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40화 (240/468)

제 78장. 무상문(無上門). -04

서조운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뭐 하러 사람을 써. 돈 낭비야. 우리만 지내는데 이 정도면 충분해.”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규모야 차차 늘려 가면 되죠. 어차피 주변 땅도 같이 사셨잖아요.”

“어?”

사마의성의 말에 서조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사실은 몰랐기에 놀란 것이었다.

“맞아. 괜히 남창의 중심지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장원을 지은 게 아냐.”

“역시 형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일단은. 여기서 규모가 더 안 클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곳으로 떠날 수도 있고. 우선은 지내 본 다음에.”

반호진이 뒷짐을 지고서 장원을 크게 둘러봤다.

적당한 높이의 담벼락이 장원을 둘러싸고 있어서 외부의 시선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그리고 깔끔하게 내부가 정돈되어 있었다.

“아니다 싶으면 빨리 떠나는 게 낫지. 텃새가 있긴 하겠지만 설마 너한테 텃새를 부릴 간 큰 곳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있으면 제가 교육시키겠습니다. 모용세가가 왜 십대세가에 속하는지 제가 직접 가르쳐 주겠습니다.”

선우방의 말을 받으며 모용척이 가슴을 탕탕 쳤다.

누구라도 텃새를 부린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모용세가보다는 본가가 낫지. 일단 거리상으로는 선우세가가 훨씬 가까우니까. 근데 강서성에는 별다른 세력이 없어서 딱히 호진이에게 까불 곳은 없을 듯한데.”

“소림사와 척을 질 생각이 아니라면 그러기 힘들죠. 막말로 지금 형님을 일대일로 상대할 수 있는 무인이 얼마나 있다고요. 십대세가도 싸우기 부담스러운 게 형님이신데요.”

서조운이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듯이 말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 텃새를 부리고 싶은 곳은 많겠으나 그걸 실행하는 곳은 없을 터였다.

그러기에는 반호진의 무명이 너무 드높았다.

선우방의 말대로 반호진을 견제할 세력이 딱히 없기도 했고.

“형님. 현판은 일부러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걸 걸어 두신 건가요?”

“응. 내가 직접 새기려고. 서가장처럼.”

물었던 사마의성은 물론이고 선우방과 모용척, 그리고 서조운이 눈을 빛냈다.

서가장처럼이라는 말에서 반호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검으로 새기시게요?”

“응. 내 집이니 주인인 내가 새기는 게 맞겠지.”

스르릉.

서조운의 기대하는 눈빛을 받으며 반호진은 가지고 있던 두 자루 검 중 소천검을 뽑았다.

아무래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만큼 소천검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산하기는 했으나 소림사와는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했고.

스으윽!

저절로 두둥실 떠오른 소천검이 일필휘지처럼 현판에 세 글자를 남겼다.

깔끔하고 통일되게 파여졌는데 음각된 세 글자를 본 일행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상문이라.”

“형님께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현판을 올려다보며 선우방과 서조운이 감상평을 말했다.

다른 이었다면 광오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텐데 반호진이라서 그런지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반호진이 아니면 누가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의미는 없어. 그냥 무상(無上)이라는 뜻이 좋아서 지은 거야. 저렇게 되고 싶기도 하고.”

“이미 되신 거 아니에요?”

“북해빙궁주와 같은 무인이 또 있을 수도 있잖아?”

“그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데요?”

서조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한 대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서였다.

일행들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그렇고 너희들도 아직 젊으니까. 그러니 꿈을 꿔야지. 비록 이루지 못할 꿈이라도 도전은 해야 하지 않겠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첫 번째 가신은 제가 되겠네요!”

“서가장은?”

“물려받는 건 큰형이니까요.”

“네 가문을 일으키겠다며?”

반호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들어 온 말과는 전혀 달라서였다.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인 듯 하나같이 반호진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계획은 늘 바뀔 수 있으니까요.”

“가신이라.”

