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33화 (233/468)

제 77장. 새로운 시대로. -01

반호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결과였기에 감정이 복받쳤다.

동시에 지난 생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담현과 정현을 비롯해서 소림사 제자들의 죽음과 끊임없이 이어지던 전투.

점점 더 줄어드는 전우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죽음까지.

눈 감던 순간까지도 반호진은 뒤에 남을 동료들을 걱정했었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반호진은 두 눈을 감았다.

이제야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응어리가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더불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죽은 모두의 염원이 기적이 되어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낸 건 아닐까 하는.

“좋은 날 왜 그래?”

“아아.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어서?”

“혹시 내상이 더 심해졌어? 내가 가지고 있는 내상약이라도 줄까?”

심상치 않은 반호진의 표정 때문인지 선우방이 걱정스레 물었다.

온몸이 만신창이인 만큼 품속에 있던 내상약이 멀쩡할 리 없기에 선우방은 당장이라도 본인이 가지고 있던 내상약을 꺼내려 했다.

“그런 거 아니다.”

“안색이 안 좋은데.”

“못 버틸 정도는 아니야. 다 정리하고 치료해도 돼.”

“이겼다!”

“우와아아!”

반호진이 말이 끝난 순간 전장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북해빙궁과 포달랍궁의 퇴각을 보며 백도무림의 무인들이 승리의 함성을 터트린 것이었다.

승리하기는 했으나 죽은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승리를 만끽했다.

저벅저벅.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들으며 반호진은 걸음을 옮겼다.

포달랍궁주를 쓰러뜨리고서 가만히 서 있는 담현에게 향한 것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사부님.”

“허허허. 힘들긴 하더구나. 한 걸음도 못 움직이겠어.”

“이거 참 너무 차이 나네. 자식새끼가 둘이나 있는데 단 한 놈도 안 오네.”

반호진의 등장에 맨땅에 대(大)자로 뻗어 있던 팽만철이 투덜거렸다.

당장 달려온 반호진과 아들들이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가 나서였다.

그리고 그건 남궁호와 당우혁도 마찬가지인 듯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부님!”

반호진에 이어 무당파의 대제자가 달려왔다.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의 상태를 살핀 후 곧장 이리로 온 것이었다.

그 모습에 남궁호, 팽만철, 당우혁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구겨졌다.

“허허허. 빈도가 이등이구려.”

헐레벌떡 달려오는 대제자의 모습에 운상이 활짝 웃었다.

별거 아니지만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가 없었기에 운상은 웃으며 대제자를 반겼다.

“이것들이!”

결국 참다못한 팽만철이 폭발해서는 노성을 터트렸다.

그러자 팽추영과 팽주영이 그제야 황급히 달려왔다.

딱히 크게 다치지 않은 모습으로 말이다.

그런 둘의 모습에 팽만철이 또다시 폭발했다.

“나보다는 네가 더 많이 다친 것 같구나.”

“괜찮습니다. 전 아직 젊으니까요.”

“허허허허.”

시끌벅적한 팽만철을 일별하고 반호진의 상태를 확인하던 담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식으로 대답할 줄은 꿈에도 몰라서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반호진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기도 하고요.”

“내상을 입었을 때는 바로 치료하는 게 좋다. 괜찮을 것 같다고 놔두다가 더 심해지는 경우가 빈번해.”

“내상약은 먹었습니다. 여기서 더 심해지지는 않을 겁니다.”

“하긴.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천하제일을 넘보는 무인에게.”

“아직 아닙니다.”

반호진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냉정하게 아직은 한참 남았다고 생각해서였다.

적어도 현재의 북해빙궁주는 넘어야 천하제일이란 말을 할 수 있기에 반호진은 진지하게 부정했다.

“늦었지만 애썼다.”

“사부님께서도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응?”

“이렇게 살아 있어 주셔서요.”

“실없기는.”

담현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장을 수습하는 것까지 끝나야 모든 게 끝났기에 담현은 법무와 소림사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피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다행이야.”

담현은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반호진은 진심이었다.

지금처럼 살아 있는 게 말이다.

사람인 이상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반호진은 이왕이면 담현이 오래오래 살아 있어 주길 바랐다.

“자자! 얼른 정리하자고!”

“그만 소리 질러! 해 지기 전에는 끝내야지!”

“체력 좀 남아 있는 이들은 얼른 땅을 파!”

승리를 만끽하던 무인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쁨도 기쁨이지만 해가 지기 전에 전장을 정리하려면 정말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특히 시체들을 가만히 방치할 경우 역병이 돌 수도 있었기에 다들 서둘렀다.

그리고 사형제들의 시신들도 수습해서 사문으로 데려가야 했기에 모두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스윽.

바삐 움직이는 군중을 보며 반호진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지난 생에서는 보지 못한 광경이었기에 오만 감정이 다 뒤섞였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안도감이었다.

과거로 돌아와 실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반호진은 흐릿하게 웃으며 담현과 법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

이른 아침부터 소림사의 내원은 부산스러웠다.

운남성과 감숙성에서 죽은 제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가 시작되어서였다.

구천문의 독에 당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경우에는 평소에 가장 아끼던 물건이나 입었던 옷으로 화장을 대신했다.

“흑!”

“…….”

