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장. 재대결, 그리고 결과는. -01
반호진의 눈빛이 번뜩였다.
첫마디에서 많은 걸 유추해 낼 수 있어서였다.
사실 반호진은 내심 걱정했었다.
죽은 뒤에 과거로 돌아왔기에 동귀어진을 한 북해빙궁주도 마찬가지로 과거로 돌아온 건 아닐까 하고.
그런데 첫마디를 들은 순간 반호진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과거로 돌아온 건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째서 과거로 돌아왔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내게 기적이 일어났다는 거. 그리고 미래를 바꿀 기회가 찾아왔다는 거지.’
반호진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알고 싶어도 현재 그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현재에 충실하는 게 맞았다.
‘우선은 앞에 있는 북해빙궁주부터.’
반호진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처음 과거로 돌아왔을 때 그가 가장 먼저 다짐한 게 바로 복수였다.
그 기회가 지금 찾아왔기에 반호진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야말로 눈앞에 있는 북해빙궁주를 잡겠다고 말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계획대로 된다면 불가능하지도 않아.’
모든 것이 전생 때보다 나았다.
몸 상태는 물론이고 이룩한 경지, 거기에 상대방에 대한 정보까지.
북해빙궁주는 그를 처음 보지만 반호진은 아니었다.
빙백신공에 대한 건 물론이고 북해빙궁주의 습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야. 그래서 아깝군.”
반호진이 과거를 회상했던 것처럼 북해빙궁주도 잠시 상념에 빠졌다.
들은 것보다 반호진의 무위가 더 뛰어나서였다.
정확하게는 그가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
“뭐가 말이지?”
“너에게 기회를 주마. 북해빙궁에 투항해라. 그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주마.”
“…….”
반호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상상도 못 한 말을 북해빙궁주가 지껄여서였다.
그런데 그 기색이 얼굴 가득 드러났을 텐데도 북해빙궁주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결과는 나와 있다. 네가 있어 봤자 조금 더 버틸 뿐이지. 결국 중원무림은 무너진다.”
북해빙궁주가 서쪽을 향해 눈짓했다.
바로 포달랍궁주와 다섯 명이 있는 곳이었다.
일 대 오의 싸움인데도 우위를 점하는 건 포달랍궁주였다.
지난번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포달랍궁주는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발휘하며 다섯 명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패배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이거 의외인데. 그 정도 수준이면 딱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지금이야 어찌어찌 버텨 내고 있지만,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중원의 저력을 너무 무시하는 거 같은데. 이번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과연 그게 우리의 패배일까?”
“알고 있다. 여기 있는 이들을 전멸시킨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하지만 죽이고 또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모두 사라져 있겠지. 근데 그거 아나? 중원에는 백도무림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도무림과 마도무림을 이용할 거란 걸.”
북해빙궁주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속내를 이렇게 정확히 짚어 낼 줄은 몰라서였다.
“점점 더 탐이 나는구나.”
보고받기로 반호진의 나이가 이제 스물한 살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룩한 무경과 심계는 결코 애송이라 볼 수 없었다.
북해빙궁주는 그래서 더 반호진이 탐이 났다.
“개소리는 그만 지껄이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시작해 보자고.”
“후후! 아무래도 좀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려면 매가 필요할 것 같기는 하구나.”
“글쎄. 과연 누가 매를 맞을까?”
“하하하하!”
한마디도 지지 않고 응수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북해빙궁주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그러나 두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배짱 있고 기백이 넘치는 건 마음에 들지만 그렇다고 대드는 건 거슬렸다.
뭐든지 적당한 게 좋았기에 북해빙궁주는 반호진을 좀 길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웅웅웅웅!
한편 북해빙궁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반호진은 직접 움직였다.
어차피 적과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또한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반호진이 잘 알았다.
서로의 목적이 완벽한 대척점에 있는데 대화가 될 리가 없었다.
쌔애액!
마음이 동한 것과 동시에 허리춤의 소천검이 허공을 갈랐다.
처음부터 이기어검을 펼친 것이었다.
그런데 허공을 가로지르는 검광은 하나가 아니었다.
소천검을 받은 후 수련할 때만 사용하던 애검 역시 북해빙궁주에게 쇄도했다.
“대화는 필요 없다, 이건가?”
전광석화처럼 쇄도하는 두 개의 검을 느끼며 북해빙궁주가 비릿하게 웃었다.
뛰어난 무인은 상대의 초식만 봐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마음가짐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북해빙궁주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반호진이 어떤 각오로 이기어검을 펼치는지 말이다.
“아깝군. 쓸 만한 인재라고 생각했는데.”
츠츠츠츠!
북해빙궁주의 혼잣말과 함께 대기가 출렁거렸다.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무지막지한 공력에 주변의 대기가 흔들리는 것이었다.
동시에 북해빙궁주를 중심으로 두꺼운 얼음벽이 생성되었다.
터엉! 터어엉!
시기적절하게 생성된 얼음벽은 놀랍게도 벼락처럼 쇄도한 두 자루의 검을 튕겨 냈다.
이기어검으로도 관통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반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럴 거라 예상해서였다.
‘북해빙궁주의 장점은 막대한 내공과 한기, 그리고 형상화지.’
초월경의 고수는 그 자체로도 재앙이었다.
일단 같은 경지의 무인이 아니면 상대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북해빙궁주는 그런 초월경의 경지에서도 거의 끝에 도달해 있는 무인이었다.
괜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북해빙궁주에게 무릎 꿇은 게 아니었다.
‘여전하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냉기와 얼음폭풍은 그 자체로도 위협적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저 형상화 능력이었다.
얼음을 만들고, 자유자재로 바꾸는 능력.
무형지기를 수족처럼 다루는 걸 넘어 얼음으로 모든 걸 만들어 내는 능력은 다시 봐도 끔찍했다.