생각지도 못한 말에 반호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정작 고민거리를 안겨 준 서조운은 해맑게 웃고만 있었다.

“저도 좀 더 배우고서 독립하고 싶어요.”

“너까지 왜 그래?”

서조운에 이어 사마의성도 넌지시 뜻을 밝혀 오자 반호진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딱히 세력을 일구겠다는 생각으로 무상문을 세운 게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런 생각이 있다고요. 바로 시작하자는 건 아니에요. 우선은 자리를 잡는 게 먼저니까요.”

벌써부터 고민할 건 아니라는 듯이 사마의성이 싱긋 웃었다.

지금은 이곳에 잘 안착하는 게 먼저였다.

“참고로 난 일 크게 벌일 생각 없다. 이런 경험도 한 번 해 보고 싶어서 한 거니까 다들 일 벌일 생각은 하지들 마.”

“그런 것치고는 이름이 너무 거창한 거 아냐?”

“이름만 거창한 거야, 이름만.”

선우방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소한 이름은 절대 아니어서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반호진이니까 무상문이라는 이름이 이상하지 않다는 것 정도랄까.

아마 다른 이였다면 무상문이라는 현판을 걸자마자 시비에 휘말릴 게 분명했다.

“내가 보기에는 진짜 무상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문파로 키우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나야 좋지. 근데 그게 뭐 내 뜻대로 되나?”

“이제는 야망을 숨기지 않는구만.”

“꿈은 크게 가져야지.”

선우방을 보며 반호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자 듣고 있던 서조운, 모용척, 사마의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 사람도 반호진과 같은 생각이었다.

“너와 경쟁을 해야 한다니. 이건 좀 겁나는데. 두 녀석들은 든든했는데…….”

선우방이 살짝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모용척과 사마의성이 같은 목적을 향해 노력하는 협력자와 같은 느낌이라면 반호진은 그냥 존재 자체로 벽이었다.

평생을 노력해도 넘을 수 있을까 말까 한.

“경쟁은 무슨. 나는 오대세가에는 관심 없다.”

“응? 진짜?”

“무인과 수장은 엄연히 다르니까. 무인으로서야 내가 일가를 이룰 정도가 된다지만 수장으로서는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했는데. 너 너무 쓸데없이 걱정하는 거야.”

“내가 아는 넌 뭐든지 다 잘하는 녀석이라.”

“돈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게슴츠레하게 쳐다보는 선우방을 보며 반호진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돈도 어쩌다 보니 모으게 된 거지 처음부터 재산이 많았던 건 아니었다.

무명과 함께 어느 순간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뿐.

막말로 소림사의 속가제자이기에 본사에 대한 영향력도 딱히 없는 편이었다.

“왜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있잖습니까, 형님!”

“저도 있어요.”

“모용세가를 빼놓으시면 안 되죠. 저 섭섭합니다, 형님.”

반호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조운과 사마의성, 모용척이 입을 열었다.

하나같이 짐짓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첨언하자면 저는 형님 편입니다. 형님과 선우세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무조건, 고민도 하지 않고 형님을 선택하겠습니다!”

“저도요.”

“이건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아니죠.”

서조운과 사마의성, 모용척의 말에 선우방이 진심으로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선우방은 모용척과 사마의성을 배신자 쳐다보듯 바라봤다.

말을 한순간에 뒤집을 줄은 몰라서였다.

“허!”

“이건 서운해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방이 형. 비교 대상이 애초에 범접불가예요.”

선우방의 매서운 눈초리에도 모용척은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그런데 웃긴 건 서조운과 사마의성 역시 그와 같은 표정이라는 점이었다.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들어가자. 우선 짐부터 풀어야지. 방도 정하고. 방이나 척이는 몰라도 조운이와 의성이는 제법 오래 머물 테니까 방을 신중하게 골라.”

