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37화 (237/468)

제 78장. 무상문(無上門). -01

갑작스럽게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담현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막내제자의 방문은 언제라도 환영이었기에 담현은 자리를 권한 후 직접 차를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결혼식은 잘 끝났고?”

“예. 행복해 보였습니다.”

“별다른 감흥은 없었고?”

담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반호진은 유도 질문에 넘어가지 않았다.

“잘 어울렸습니다.”

“화제는 귀신같이 잘 돌린다니까.”

“아직 멀었습니다, 사부님.”

“천룡은 이미 가정을 이루지 않았더냐. 선우 공자도 내년에는 갈 듯싶은데.”

“그럴 것 같습니다.”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반호진도 눈치라는 게 있었다.

나름 비상한 편이었기에 늦어도 가을이 되기 전에는 좋은 소식이 들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동갑내기들이 하나둘 가면 너도 슬슬 압박감을 받을게야.”

“친구들이 간다고 저도 따라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말은 참 잘해.”

찻잔을 든 채로 담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어렸을 때부터 느꼈었지만 입심만큼은 정말 남다른 게 반호진이었다.

머리 회전도 이런 쪽으로는 아주 비상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다 나았다. 내 나이를 생각하면 회복이 빨리 된 편이지.”

“그래도 좀 더 요양을 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너무 움직이지 않는 것도 좋지 않아. 적당히 움직여 줘야 근육도 유지가 되지. 계속 누워 있으면 몸만 빨리 늙는다.”

담현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자신의 몸은 그가 잘 알았다.

더구나 소림사의 상황을 생각하면 마냥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분간은 계속 신경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연세가 적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나 정정하다. 곧 쓰러질 몸 아니야.”

“조심하고 챙겨서 나쁠 건 없잖습니까.”

“잔소리는 그쯤 하고. 그래,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후르릅.

담현의 물음에도 반호진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모금도 들이켜지 않았던 차를 이제야 조금 들이켰다.

적당한 온도와 그윽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우자 정신이 맑아졌다.

“하산을 하려 합니다.”

“흐음. 결정을 내린 모양이구나.”

“짐작하셨습니까?”

“너는 속가제자이지 않더냐. 숭산보다는 속세에 있어야지. 그게 정상이기도 하고. 게다가 이젠 다 크지 않았더냐? 네가 장가가는 걸 보기 위해서라도 하산하길 부추겨야지.”

갑작스러운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담현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반호진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듯 장난기 섞인 얼굴로 지지해 주었다.

“그게 이유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지. 나라고 네 자식을 보고 싶지 않겠더냐? 네 말대로 내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고.”

“으음!”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느낌에 반호진이 침음을 흘렸다.

그러자 담현이 해맑게 웃었다.

이제야 제대로 한 방을 먹인 것 같아서였다.

“꼭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네가 하산을 결심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사부로서 당연히 제자를 응원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자식이 다 자라면 부모의 품을 떠나듯이 너도 너의 길을 가야지.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헤어지는 게 씁쓸하지만 그렇다고 다 큰 제자를 언제까지고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

“죄송합니다.”

“이게 왜 죄송할 일이냐. 오히려 좋은 일이지. 이제야 소림사를 떠나 네 길을 가는 것인데. 다만 이것 한 가지는 꼭 말해 주고 싶구나. 언제든지 돌아와도 된다. 소림은 너의 제이의 고향이니까.”

담현이 얼굴 가득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보다 반호진에 대해 잘 알기에 실패하거나, 적응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바라는 건 소림사가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으면 했다.

힘들고 지칠 때 생각나고, 돌아오고 싶은 곳으로.

“저는 늘 소림사를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만. 그런 녀석이 내원이 아닌 밖에 거처를 만들어?”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되면 안 되니까요.”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잘한 것 같다. 널 보겠다고 수백 명이 찾아올 테니. 지금이야 다들 전력을 복구하는 데 정신없다지만 시간이 흐르면 아마 이런저런 이유로 널 찾아올 거다.”

이제는 누구도 반호진의 실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속가제지이고 나이도 젊으니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숫자로 반호진에게 달려들 게 분명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식으로 달려드는 이들도 수두룩할 테고.

그래서 담현은 조금 안쓰러운 눈빛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그럴 것 같아서 최대한 밝히지 않으려고요.”

“나에게도 말 안 해 줄 것이냐?”

“그럴 리가요. 지금은 후보지가 세 곳 정도 되어서 정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집에 다녀올 생각이에요.”

“잘 생각했다. 안 찾아뵌 지 오래됐지?”

“예. 전쟁으로 인해 찾아갈 겨를이 없었죠.”

담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게 변명이 아님을 잘 알아서였다.

철혈성부터 시작해서 구천문, 포달랍궁, 북해빙궁까지 반호진은 정말 쉬지 않고 달려왔다.

오로지 중원무림의 평화를 위해서 말이다.

그걸 알기에 담현은 반호진을 나무랄 수 없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한 게 사실이었으니까.

“오랜만에 고향에 가서 푹 쉬는 것도 좋겠구나.”

“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다 같이 가는 것이냐?”

“아직 일행들에게 말은 하지 않았는데, 적어도 조운이와 의성이는 따라갈 것 같아요. 이륭이는 방천문주님과 함께 강호유람을 떠날 계획이고요.”

“좋은 생각이야.”

