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장. 무상문(無上門). -02
“나중에 네가 찾아오면 되지. 나도 간간이 방문할 거고. 아예 떠나는 게 아니니까. 어떻게 보면 자식이 장성해서 독립하는 거지. 그게 자연의 섭리이기도 하고.”
“진짜 놀러 가도 돼요?”
“놀러 오면 안 되지. 수련하러 오는 거면 모를까. 겸사겸사 여유는 누릴 수 있겠지?”
“역시!”
“근데 그 전에 선택부터 받아야 하지 않겠어? 전쟁도 끝났으니 이제 슬슬 사형들이 직계제자를 고를 텐데.”
정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라고 현재 돌아가는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때문에 정현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이에요.”
“왜? 선택을 못 받을까 봐?”
“네에…….”
세상 근심을 다 끌어안은 듯한 정현의 모습에 반호진은 입을 다물었다.
어설픈 위로가 때로는 독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반호진은 진지하게 고민한 후에 말문을 열었다.
“의기소침해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정말요?”
“열심히 노력해 왔잖아? 내가 소림사를 떠나 있는 동안 누구보다 꾸준히 수련한 걸 나는 알고 있어. 남들이 보기에는 지지부진해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보이거든. 네가 노력한 시간들이. 그러니까 그 시간들을 믿어. 노력이 늘 결실을 맺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배신은 하지 않으니까.”
정현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 담긴 한마디에 감동도 받았지만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시간이 갈수록 작아져만 가던 자존심이 불끈거리는 느낌에 정현의 표정이 달라졌다.
“감사합니다!”
“넌 충분히 자격이 있어.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 적어도 나는 네가 노력한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럼 사백님이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시면……. 악!”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속가제자가 본산제자를 어떻게 제자로 받아?”
반호진의 꿀밤에 정현이 두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러나 양손으로 아무리 이마를 비벼도 얼얼한 고통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왠지 사백님은 가능할 것 같아요.”
“아무리 나라도 안 되는 건 안 돼. 아예 불가능한 거라고.”
“히잉.”
“우는 소리 내지 말고.”
“그럼 언제라도 사백님을 찾아가도 되는 거죠?”
여전히 이마를 오른손으로 비비며 정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정현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얼토당토않는 말을 꺼냈는지를 말이다.
“사부님의 허락만 받으면.”
“아싸!”
“근데 올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한창 수련해야 하는 시기인데.”
“사백님께 가는 거라면 허락하실 것 같은데요? 소림검신이시잖아요! 저는 소림권신이 목표예요!”
정현이 다부지게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미래의 권신은 자신이라는 듯이 말이다.
“꿈은 클수록 좋으니까.”
“권신을 목표로 잡으면 최소한 권왕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너 하기 나름이겠지. 권왕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야 권왕이라 불리는 거니까.”
“반드시 보여 드릴게요!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정현이 은근슬쩍 부탁했다.
하지만 그런 정현의 속셈에 순순히 넘어갈 반호진이 아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는 네 사부에게 배워야지. 나는 내 제자를 가르치고.”
“어? 제자를 받으시게요?”
“인연이 닿는다면 받아야지. 자식도 생길 테고.”
“허어. 사백님의 자식이라니. 아들은 몰라도 딸은 되게 안쓰러울 것 같은데요.”
“이게.”
반호진이 두 눈을 치켜뜨자 정현이 움찔거렸다.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꿀밤을 때릴 것 같아서였다.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때리면 얼마나 아픈지 몇 번 겪어 봤기에 정현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헤헤헤. 딸은 아빠를 닮는다고 하잖아요.”
“지금 내 외모 까는 거지? 그것도 대놓고?”
“그게 아니라 한 번쯤은 이 부분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거죠. 아니면 극악의 확률을 기대하든가.”
“안되겠다. 넌 오지 마라. 그냥 본사에만 있어.”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하다니요! 그건 사내대장부가 아닙니다!”
정현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커졌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당황한 것이었다.
“너한테만 사내대장부가 아닌 걸로 하면 되지.”
“어어?!”
“반말은 하지 말고.”
“그, 그게 아니라……!”
“나 올 동안 부지런히 수련하고 있어. 다음에 만났을 때 날 실망시키면 알지? 쥐뿔도 없는 거.”
반호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물론 반은 농담이 섞인 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궁금하기도 했다.
지난 생에서는 마지막의 순간에 함께 있어 주지도 못했고, 죽음도 막아 주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번 생의 정현이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별호를 얻을지가.
‘어떤 것이든 나로서는 다 좋지만.’
그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반호진은 이미 충분히 보상을 받았다.
그렇기에 더는 욕심이 없었다.
한데 반호진의 미소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정현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
복건성 복주 인근의 산골마을에 도착한 서조운이 쉴 새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벽촌도 이런 벽촌이 없어서였다.
딱 봐도 집성촌으로 보이는 마을에 서조운은 신기한 눈으로 살펴봤다.
이런 자그마한 마을에서 소림검신이라 불리는 반호진이 태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일부러 찾아오려고 해도 쉽지 않겠어요.”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해. 진짜 오랜만이거든. 다행스러운 건 길이 바뀌지 않기도 했지만 하나뿐이라서 헤매지 않은 덕분이지.”
“형님께서 정착지를 다른 곳으로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내가 오면 마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거야. 여기는 무인이 없어.”
홀로 납득해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마의성을 보며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지리적으로도 좋지 않지만 그건 반호진에게 있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마을 사람들에게, 평범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었다.