그리고 그 어떤 방식으로든 접근을 불허했다.
스윽.
너무나 허무하게 튕겨 나온 두 자루 검 중 반호진은 소천검이 아닌 본래의 검을 잡았다.
지난 생에서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검이자 북해빙궁주와 동귀어진하게 만들어 주었던 검이니만큼 반호진은 이번에도 똑같이 이 검으로 북해빙궁주를 죽일 생각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렇게 만들어 줄 것 같기도 했고.
푸푸푹!
물론 단순히 그런 느낌만으로 애지중지 보관하던 애검을 가져온 건 아니었다.
이제는 두 자루의 검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기에,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고자 애검을 챙겨 왔다.
“흐읍!”
수십 개의 얼음 화살들이 물고기 떼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쇄도하는 광경에 반호진은 새삼 북해빙궁주를 상대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전생에서 겪어 봤던 공격을 똑같이 겪게 되자 실소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결과로 끝을 낼 생각은 없었다.
‘순순히 당해 주지 않는다고. 그때의 내가 아니거든.’
퍼퍼퍼펑!
금광신보로 한줄기 빛살처럼 움직이던 반호진이 검을 그었다.
좌에서 우로 단순한 횡베기였으나 그 궤적에 있던 얼음 화살들은 모조리 산산조각 났다.
흔한 검기 하나 서리지 않았으나 검로에 닿는 모든 것들을 분쇄해 버렸다.
쌔애액!
거기에 소천검이 쉴 새 없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북해빙궁주에게 쇄도했다.
사각을 절묘하게 노리며 파고들었던 것이다.
“어림없느니라.”
터어어엉!
우뚝 서 있는 북해빙궁주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등 뒤에서 찔러 들어오는 공격이었으나 소천검은 이번에도 막혔다.
예의 얼음벽이 나타나서는 소천검을 튕겨 냈던 것이다.
심지어 무작정 튕겨 낸 것이 아니었다.
얼음벽의 각도를 조정해 북해빙궁주가 원하는 방향으로 소천검이 튕겨 나가도록 만들었다.
촤라라랏!
그뿐만 아니라 북해빙궁주는 반호진의 일검에 의해 산산조각 났던 얼음조각들을 조종해 재차 날렸다.
화살 정도의 크기보다 훨씬 작아진 얼음조각들을 암기처럼 반호진에게 쏘아 보냈던 것이다.
크기가 가지각색이었기에 육안으로 보이는 것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다.
푸푸푹! 푸푸푸푹!
폭우처럼 쏟아지는 얼음조각들을 반호진은 맞받아치지 않았다.
부숴 봤자 다시 자신에게 날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서였다.
치명적인 공격이 아니라면 가급적 회피할 생각이었다.
쩌어억!
하나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피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란 걸 잘 알고 있기에 반호진은 이기어검으로 북해빙궁주를 견제하면서 끊임없이 검격을 뿌렸다.
“소용없다.”
일체의 소성도 없이 뿌려진 참격에 얼음벽이 갈라졌다.
천하십대고수였던 단위는 물론이고 철혈마황조차도 쉽게 막아 내지 못했던 참격을 북해빙궁주는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하나로 안 된다면 두 개, 세 개를 연이어 생성해서 반호진의 참격이 몸에 닿지 않게 만들었다.
‘좋아.’
그런데 그 모습에도 반호진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서로의 공격이 통하지 않았으나 냉정하게 말해 밀리는 쪽은 반호진이었다.
더구나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막대한 공력을 쌓아 온 북해빙궁주에 비하면 반호진이 축적한 내공은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도 반호진의 눈빛에는 초조한 기색이 일절 보이지 않았다.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어.’
처음부터 반호진은 자신이 불리하단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난 생의 무위를 회복한 걸 넘어 새로운 경지를 넘보고 있었으나 북해빙궁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또한 부족한 공력이 여전히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준비한 비장의 한 수가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비장의 한 수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때가 무르익어야 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니까.’
괜히 비장의 한 수가 아니었다.
또한 구명절초는 무인마다 하나씩, 혹은 하나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북해빙궁주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비장의 한 수가 있을 것이기에 반호진은 열세에 몰려 있음에도 차분하게 기다리고 기다렸다.
원하는 시기가 올 때까지.
부우우웅!
자잘한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건지 북해빙궁주가 방식을 바꾸었다.
단순히 얼음조각들을 조종하는 걸 넘어 거대한 얼음 손을 생성했다.
사람 한 명 정도는 가볍게 움켜쥘 정도였는데 거대한 크기에 비해 속도가 벼락같았다.
공간을 뛰어넘는 것 같은 속도로 반호진에게 쇄도했다.
쩌억!
하지만 반호진도 만만치 않았다.
거대하고 빠르다고 하나 반호진의 경신술로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부수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반호진의 참격에 거대한 얼음 손이 순식간에 반 토막 났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도 북해빙궁주는 히죽 웃었다.
얼음을 아무리 가르고 부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어서였다.
얼마든지 다시 붙이고, 만들어 낼 수 있기에 북해빙궁주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서 재차 얼음 손을 움직였다.
후우우웅!
게다가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었다.
또 다른 얼음 손이 나타나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더니 이내 열 개가 되었다.
북해빙궁주가 본격적으로 힘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휘이이잉!
근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북해빙궁주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던 얼음폭풍이 순식간에 사방을 잠식해 갔다.
그로 인해 반호진과 북해빙궁주의 모습이 사라졌다.
작고 새하얀 얼음 알갱이들로 인해 가려진 것이었다.
우드득!
그와 동시에 주변을 집어삼킨 얼음 알갱이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바깥에서부터 딱딱한 벽을 만들었던 것이다.
‘얼음 감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