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장. 이번에야말로. -03
사마의성이 건네준 금창약을 바르며 서조운이 한 곳을 응시했다.
포달랍궁의 칠성과 북해빙궁의 육존을 상대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중에 담현과 운상, 남궁호, 당우혁, 팽만철은 빠져 있었다.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포달랍궁주와 북해빙궁주를 상대하기 위해 남아 있는 것이었다.
대신 다섯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대장로들과 십대세가에 속해 있는 가주들이 나섰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제갈문곡이 이동 내내 고심했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즉 처음부터 제갈문곡은 이런 상황을 예측했었다.
‘정확하게는 만든 것이지만.’
반호진은 새삼 제갈문곡의 역량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판을 짜는 능력만큼은 중원에서 제갈문곡을 따를 자가 없을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판을 짰다고 해서 결과까지 만들 수는 없다는 점이지.’
꽈아아앙!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굉음에 반호진의 시선이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제갈문곡이 괜히 병력을 뒤로 물린 게 아니라는 듯이 곳곳에서 무시무시한 폭발이 터지며 후폭풍이 일어났다.
“어마어마하네요.”
각 파의 중진들이 보여 준 무위도 상당했지만 육존과 칠성의 수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서조운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어째서 제갈문곡이 병력을 뒤로 물렸는지도.
만약 퇴각시키지 않고 계속 싸우게 했다면 피해가 엄청났을 게 분명했다.
“대단하지.”
“장문인들이나 가주님들은 크게 밀리는 것 같지 않은데 다른 쪽은…….”
서조운이 단순하게 칠성과 육존의 실력에 놀랐다면 선우방은 다른 걸 보고 있었다.
장문인들과 가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대장로들이 싸우고 있는 곳이었는데 선우방의 걱정대로 숫자가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밀리는 건 대장로들 쪽이었다.
다들 난다 긴다 하는 곳의 대장로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너무 강했다.
“그래도 버텨야 해. 이길 수 없다면.”
“지금도 간신히 버티는 것 같은데.”
“위험하다 싶으면 인원이 더 추가될 거야.”
포달랍궁이 서장을 가로지르며 병력을 충원한 것처럼 백도무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남성에서 감숙성으로 이동하면서 많은 협의지사들이 모여들었다.
철혈성, 구천문에 이어 포달랍궁과 북해빙궁이 중원침공의 야욕을 드러내자 그걸 막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것이었다.
덕분에 단순 규모만 따지면 백도무림측이 압도적이었다.
“피해가 클 것 같아요.”
“그래도 싸워야 해. 이기기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건 누가 시켜서 싸우는 게 아니니까.”
“그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서조운이 살짝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죽을 줄 알면서도 싸우기 위해 나서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대단한지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사람인 이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수가 없는데 그걸 억누르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었다.
그 숭고함에 서조운도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겨야 해. 지켜 내야 하고.”
“예.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진행 속도가 빠른 것 같아요. 첫날부터 칠성과 육존이 나설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원정군이 불리하다는 건 저쪽도 알거든. 그리고 반대로 생각하면 저쪽에게 기회이기도 하고.”
“기회요?”
서조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선은 전장이 둔 채로 다들 귀를 쫑긋거렸다.
사마의성만 제외하고서.
“백도무림의 핵심 전력이 전부 이곳에 집결해 있잖아.”
“아!”
“일망타진!”
모두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반호진의 말이 단번에 이해되어서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건곤일척이라는 네 글자로 귀결되었다.
결국 승리한 자가 모든 걸 가지게 될 것이었다.
“형님. 가능할까요?”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서조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그의 시선은 포달랍궁주를 지나 담현과 네 명에게로 향했다.
“되든 안 되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어. 어떻게든 해 봐야지.”
무려 천하십대고수 중 다섯 명이 모여 있었으나 반호진도 이길 거라 장담하지 못했다.
포달랍궁주를 직접 상대해 봤기에, 그리고 초월경에서 반 수의 차이가 얼마나 거대한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승리할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천하십대고수 중에서도 상위권이라고 할 수 있는 다섯 명이 힘을 모은 만큼 쉽게 지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본인에게 당면한 문제가 있었기에 반호진은 다섯 명과 포달랍궁주에 대해 집중할 수가 없었다.
“형님께서 위험하시면 제가 제일 먼저 달려갈게요.”
“허튼 생각 하지 마.”
“저를 희생해서라도 형님을 살릴 겁니다. 어차피 저는 형님이 살려 주시지 않았다면 죽었을 목숨이니까요.”
서조운이 평소답지 않게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반호진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말이다.
“헛소리하지 말고. 왜 네가 죽어?”
“어차피 형님께서 패배하시면 이길 확률이 없잖아요. 포달랍궁주야 어찌어찌 잡을 수 있다고 해도 북해빙궁주가 포달랍궁주와 비슷한 실력이라면 이기기 힘들지 않을까요. 재수 없으면 포달랍궁주보다 더 강할 수도 있고.”
서조운의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빙궁주의 무위를 제대로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느낄 수는 있었다.
포달랍궁주와 비교해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일단 나란히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서로의 무공을 인정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나 아직 죽을 생각 없다. 내 꿈에 대해서 몇 번 말했을 텐데?”
“잘 알죠. 천하제일인이 되어서 무사태평하게 살고 싶다 하셨잖아요.”
“정확하네.”
“척이 형이 형님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서 며칠이라도 천하제일인이 되겠다고 했는데, 그건 이루기 힘들 거예요. 형님에 이어 제가 천하제일인이 될 거거든요.”
