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장. 새로운 시대로. -02
모두의 시선이 서조운에게로 향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좌중의 눈치를 보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어, 저도 사실 형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왜? 너도 서가장에 가 보게? 전쟁도 끝났으니 인사드릴 때도 되긴 했지. 서찰만으로는 좀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기도 하고.”
막내인 데다가 거의 죽다 살아나다시피 한 게 서조운이었다.
더구나 포달랍궁, 북해빙궁과 전쟁까지 치렀으니 부모로서 걱정이 안 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본가에 가긴 갈 건데 형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한테?”
“예. 정확하게는 아버지께서 한번 여쭈어보라고 하셨는데.”
“내가 뭐라고 여쭈어봐? 단어 선택이 좀 이상하다?”
반호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를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단어가 이상해서였다.
마치 한참이나 어른인 상대에게 물어보는 듯한 말투에 반호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에이. 비공식적 천하제일인이 형님이시잖아요.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알고 있어요. 형님이 당대의 무인들 중 가장 앞에 있다는 사실을요.”
“그건 모르는 거지.”
반호진이 능청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가장 강한 무인들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거라면 모를까 천하제일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서조운은 그런 반호진의 대답에도 음흉하게 웃었다.
“꼭 붙어 봐야 아는 건 아니잖아요.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가능하고.”
“잡설이 기네. 본론.”
이런 쪽의 이야기는 길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반호진이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서조운이 못 이기는 척 넘어갔다.
“저도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놀라긴 한데 큰형이 이번에 혼인을 한답니다. 그래서 형님을 초대하고 싶은데 혹시 일정이 가능한지 물어보라고 하셨어요.”
반호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몇 차례 만났던 소장주 서정운을 떠올렸다.
“아직 결혼 안 하셨나?”
“어, 조금 노안이라서 그렇지 큰형도 젊어요. 이제 스물셋이에요.”
“장가갈 나이이기는 하네.”
“시기가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요. 제가 보기에는 승전보를 듣자마자 바로 날짜를 잡은 것 같아요.”
“혼처가 좋은 곳인가 보다. 그 말은 놓치기 싫다는 뜻 아냐?”
반호진의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사마의성과 정이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
일종의 합리적의심이라고나 할까.
“명문세가이긴 해요. 십대세가에 속한 곳은 아니지만요.”
“정략결혼인가?”
“저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 그렇지 않을까요? 보통 무림세가의 후계자들은 정략결혼을 많이 하니까요. 당장 저만 하더라도 혼담이 많이 들어오기도 하고.”
서조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큰형과 달리 그에게 직접적으로 들어오는 혼담은 말 그대로 급이 달라서였다.
그래서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 말하든 서정운에게는 자랑으로 들릴 수밖에 없어서였다.
“서가장이 있는 산서성 태곡현과 숭산이 그렇게 먼 건 아닌데 말이지.”
“아무래도 얼굴을 보며 직접 말씀해 주시려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 서가장의 경사인데 당연히 가야지. 초대까지 해 주셨는데.”
“정말요?”
“딱히 할 일도 없잖아?”
눈에 띄게 좋아하는 서조운의 모습에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이륭이야 상일기와 함께 강호를 둘러본다지만 반호진은 정말 할 일이 없었다.
천하사패라 불렸던 모든 곳들을 물리쳤기에 이제는 급한 일도 없었다.
최우선적인 목표를 달성했기에 일단 현재는 여유로웠다.
“저도 참석하겠습니다. 형님 말씀대로 조운이의 큰형께서 혼인을 하는데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저 역시 급한 일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난 자연스럽게 참석이야. 형님이 가시면 나도 당연히 따라갈 수밖에.”
일정이 따로 잡혀 있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이동할 계획이었기에 정이륭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사부인 상일기도 상황을 설명하면 갈 게 분명하기도 했고.
거기에 사마의성이 바늘이 가면 실도 따라간다는 듯이 말을 이어받았다.
“넌 당연히 와야 하는 거 아냐? 나랑 친구인데.”
“너와 형님을 선택해야 한다면 난 당연히 형님이지.”
“와, 말 섭섭하게 하네.”
“넌 아냐?”
“사실 나도 그래.”
서조운과 사마의성이 서로를 보며 키득거렸다.
그 모습에 반호진과 정이륭은 실소를 흘렸다.
“방이랑 척이에게는 연락했어?”
“가장 먼저 형님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아직 전서구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형님이 가신다고 하면 두 형이야 알아서 본가에 찾아올 테니까요.”
“지금 이 말 들으면 둘 다 서운해하겠다.”
“안 그럴걸요? 그냥 그러려니 할 거예요.”
서조운이 씨익 웃었다.
자신이 이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어떤 반응이 나올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이 되었다.
“언제 출발해야 해?”
“형님 말씀대로 본가까지 그리 멀지 않아서 천천히 출발해도 될 것 같아요.”
“그래도 미리 가 있어야지. 우리야 외부인이지만 넌 가족인데. 각자 준비해서 모레 아침에 출발하는 것으로 하자. 방천문주님께서도 아직 몸이 편찮으시니까.”
“알겠습니다.”
서조운과 정이륭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리고 사마의성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경로를 짰다.