괜히 그가 자리를 잡으면 마을이 시끄러워질 것이기에 애초에 이곳은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근데 방장께서는 이곳을 어떻게 찾아오셨대?”
“저도 그게 궁금해요.”
사마의성을 말마따나 일부러 찾아오려고 해도 쉽지 않은 마을을 둘러보며 선우방과 모용척이 입을 열었다.
제법 많은 곳을 돌아다녀 본 두 사람이었으나 여기처럼 궁벽한 곳은 처음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지. 인간이 거의 망가뜨리지 않은 곳이니까.”
“평화로워요.”
서조운, 선우방, 모용척과는 다른 감성을 지닌 사마의성이 눈을 반짝였다.
세 사람에게는 지루하고 별 볼일 없는 풍경일지 모르나 사마의성은 달랐다.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사마의성은 개인적으로 좋아했다.
“산골마을의 매력 중 하나지.”
농번기가 진즉에 끝났기에 볼거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풍경이 있었기에 반호진은 웃으며 어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워낙에 오랜만이다 보니 반호진도 어색해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돌담조차 없이 훤히 드러나 있는 소박한 단층 목조건물을 향해 반호진이 다가갔다.
총 세 채의 작은 건물이 모여 있는 모습이었는데 그중 가운데 모옥에서 왠지 모르게 익숙함이 느껴지는 부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응?”
“아이고, 호진아!”
사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반호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과 달리 중년 여인은 단박에 반호진을 알아봤다.
헤어진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단번에 막내아들을 알아봤던 것이다.
“어? 진짜?”
“이 사람 좀 보게. 어떻게 막내를 못 알아봐요?!”
“진짜 호진이라고?”
확신 어린 중년 여인과 달리 중년인은 긴가민가하는 기색이었다.
아내의 말을 섣불리 믿지 못했던 것이다.
“벌써 귀가 먹었어요? 방금 전에 호진이가 아버지, 어머니라고 했잖아요!”
“아!”
“맞습니다. 아버지. 저 막내아들 호진입니다.”
만나자마자 싸우는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반호진은 웃었다.
진짜로 싸우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어서였다.
오히려 금슬이 좋아 보였기에 반호진은 자연스레 미소가 맺혔다.
“허어!”
“잘 왔다, 잘 왔어. 아이고, 내 새끼.”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부친과 달리 모친은 대뜸 반호진의 손을 잡고서 연신 손등을 쓰다듬었다.
어릴 적 떠나보낸 후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모친은 주름진 손으로 반호진의 손을 꽉 붙잡았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괜찮다. 네 소식은 표사분들이 다 알려 주었어. 얼마 전까지 큰 전쟁이 있었다며? 새외에서 쳐들어왔다고.”
“네.”
“어디 다친 곳은 없고?”
“보시다시피 멀쩡해요.”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모친이 반호진의 몸 곳곳을 살펴봤다.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였으나 무인들은 내상도 심심찮게 입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더더욱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이었다.
“내상이라는 걸 당한다고 하던데?”
“소림사에서 만드는 내상약이 효과가 좋거든요. 진즉에 챙겨 먹었죠.”
“잘했다, 잘했어.”
“아, 여기는 제 일행들이에요. 친구도 있고, 동생들도 있어요.”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손님들이 오셨는데.”
반호진의 말을 듣고서야 일행들이 있다는 걸 깨달은 모친이 황급히 사과했다.
손님이 찾아왔는데 인사도 하지 않고 기다리게 만들었기에 얼굴 가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호진이를 만나셨는데 당연히 저희가 기다려야지요.”
“그래도 죄송해요.”
“정말 괜찮습니다. 그리고 말씀 편히 하세요. 호진이의 어머님이신데.”
“어, 그건…….”
모친이 말끝을 흐렸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가문의 자제처럼 보였기에 한낱 촌부의 부인인 자신이 말을 놓아도 되나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냥 제 친구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맞습니다. 선우방이라고 합니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형님의 첫 번째 의동생! 서조운입니다!”
“처음 뵈어요, 어머님. 저는 사마의성이라고 해요.”
“안녕하십니까! 형님의 진짜 첫 번째 의동생! 모용척입니다!”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행들이 인사를 해 오자 모친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다들 잘생기고 부유한 가문의 자제처럼 보였기에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반면에 부친은 일행들의 이름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마른침을 삼켰다.
“편히 대해 주세요. 아들 친구랑 동생들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그래도 되겠니?”
“물론이죠.”
연이은 선우방의 부탁에 모친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여, 여보. 일단 방으로 들어갑시다. 손님을 이렇게 밖에 세워 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다 들어갈 수 있을까요?”
남편의 말에 모친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집이 크지 않기에 걱정하는 것이었다.
“저희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붙어 앉으면 돼요!”
공간을 걱정하는 부부에게 서조운과 사마의성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노숙을 밥 먹듯이 했던 그들에게 좁은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더구나 반호진의 부모님이었기에 두 사람뿐만 아니라 일행들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래도 손님이신데…….”
“정말 괜찮아요. 근데 형들은요?”
“겨울이라고 둘 다 성도에 가 있다. 말은 필요한 게 있어서 나간다고 하지만, 뻔하지. 놀러 나간 게지.”
눈치를 살피는 모친의 모습에 반호진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부친이 투덜거렸다.
밖을 싸돌아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였다.
“한창 혈기왕성할 때니까요.”
“어째 너보다 더한 거 같아. 아주 그냥 세상 무서운 거 없이 돌아다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