이미 많이 울었음에도 위령제가 시작되자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죽음이라는 게 적응이 되지 않기에 다들 슬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반호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반호진은 단순히 슬퍼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탁.

속가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합장을 하며 반호진은 장내를 찬찬히 둘러봤다.

북해빙궁주와 포달랍궁주가 죽었을 때도 느꼈지만 새삼 전쟁이 끝난 후 멀쩡한 소림사의 내원을 보자 반호진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외원이 전부 불타고 내원이 반 이상 허물어졌던 지난 생의 일은 이제 벌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달라질 수도 있으나 일단은 본래의 미래를 바꿨다는 점에서 반호진은 만족스러웠다.

‘죽은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건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씁쓸하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제아무리 반호진이라도 신이 아닌 이상 바꾸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가장 좋은 건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이지만 그건 반호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반호진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반호진은 진심을 담아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스윽.

그런 반호진의 곁에는 서조운과 사마의성, 정이륭, 상일기가 있었다.

함께 전쟁을 치른 전우로서 소림사의 위령제를 함께하는 것이었다.

상일기는 몰라도 세 사람은 숭산에 머물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이들이 많았기에 다들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위패에 적힌 법명만 봐도 얼굴이 떠올랐기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정도로 눈시울이 붉었다.

탁. 탁. 탁. 탁.

그런 일행들의 사이로 목탁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죽은 이들이 극락왕생하길 기원하는 목탁 소리였다.

“이상하게 휑하네요.”

“두 명이 없잖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위령제를 마치고 거처로 돌아온 반호진은 늘 그렇듯이 담담하게 차를 들이켰다.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안타까운 기색이 얼굴 가득 서려 있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오래 슬퍼한다고 해서 죽은 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게 아니기에 반호진은 딱 위령제가 끝날 때까지만 슬퍼했다.

“형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편히 해. 그런 걸 허락받을 사이는 아니잖아?”

“하하하.”

“그래. 무슨 말?”

“사부님과 함께 무림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서조운과 사마의성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 정도로 예상치 못한 말이어서였다.

반면에 반호진은 둘과 달리 딱히 놀라지 않았다.

“슬슬 강호를 둘러볼 때가 되기는 했지. 하산하고 너무 오랫동안 숭산에만 머물러 있었으니까.”

“제게 있어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더 함께하고 싶은데 사부님께서 건강하실 때 같이 강호를 유람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요.”

“좋은 생각이야. 올해 건강하시다고 해서 내년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또 추억은 만들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만들어 두어야 해.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니까.”

“맞습니다.”

반호진의 말에 정이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어서였다.

매번 다음에, 혹은 나중에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일기의 시간은 결코 그와 똑같이 흘러가지 않았다.

그걸 이번에 느꼈기에 정이륭은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이 자신에게 중요한 시기인 건 맞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부인 상일기였다.

“근데 여기가 네 집도 아닌데 왜 허락을 맡고 그래?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머물고 싶으면 머무는 거지.”

“왠지 제가 돌아왔을 때 형님이 이곳에 안 계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시 형님께 돌아오겠다고요. 아직 형님한테 배울 게 많거든요.”

“뭐가 많아. 남자는 알아서 크는 법이야. 혼자 크는 거라고. 그리고 네 나이를 생각해.”

“저는 영원히 형님의 동생입니다.”

“징그럽다.”

안길 듯이 대답하는 정이륭을 향해 반호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끼리의 의리라면 몰라도 애정 따위는 필요 없었다.

“언제 떠나실 거예요?”

“사부님께서 다 회복하시면. 아직 내상이 조금 남아 있어서. 한 보름 정도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서 일정을 잡아 보려고 해. 중원 전체를 돌아볼 생각이거든.”

“우와.”

서조운은 물론이고 사마의성도 눈을 반짝였다.

반호진과 함께하면서 제법 많은 곳들을 돌아다녔지만 아직 가 본 곳보다 가 보지 못한 곳이 더 많았기에 두 사람은 살짝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뭘 부러워해. 너희 둘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잖아.”

“아직 하산하기에는 실력이 미천한지라.”

“천하의 염룡이?”

“저는 미천합니다, 이륭 형. 심지어 별호도 없어요.”

서조운에 이어 사마의성이 짐짓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이륭의 눈에는 보였다.

자신감 가득한 눈빛이 말이다.

그리고 누구도 사마의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별호야 곧 생길 거야. 나도 네 나이일 때에는 별호 없었어. 아니, 아예 나란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지. 형님을 만나고 이름도 알리고, 별호도 얻었지.”

“안 그래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사마의성의 능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이륭도 내심 기대하는 중이었다.

사마의성에게 어떤 별호가 생길지 말이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하오문이나 금가장의 분타에 찾아가 봐. 웬만한 일은 도와줄 거야.”

“알겠습니다.”

“경비는 충분하지?”

“형님 덕분에 넘치도록 있습니다. 사실 이참에 그동안 저축한 걸 써 볼 생각입니다. 지금껏 계속 저축하기만 했으니까요.”

“돈도 써 봐야 늘어. 나도 그랬으니까.”

방천문에 내려오는 재산이 있겠지만 자고로 돈이 많아서 나쁠 건 없었다.

더욱이 강호 전체를 돌아보려면 경비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형님은 어디 안 가십니까?”

“생각 중이긴 해.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물 수는 없으니까.”

“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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