말하며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현판을 올려다봤다.

많이 신기한 얼굴로 말이다.

난희주를 모시며 반호진을 제법 많이 만났지만 그럼에도 백설은 신기했다.

강호에서 검신이라 불리는 무인과 자신이 아는 사이라는 게.

“들어가자.”

“네.”

무공을 익힌 그녀나 백설, 호위무사는 한겨울의 추위라 해도 크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함께 온 이들은 달랐다.

일절 무공을 익히지 않은 보통의 사람들이었기에 난희주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총관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예의상 두어 번 정문을 두드린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잘 찾아왔네?”

“어떻게 알았어?”

“기감으로. 이곳이 좀 동떨어져 있잖아. 또 오늘쯤 도착한다고 말하기도 했고.”

정문을 지나기 무섭게 안쪽에서 반호진이 걸어 나오자 난희주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수긍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반호진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난 소저.”

“안녕하세요!”

더구나 반호진은 혼자가 아니었다.

정이륭을 제외한 일행들을 데리고 함께 왔기에 난희주는 익숙하게 인사를 나눴다.

“새로운 장소에서 뵈니까 느낌도 색다르네요.”

“저희도 적응하는 중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라는 듯이 선우방이 웃으며 난희주에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평소와는 다른 인원 구성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위무사들의 숫자가 늘어난 건 이해가 가지만 다른 부분은 아니었다.

“들어가자. 이제는 응접실이 따로 있거든. 넓기도 하고.”

“궁금하네. 어떻게 꾸며 놓았을지.”

“기대하진 말고.”

“설마.”

난희주가 흠칫했다.

순간적으로 응접실이 어떨지 예상이 되어서였다.

방이라는 게 주인의 성향을 십분 반영할 수밖에 없기에 난희주는 상상이 되었다.

“우리도 어제 도착해서 좀 비어 있는 상태야.”

“되게 검소한 느낌이겠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어.”

반호진이 피식 웃으며 난희주와 백설을 데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그 전에 호위무사들과 시비들이 머물 방도 안내해 주었다.

또르륵.

“진짜 깔끔하네.”

“있을 건 다 있다니까.”

“정말 필요한 것들만 있네.”

반호진이 따라 주는 차를 받으며 난희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검소한 걸 넘어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듯해서였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 거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있을 것만 있으면 되지. 사는데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필요한 게 있으면 그때 사면 되고.”

반호진과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둥글게 앉아 있던 일행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대로 난희주와 백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절대 남자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가 좀 도와줄까? 나 꾸미는 거에는 일가견이 있는데.”

“네 미적 감각은 알지. 근데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오빠가 그렇다면야.”

난희주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주인은 반호진이었다.

그러니 반호진의 뜻대로 하는 게 맞았다.

“근데 엄청 일찍 왔네. 나는 빨라도 며칠 뒤에 올 줄 알았는데.”

“오빠가 문파를 일으켰다는데 당연히 빨리 와야지. 때마침 강서성에 있기도 했고. 아, 이제는 무상문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됐어. 문도도 없는데 문주는 무슨. 당분간은 문도를 받을 생각도 없어. 현판도 없이 지내는 건 좀 그래서 이름을 지은 거야.”

“그래도 일문의 수장인 건 맞지. 아마 곧 오빠가 문파를 세웠다는 거 세간에 다 알려질걸?”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지 않아.”

반호진은 피식 웃었다.

소림사에서 지낼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겠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처음에는 조금 알려질지 몰라도 이내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터였다.

“그것도 맞긴 한데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 오빠가 아는 사람들이 평범한 이들도 아니고. 나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신분이라고.”

“그렇긴 하지.”

“후후후!”

“근데 인원이 꽤 많던데? 평소와는 다르게.”

“안 그래도 오빠한테 할 말이 있어.”

찻잔을 들다 말고 반호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조도 그렇고 분위기가 묘해서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해야지.”

“아까 나랑 백설이 따라오던 아이들 봤잖아.”

“응.”

“누군지 모르겠어?”

의미심장한 얼굴로 난희주가 물었다.

마치 아는지 궁금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반호진은 미간을 좁혔다.

“내가 만난 적이 있어?”

“에휴. 아이들이 서운해하겠다.”

“나랑 만난 적이 있다고?”

“다른 분들은요? 기억 안 나세요?”

진심으로 기억을 못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난희주가 이번에는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일행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봤다.

그러자 다들 눈을 껌뻑거렸다.

모두 반호진과 같은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 모습에 난희주는 물론이고 백설도 살짝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이제 눈치챈 모양이네?”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의 일행들과 달리 반호진이 목소리를 내리깔자 난희주가 눈을 빛냈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제야 알아차린 것 같아서였다.

“산채에서 봤던 아이들이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맞아.”

“그때하고는 모습이 완전 다르니까 한눈에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옷차림은 물론이거니와 피부랑 몸 상태가 다른데.”

반호진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아서였다.

게다가 따로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기에 반호진이나 일행들로서는 못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인정. 근데 오빠의 눈썰미라면 난 처음 보자마자 알아볼 줄 알았어.”

“전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그런데 왜 데려온 거야?”

“내가 데려온 거 아냐. 그렇다고 내가 설명하기도 좀 그렇고. 설아야?”

“네, 소문주님.”

난희주의 뒤에 시립하듯 서 있던 백설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곧바로 응접실을 나섰다.

미리 나눈 대화가 있는지 이름만 불렀음에도 알아서 행동하는 백설의 모습에 반호진은 물론이고 일행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응접실로 백설과 함께 십여 명이 들어왔다.

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 나이 대가 다양했는데 그들을 본 반호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이야. 잘들 지냈어?”

“네. 은인 덕분에 너무나 잘 지냈습니다. 소문주님께서도 잘 챙겨 주셨고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따뜻한 눈빛에 여인들과 소녀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표정과 말투에서 자신들을 기억해 냈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여인들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반호진과 일행들을 향해 절을 했다.

“어어?”

갑작스러운 그녀들의 행동에 서조운이 화들짝 놀랐다.

이렇게 대뜸 절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반호진 역시 놀란 표정으로 난희주와 백설을 번갈아 쳐다봤다.

“구명지은을 갚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세요.”

“허락해 주세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