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장. 새로운 시대로. -03
반호진에 이어 상일기도 정중히 포권을 하자 서이경이 얼굴 가득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연배는 물론이거니와 무명도 드높은 상일기가 너무 과하게 예의를 차리자 어쩔 줄을 몰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두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보면 당대의 천하십대고수급 무인 두 명이 눈앞에 있는 것이었기에 둘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었지만, 편히 대해 주십시오, 상 대협. 이러시면 제가 많이 불편합니다. 제 아들들이 얼굴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허허허. 노력해 보겠습니다.”
초면이 아니기에 서이경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말에 기분 나빠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였다.
상일기와 좀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 말씀은 지난번에도 하셨던 것 같은데요.”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반 공자에게 지금도 말을 놓지 못하고 있거든요.”
“허.”
서이경은 물론이고 두 아들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함께한 시간이 꽤 오래된 걸로 알고 있는데 여전히 말을 놓지 않았다고 하자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상일기나 반호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사람마다 다 성격이 다르니까요. 저야 불편한 건 없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긴. 중요한 건 서로가 편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반호진과 상일기를 번갈아 쳐다보며 서이경이 주억거렸다.
서로가 괜찮다는데 제삼자가 왈가왈부하는 것도 웃겼기에 서이경은 이쯤에도 마무리 짓기로 했다.
“아버지. 선우세가나 모용세가는 도착했어요?”
“아직. 내일쯤 도착할 듯싶은데?”
“그래요?”
“둘 다 꽤 먼 곳에 있으니까. 이 정도면 상당히 빨리 온 거지. 거의 초대장을 받자마자 출발한 건데.”
“당연히 와야죠. 제가 직접 초대했는데.”
서조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번 전쟁으로 선우세가와 모용세가의 명성이 높아졌다고 하나 그간의 의리를 생각하면 당연히 와야 했다.
게다가 서가장도 더 이상 예전의 서가장이 아니었다.
단순히 건물만 보수한 게 아니었기에 모용세가나 선우세가로서도 이번의 방문이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꼭 너 때문에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최소 오 할 정도는 저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서이경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 살짝 과한 자신감 같아서였다.
물론 소가주인 선우방, 모용척과 가까운 사이라고는 하나 꼭 그 이유만으로 두 사람이 서가장을 방문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진짜 서조운 때문이었다면 선우청과 모용궁까지 올 리가 없었다.
“왜 이러세요? 저 강호에서 염룡이라 불리는 무인이에요.”
“그렇긴 하지. 손꼽히는 후기지수니까.”
“엣헴!”
서이경의 인정에 서조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거들먹거리는 게 아니라 사실이었기에 서조운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근데 그게 너 혼자 이뤄 낸 게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
“물론이죠. 저 그렇게 막돼먹은 놈 아닙니다.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남자입니다!”
“그래. 알면 됐다. 이거 제가 손님을 너무 오랫동안 세워 두었네요. 들어오시죠. 구조는 보수하기 전과 동일한데 새로운 전각들이 좀 생겼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서이경이 일행들을 안으로 들였다.
얼굴 가득 미안한 기색을 띠고서 말이다.
“괜찮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니고요. 또 볼거리도 있고.”
“역시 문주님께서도 한눈에 알아보시네요. 반 공자도 바로 알아보던데.”
“그럴 수밖에 없지요. 눈에 딱 들어오니까요.”
살짝 놀란 듯한 서이경의 목소리를 들으며 상일기가 다시 한번 현판을 올려다봤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현판이었으나 그 안에는 서가장 가전무공의 정수가 온전히 담겨 있었다.
“그게 왜 저한테는 보이지 않았을까요.”
“괜찮아요, 아버지. 저도 그랬으니까요.”
“전혀 위로가 안 되는구나.”
“안 되면 될 때까지 노력하면 되죠.”
“그렇긴 하지.”
잠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던 서이경이 애써 음울한 기색을 털어 내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일행들을 이끌고 장원을 안내했다.
“많이 달라졌죠?”
“그러게.”
다른 일행들은 서가장이 처음이지만 반호진은 달랐다.
거의 허물어져 가던 장원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반호진은 새삼 뿌듯함을 느꼈다.
서가장의 변화가 그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긍정적인 변화에 반호진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제가 피땀 흘려서 번 돈이 다 여기로 들어갔어요.”
“커험!”
예상치 못한 말이어서일까.
당혹성이 가득 담긴 기침이 서이경에게서 터져 나왔다.
동시에 정이륭과 사마의성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막기 위해서였다.
“왜요?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나, 나중에 다 갚으마.”
서이경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전부 다 사실이어서였다.
“에이. 안 갚으셔도 돼요. 저한테 쓰신 돈 많잖아요. 그거 갚은 거예요. 아직 갚아야 할 게 더 남아 있기도 하고.”
“이제 충분해.”
“제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요. 앞으로 더 많이 벌 자신도 있고요. 형님 옆에만 붙어 있으면 돈과 명성은 알아서 따라올 거예요.”
서조운이 확신하듯 말했다.
그런데 웃긴 건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당장 이 자리만 하더라도 반호진 덕을 본 사람이 서조운 말고도 셋이나 더 있었기에 다들 옅게 웃기만 했다.
“개인적으로 저는 보기 좋습니다. 앞으로 더 잘됐으면 좋겠고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당연히 와야지요. 서가장의 일이지 않습니까. 조운이의 말대로 남이 아니니까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서이경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그는 고마웠다.
반호진 정도쯤 되면 얼마나 많은 곳에서 초대장을 보내는지 알고 있어서였다.