아무래도 부상자가 있는 만큼 노숙보다는 객잔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상일기만큼 심한 건 아니지만 반호진도 아직 내상이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
“의성이는 벌써 경로 짜는 모양이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니 노숙하지 않고 전부 객잔에 머물게요. 그래서 객잔이 있는 마을 중심으로 경로를 짜고 있어요.”
“맞아. 우리가 번 돈이 있는데 이제는 좀 써야지. 그동안 너무 저축하기만 했어. 그러니 이참에 축의금도 두둑하게. 알지?”
서조운이 사마의성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크게 기대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사마의성은 코웃음을 쳤다.
“네 결혼도 아닌데 웬 두둑이? 적당히 할 거야, 적당히.”
“허어. 사람 서운하게시리.”
“적당하면 됐지, 뭘. 내가 가 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
“매정하다, 매정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마의성의 표정에 서조운이 입맛을 다셨다.
더 말해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였다.
“넌 얼른 가서 선우세가나 모용세가에 보낼 서신이나 작성해.”
“뉘에뉘에.”
서조운이 일부러 과장되게 대답했다.
하지만 서조운의 도발에도 사마의성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쓸데없는 대화에 시간을 낭비하느니 일정을 짜는 게 더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이라. 선물은 무얼 사 가야 하나.”
“에이. 선물은 무슨 선물이에요. 형님이 혼례식에 와 주시는 것만으로도 큰형에게는 크나큰 선물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이에요. 안 그래요, 이륭이 형?”
“부정하지 못하겠네.”
정이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도 서조운과 같은 생각이었다.
서정운에게는 반호진이라는 존재 자체가 선물일 터였다.
“흰소리는 그만하고. 축의금이나 두둑하게 준비해야겠네.”
선물을 준비하는 것보다는 돈이 훨씬 편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어정쩡한 선물보다는 차라리 두둑한 축의금이 나을 수도 있었다.
***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에 반호진은 홀로 호롱불 하나를 밝혀 놓고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후르릅.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라 그런지 살짝 열어 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밤공기가 찼다.
그런데 그 찬바람이 반호진의 머리를 맑게 만들어 주었다.
“무사히 끝냈어.”
전쟁이 끝난 직후 수뇌부의 의견은 갈렸다.
북해빙궁은 몰라도 구천문과 포달랍궁에는 응징을 해야 한다는 쪽과 괜히 무리해서 원정을 갈 필요는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나뉘었다.
양측 다 일리가 있었기에 결론은 뿔뿔이 흩어진 지금까지도 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반호진은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그의 목표는 천하사패로부터 중원을 지켜 내는 것이었고, 그 목표는 지금 충분히 이룬 상태였다.
때문에 반호진은 어느 쪽으로 결정이 나든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후련하네.”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으나 중요한 건 전생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더할 나위 없는 결과로.
지난 생에서는 아등바등 싸워서 동귀어진이었는데 이번에는 부상을 입긴 했어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반면에 북해빙궁주는 물론이고 포달랍궁주도 같은 날에 죽었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근데 기분이 묘하네.”
싸늘한 날씨 때문인지 빠르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반호진이 중얼거렸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안 순간부터 그는 오로지 천하사패의 침공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달려왔다.
한데 그걸 이루자 묘한 공허감이 반호진에게 찾아왔다.
“목표를 이루어서 그런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반호진이 중얼거렸다.
동시에 처음 과거로 돌아온 날, 스스로에게 했던 맹세를 곱씹었다.
“어?”
그러다가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말을 말이다.
더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늘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번 생은 즐기면서 살기로 했지.”
반호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잊고 있었던 걸 떠올리자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맺힌 것이었다.
더해서 머리가 맑아졌다.
“하나의 목표를 이루었으면, 다음 목표로 나아가야지. 그게 없다면 찾아야 하고, 찾았다면 다시 달려야지.”
누가 뭐래도 반호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건 소림사였다.
그런 소림사를 지켜 냈으니 이제는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 차례였다.
“떠날 때가 됐네.”
***
산서성 태곡현의 한 장원 앞에 도착한 반호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반호진이 놀란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서조운이 씨익 웃었다.
“완전 달라졌죠?”
“그러게. 위치는 똑같은 거 같은데.”
“싹 다 보수했어요. 팔았던 주변의 땅도 다시 샀고요. 그래도 현판은 그대로예요.”
“보면 알지.”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현판을 올려다봤다.
조금 과장해서 번쩍거리는 대문과 달리 오랜 세월과 풍파가 느껴지는 현판은 어울리지 않고 확 튀는 느낌이었으나 그럼에도 반호진은 현판이 저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직 형님께서만 저 현판의 가치를 알아봐 주셨죠. 본가의 검법과.”
“나라서 알아본 게 아니라 나 정도 실력쯤 되면 그냥 보여.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그 정도 수준에 다다른 무인은 천하에서 열 명 안팎이잖아요.”
서조운이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다른 사람도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그 기준이 지나치게 높아서였다.
“꼭 그런 건 아냐.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기인이사들이 많단다.”
“흐음.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분들이 많으시겠죠?”
“아마도?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까.”
반호진의 말에 서조운이 상일기를 힐끔 쳐다봤다.
말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상일기가 떠올라서였다.
만약 반호진이 찾아가지 않았다면 상일기는 지금도 산 속 깊은 곳에서 정이륭과 수련만 하고 있었을 터였다.
“어서 오십시오. 모두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정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서이경이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그 뒤로 두 아들이 따라 나와서는 공손히 포권을 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