“방이 형은 몰라도 저는 오래 머물 겁니다. 최소한 방이 형보다는 오래요. 방이 형은 곧 가장이 될 수도 있으니까.”

“우리들 중에 첫 번째로 갈 가능성이 농후하죠.”

서조운이 모용척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얼굴 가득 음흉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아직 정해진 거 없거든?”

“곧 확정될 수도 있죠. 팽가주님 추진력을 생각하면.”

“암암.”

마치 편을 가르듯이 서로를 지원하는 서조운과 모용척의 모습에 선우방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하나라면 모를까 둘이 협공을 하자 정신이 없었다.

서로서로 너무 잘 알고 있다 보니까 한마디 한마디가 다 치명타였다.

“척이 너도 안심할 수준은 아닌 거 같던데.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지?”

“어…….”

“우리랑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난다고. 부모님 마음이야 다 똑같고. 나 본가에서 당한 거 봤지?”

모용척이 입을 쏙 다물었다.

신나게 공격할 때는 몰랐지만 당해 보니까 알았다.

진짜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반호진도 부모님 앞에서는 소림검신이 아니라 일개 막내아들이라는 걸 봤기에 모용척은 멋쩍게 웃었다.

“형님께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은 처음 봤어요. 포달랍궁주랑 북해빙궁주에게도 밀리지 않고 맞받아치셨는데.”

“나에게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게 있거든.”

“역시 형님도 사람이셨어요.”

“나도 사람이라니까.”

새삼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서조운을 향해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애초에 부모님은 싸울 수가 없는 상대였다.

싸운다 한들 이미 결과가 나와 있었기에 반호진은 일행들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첫날이라서 그런지 반호진의 마음도 싱숭생숭했다.

그 어떤 일을 겪어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그였지만 새로운 시작은 아무래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모양이었다.

“적응이 안 되네.”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태양이 보였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 살짝 걸쳐져 있는 해를 반호진은 멍하니 바라봤다.

정말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멍을 때렸다.

“시작이라.”

과거로 돌아온 후 반호진은 정말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말은 설렁설렁 살겠다고 했으나 천하사패를 막기 위해서 누구보다 노력한 게 그였다.

그래서인지 반호진은 막상 새로운 곳에 정착했음에도 지금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제이의 삶이긴 하지.”

처음 정신을 차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 있었다.

천하사패를 물리치고 중원무림을 지키겠다는 목표도 달성했고.

그러니 이제는 꿈을 이룰 때가 되었다.

소림사의 반호진이 아닌, 인간 반호진의 삶을 살아갈 때가.

“우선은 무공부터.”

반호진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지필묵을 내려다봤다.

예전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무공을 발전시켰다면 지금은 달랐다.

무상대능력과 달마삼검을 자식이나 제자에게 가르쳐 줄 수 없기에 새로운 무공이 필요했다.

“금광신보와 반가천광수(潘家天光手)를 미리 만들어 둬서 천만다행이지.”

두 무공 다 엄밀히 따지자면 뿌리가 소림사였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천하무공 중 소림사에 뿌리를 두지 않은 무공이 없었다.

반호진이 장담컨대 유사성은 거의 없기도 했고.

아마 먼저 얘기하지 않으면 누구도 금광신보와 반가천광수의 뿌리가 소림사라고 알지 못할 것이었다.

스르륵.

이처럼 반호진은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자신만의 무공을 창안할 계획이었다.

오로지 그와 무상문만을 위한 무공을.

“으음.”

그걸 생각하며 반호진은 막힘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중간중간 틈날 때마다 새로운 무공에 대해 구상을 해 두었기에 지금은 일단 무작정 썼다.

수정은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기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온전히 종이에 담는 데 집중했다.

스스스슥!

무아지경에 빠진 반호진의 손이 폭풍처럼 움직이고 먹물을 충분히 머금은 붓 또한 춤을 추듯 움직였다.

영감이라는 게 원한다고 찾아오는 게 아님을 알기에 반호진은 무서울 정도로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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