“저곳인가요? 저희가 머물 곳이.”
“아, 예! 맞습니다. 따로 준비한 별채입니다. 이번에 새로 지었는데 특별한 손님이 오실 때만 내어드리려고 특히 신경 써서 만들었습니다.”
감사 인사만 계속 받았기에 반호진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처음 보는 건물이기도 했고.
“딱 봐도 좋아 보입니다.”
“들어가시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권위적인 모습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서이경이 환하게 웃으며 반호진을 안내했다.
***
과거의 성세를 서서히 회복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나 서가장에 대해서 아는 이보다 모르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섬서성 전투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사실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워낙에 내로라하는 문파들과 무림세가들이 참여해서였다.
그래서 소장주의 혼례식이라고 하나 기껏해야 태곡현 인근의 지역 유지 정도만 참석할 줄 알았는데 반호진과 상일기가 떡하니 앉아 있자 모두가 경악했다.
“지, 진짜인가?”
“그럼 가짜겠나? 염룡이 서가장주의 막내아들인데. 그리고 그 막내아들의 목숨을 살려 주고 염룡으로 키운 게 소림검신이지 않나.”
“허어.”
명왕이라 불리며 당당히 천하십대고수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일기도 같이 앉아 있었으나 대부분의 시선은 반호진에게 향해 있었다.
젊은 나이에 무림을 평정한 이가 반호진이기에 아무래도 상일기보다는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믿기지가 않는군. 소림검신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나도 마찬가지일세.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안 온 이들은 땅을 치고 후회하겠군.”
무림에서 실력 못지않게 중요한 게 인맥이었다.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게 인맥이었기에 초대장을 받고도 참석하지 않은 이들은 나중에 이 소식을 들으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게 분명했다.
“후회도 후회지만 중요한 건 안면을 트느냐, 마느냐지 않겠나. 얼굴만 본다고 인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통성명도 하고 친분도 나눠야지.”
“문제는 그게 쉽지 않을 거라는 점이지.”
속닥거리던 중년인들이 똑같이 입맛을 다셨다.
마음이야 당장 반호진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싶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소림검신이라는 별호가 섣불리 다가가는 걸 막아 세워서였다.
거기다 반호진이 앉아 있는 커다란 원탁에는 모용궁과 선우청이 있어 더더욱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물꼬만 트이면 되는데.”
“그게 어려우니.”
“딱 한 번. 딱 한 번이면 되는데.”
마치 잡상인의 접근을 불허하겠다는 듯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두 눈을 부라리는 듯한 두 가주의 모습에 근방 군소방파의 수장들이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두 눈을 서슬 퍼렇게 뜨고 있으니 다가가고 싶어도 다가갈 수가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 수는 없었기에 앉아 있는 이들의 눈알이 쉴 새 없이 굴러갔다.
혹시라도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기 위해 다들 기다리는 것이었다.
“응?”
“저 사람은……!”
그때 연회장의 입구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헌칠한 키에 누가 봐도 부티가 나는 청년이었는데 그를 본 몇몇 사람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연회장에 나타나서였다.
“왜 그러나?”
“저자가 누구인데 그러는가?”
“그, 금가장의 소장주일세!”
“허!”
금가장의 소장주라는 말에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렸다.
만나고 싶어도 쉽사리 만날 수 없는 거물의 등장에 소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거물급 손님은 금호연이 끝이 아니었다.
뒤이어 면사로 얼굴을 반 이상 가린 난희주가 모습을 드러내자 연회장이 시끄러워졌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장주님! 그리고 소문주님!”
서이경은 다른 하객들을 상대하고 있었기에 금호연과 난희주는 서조운이 반겼다.
실질적으로 초대장을 보낸 게 서조운이기도 했고.
한데 선물은 보낼지 몰라도 직접 올 줄은 몰랐기에 서조운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안 올 줄 알았나 봐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네. 제 혼례식이라면 모를까 큰형의 혼례식이라 선물만 보내 주시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서운한데요. 저는 나름 서 공자님과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장난스럽게 물었던 난희주가 짐짓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을 내리깔며 슬프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서조운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많이 바쁘실 것 같아서요!”
“아무리 바빠도 경조사에는 참석을 해야죠. 안 본 지도 제법 됐잖아요.”
“그렇긴 하죠.”
상냥한 난희주의 목소리에 서조운이 어색하게 웃었다.
고마움 반, 미안한 마음 반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또 서 공자님과 다른 분들이 걱정이 되기도 했고요. 다들 심하지는 않지만 다치셨다고 들었거든요.”
“방천문주님만 빼고 다 회복했습니다. 아직 젊으니까요.”
“그래 보여요.”
난희주가 싱긋 웃었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다들 괜찮아 보였다.
한동안 요양이 필요하다는 상일기도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고.
“저도 난 소저와 같은 생각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이런 날에는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감사합니다.”
“난 소저도 그렇지만 저 역시 이곳이 처음이 아니라 내심 궁금하기도 했고요. 많이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금호연이 주변을 둘러봤다.
예전에 찾아왔을 때와 비교하면 상전벽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느낌도 잃지 않았다.
“앞으로 더욱 커질 겁니다. 과거의 성세를 회복하는 걸 넘어 무림을 호령하게 만들 거거든요. 제가 말이죠.”
“서 공자님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만드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자신만만한 서조운을 보며 금호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보여 준 서조운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만들 것 같아서였다.
“허어.”
“삼 공자와도 저렇게나 가깝단 말인가?”
한편 금호연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서조운의 모습에 힐끔거리던 이들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 정도로 친근한 사이일 줄은 몰랐기에 다들 놀라면서도 부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