건강할 때 제자와 함께 강호를 돌아다니는 것도 좋은 추억이었다.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지도 몰랐기에 담현은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대사형이 방장이 되면 사부님도 저와 함께 강호유람을 떠나시죠. 마음 편히 소림사를 떠나 본 적이 없으시잖아요.”

“그렇긴 하지.”

“어떻게 보면 수행이기도 하고요.”

담현이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꼭 유람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을 둘러보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선행을 할 수도 있었고.

거기다 반호진과 단둘이 무언가를 한 적이 없기에 담현의 마음이 확 기울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솔깃하기는 하구나.”

“인생이 짧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때쯤이면 저도 자리를 잡았을 것 같고요. 어쩌면 자식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허어.”

자식이라는 말에 담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단둘이 떠나는 것도 좋지만 반호진의 아이들과 함께한다면 그보다 더 기쁠 것 같았다.

배분상으로 보면 손주들이나 마찬가지였고.

“표정이 너무 달라지시는 거 아닙니까?”

“상상만 해도 기쁘구나. 너의 자식을 내가 안게 된다면.”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건만 담현은 벌써부터 아이를 안는 것처럼 팔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활짝 웃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앞서가시는 거 아닙니까? 저 아직 혼례도 안 올렸습니다.”

“허허. 상상도 못 하느냐? 나는 이왕이면 많이 낳았으면 좋겠다. 능력이 모자란다면 모를까, 지금 모은 재산도 상당하지 않더냐? 앞으로는 더 늘어날 테고. 부족하다면 내가 어떻게든 마련할 수도 있다.”

“저 그렇게 무능력한 제자 아닙니다.”

“손주들에게 용돈은 줄 수 있지. 아무리 불제자라지만 그래도 손주들을 위해서라면 지금부터라도 사비를 모을 수 있다.”

농담기라고는 전혀 없는, 순수하게 진심인 담현의 모습에 반호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말하면서 뒤늦게 담현이 돈의 필요성을 깨달았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였다.

“너무 가셨습니다.”

“생각해 보니 너무 대비를 안 해 놓았어. 너도 언젠가는 자식을 볼 텐데. 허어.”

“사부님?”

이미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듯 반호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담현의 모습에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의 모습을 보아하니 더 말한다고 한들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반호진은 조용히 차를 들이켰다.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구나.”

“그건 좋은 일이네요. 저는 사부님께서 만수무강하셨으면 좋겠거든요.”

“암. 네 아이들을 보려면, 품에 안고 자라는 걸 보기 위해서라면 건강해야지.”

여전히 진담인 담현의 말에 반호진은 어이가 없었으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는 의미가 있어서 나쁠 건 없어서였다.

“당장은 자리를 잡고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할 생각입니다.”

“당분간은 혼인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정확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교제는 하거라. 좋은 시절이지 않더냐. 청춘은 돌아오지 않는단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이번 생에서는 다른 삶을 살기로 맹세했기에 반호진도 연애를 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우선순위를 정해 놓은 것뿐이었다.

지금 중요한 게 이것이기에 연애는 차근차근 할 계획이었다.

아직 확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없기도 했고.

“그래. 그거면 되었다. 다 때가 있는 법이니.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는 게 사랑이니라.”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불제자라고 사랑을 모르는 건 아니다. 사랑의 범주에 꼭 남녀 간의 사랑만 있는 건 아니니까.”

“맞습니다. 저도 사부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언제 떠날 생각이더냐?”

반호진의 추진력을 알기에 담현은 내심 짐작했다.

결정을 내렸으니 그리 긴 시간을 머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짐도 정리해야 하고 대사형을 비롯해서 여기저기에 인사도 해야 해서 그게 다 끝나면 하산하려고 합니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나를 찾아오너라.”

“감사합니다.”

“아직 해 주지도 않았는데.”

담현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에는 늘 그렇듯이 따스함과 인자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사백님!”

“나 아직 귀 안 먹었다.”

“어떻게, 어떻게 저에게 한마디도 안 해 주실 수 있으세요!”

“지금 말하려고 했어.”

“거짓말!”

눈물을 글썽이며 달려온 정현이 버럭 소리쳤다.

지금의 발언이 거짓말임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너도 바빴잖아. 이래저래.”

“으윽!”

“근데 이게 울 정도의 일인가?”

“안 울었거든요!”

언제 눈시울이 촉촉해졌냐는 듯이 정현이 씩씩하게 소리쳤다.

순식간에 소매로 눈가를 닦으면서 말이다.

“뭐, 그렇다고 치고. 근데 아침부터 왜 이렇게 소리를 쳐? 독송을 할 때는 개미 목소리로 하면서.”

“놀랐으니까 그렇죠.”

“놀랄 게 뭐 있어? 속가제자가 하산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사백님은 평범한 속가제자가 아니잖아요. 소림사의 대들보! 앞으로의 미래!”

“그건 대사형과 너의 몫이고.”

반호진이 단호하게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그 역시 귀가 있기에 이런 말을 듣기는 했으나 누가 뭐래도 소림사를 대표하고 지키는 건 본산제자들이었다.

“책임전가인 건가요?”

“그럴 리가. 현실적인 부분을 말해 주는 거지. 나도 소림사의 제자인 만큼 본사가 위험에 빠지면 언제라도 달려올 거야.”

“히히히!”

“그리고 영영 이별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서운해 해?”

“헤어지는 건 사실이잖아요.”

다른 이들보다 자주 본 만큼 반호진과의 유대관계는 깊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다른 일행들과도 친해졌는데 이제는 헤어져야 했기에 정현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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