언제 심각한 분위기였냐는 듯이 서조운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모용척도 입을 열었다.
이 발언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였다.
“누가 허락한대?”
“허락이 중요합니까.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이지.”
“지금은 내가 더 강해!”
“그럴 리가요. 며칠 사이에 실력이 확 달라지지 않습니다. 일단 기본기부터 다지고 오세요.”
발끈하는 모용척을 향해 서조운이 히죽 웃었다.
아직 멀었다는 듯이 말이다.
분명 모용척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으나 내공 면에서는 서조운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발전하는 만큼 서조운 역시 똑같이 발전하고 있기도 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오래 가질 못하네요.”
“너무 긴장하는 것도 좋지 않아.”
“방천문주님은 어떠세요?”
말없이 한 곳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정이륭을 힐끔거리며 사마의성이 물었다.
다른 이들이야 절정고수이기에 거리가 멀어도 안력에 내공을 집중해 먼 곳을 살펴보는 게 가능하지만 사마의성은 아니었다.
“박빙이야.”
“다행이네요.”
“근데 다른 쪽은 상황이 좋지 않네.”
푸하핫!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점창파와 청성파의 장문인이 입에서 시커먼 피를 토했다.
누가 봐도 내상을 심각하게 입은 모습이었다.
거기다 일우 역시 피하기 급급했다.
왼팔이 없는 몸에 꽤 많이 적응했으나 그럼에도 상대가 너무 강해서인지 안색이 창백했다.
“커헉!”
“끄아악!”
결국 사달이 났다.
가까스로 버티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로들이 결국 무너진 것이다.
자존심도 굽히며 협공을 했지만 북해빙궁의 육존들은 강했다.
“사형!”
“이놈들!”
“멈춰라!”
순식간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장로들의 모습에 사형제들은 물론이고 제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더는 지켜보지 못하고 움직인 것이었다.
“역시 중원 놈들이란.”
“개떼처럼 달려들 줄만 알지.”
밀물처럼 달려드는 수많은 적의 모습에도 칠성과 육존은 당황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해서였다.
그리고 달려들어 주면 그들로서는 더 좋았다.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퍼퍼퍼펑! 퍼서석!
그걸 증명하듯 육존과 칠성의 손짓에 수많은 무인이 터져 나가거나 얼어 죽었다.
더구나 악재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도무림의 무인들이 살기등등하게 달려들자 뒤쪽으로 물러나 있던 북해빙궁과 포달랍궁의 무인들도 마주 뛰쳐나왔다.
자연스럽게 두 번째 전면전이 발발한 것이었다.
“포달랍궁과 북해빙궁도 지지부진하게 전투를 끌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적당히 물러날 법도 한데 두 세력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끈질기게 달려드는 모습에 사마의성이 마른침을 삼켰다.
예상과 달리 첫 번째 전투가 길어져서였다.
“어?”
“왜 그래?”
“다섯 분이 움직이시는데요?”
서조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포달랍궁주를 향해 담현과 운상, 남궁호, 당우혁, 팽만철이 움직여서였다.
그 모습에 다른 일행들도 두 눈을 크게 떴다.
반대로 반호진은 미간을 좁혔다.
“승부수인가.”
원래의 작전에는 없는 행동이었으나 반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작전은 전장의 상황에 맞춰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또 다섯 명은 충분히 독립작전권을 가질 수 있는 위치였기에 제갈문곡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을 터였다.
판을 짜는 건 제갈문곡이지만 결국 싸우는 건 다섯 명이었고, 전장에서의 판단은 다섯 명이 더 정확했다.
“승부수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우리도 없으니까. 보급이 불편한 원정군은 전쟁이 길어지면 약탈자로 바뀌니까.”
“아!”
약탈자라는 말에 모두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런 일행들을 한 차례씩 바라보던 반호진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사마의성에게 닿았다.
“이제부터는 네 판단에 맡기마.”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사마의성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사마의성은 알 수 있었다.
반호진 역시 움직이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뒤를 부탁하마.”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반호진은 땅을 박찼다.
전장을 가로지르는 건 번거롭기에 어검비행술로 이동했다.
탁.
격전지와는 조금 떨어진 공터에 반호진이 내려섰다.
굳이 북해빙궁주가 서 있는 곳까지 날아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자칫 잘못하면 포위당할 수도 있기에 반호진은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북해빙궁주도 느릿하게 허공을 날아 반호진의 앞에 내려섰다.
“포달랍궁주의 말대로구나.”
뒷짐을 지고서 내려선 북해빙궁주가 여유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겉보기에는 육십 대에서 칠십 대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백이 넘은 게 북해빙궁주였다.
그러나 반호진의 시선은 현재의 북해빙궁주가 아니라 전생의 북해빙궁주에게 향해 있었다.
지금보다 더 늙고 어깨도 굽었던 북해빙궁주를.
‘그리고 사부님과 나를 죽였지.’
반호진의 초점이 흐릿해졌다.
지난 생의 일이지만 아직도 선명했다.
또 죽은 건 그와 담현만이 아니었다.
정현을 비롯해서 수많은 소림사의 제자들이 북해빙궁의 손에 죽어 갔다.
꾸욱!
‘이번에는 달라.’
전생에서는 북해빙궁주의 앞에 서기 위해 수많은 적을 쓰러뜨려야만 했다.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에서 북해빙궁주와 싸웠고, 마지막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동귀어진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최상의 몸 상태로 북해빙궁주를 마주했다.
‘과거로 돌아온 건 나 혼자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