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장. 검신이었다. -04
옆에 두둥실 떠 있던 소천검을 반호진은 손을 뻗어 잡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전방에 있는 포달랍궁주에게 휘둘렀다.
거리가 상당했지만 반호진 정도의 고수에게 이 정도 간격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쩌어억!
그걸 증명하듯 반호진의 일격에 반투명하게 유지되고 있던 호신강기가 깨끗하게 갈라졌다.
담현과 개왕, 운상조차도 겨우겨우 흠집을 냈던 호신강기를 반호진은 단숨에 찢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호신강기가 완벽하게 파괴되었음에도 포달랍궁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반호진이 구천문주를 죽이는 걸 직접 봤기에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던 수준이었다.
부우우웅!
대신 포달랍궁주는 사뭇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밀종대수인을 펼쳤다.
어디 한번 막아 보라는 듯이 말이다.
묵직한 소성과 함께 거의 사람 키만 한 밀종대수인이 혈광을 번뜩이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반호진에게 쇄도했다.
스슥!
그러나 반호진은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않았다.
굳이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싸울 필요는 없어서였다.
더구나 구천문주를 상대하느라 힘이 어느 정도 빠져 있는 상태였기에 더더욱 쓸데없이 공력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스윽!
반호진이 금광신보로 가볍게 회피했으나 포달랍궁주도 만만치 않았다.
금세 밀종대수인을 조종해서 반호진을 따라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포달랍궁주는 자신의 강점인 막대한 내공을 십분 활용했다.
하나에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밀종대수인을 쏟아 냈다.
‘미쳤네.’
체격은 왜소하지만 포달랍궁주 안에는 거인이 웅크리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내공으로 이루어진 거인이 말이다.
그 사실을 반호진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단순히 공력의 양으로는 포달랍궁주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럼 내가 잘하는 것으로 가야지.’
더 까다로운 건 분명 구천문주였다.
하지만 순수하게 실력만 따지자면 포달랍궁주가 월등히 높았다.
당장 반호진이 쉽사리 우위를 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거기다 경험까지 많았다.
퍼퍼퍼펑!
반호진의 검예가 보통 수준이 아니란 걸 파악해서인지, 아니면 구천문주와의 싸움을 봐서 그런지 포달랍궁주는 절대 일정 거리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접근전은 자신이 불리하단 걸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둘의 대결은 접근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싸움처럼 보였다.
피이이잉!
게다가 포달랍궁주는 밀종대수인만 펼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폭발로 인해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반호진의 전신요혈을 노리고서 지강(指罡)을 뿌려 댔다.
웬만한 호신강기도 종잇장 찢듯이 찢어 버릴 수 있는 위력이었기에 반호진으로서도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까딱 했다가는 몸에 구멍이 뚫릴 수 있기에 반호진의 움직임도 신중해졌다.
‘그렇다면.’
반호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근접전이라는 게 꼭 몸이 가까워야지만 근접전인 건 아니었다.
제일 효과적인 건 가까이 붙어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지만 그게 안 된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다.
쑤아아앙!
허공을 가로지르던 반호진은 검을 던졌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으니 이기어검으로 공격할 생각이었다.
“흥!”
그런데 포달랍궁주는 반호진이 이렇게 나올 줄 예상했다는 듯이 당황하지 않고 밀종대수인을 끌어모았다.
한줄기 벼락처럼 쇄도하는 이기어검의 앞으로 전부 집결시켰던 것이다.
콰콰콰콰쾅!
정확히 이기어검의 궤적을 파악해서 앞에 켜켜이 배치시키자 검속이 빠르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이기어검이라고 만능은 아니었다.
사람이 펼치는 것이니만큼 한계는 명백히 있었다.
포달랍궁주는 그 사실을 직접 보여 주었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물량으로 이기어검을 막아 내는 모습에 반호진의 입매가 비틀렸다.
막히긴 했으나 이제 겨우 한 번 실패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전술에는 정공법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뭐라고?”
“못다 한 승부는 다음에 내도록 하지. 물론 그때는 이렇게 끝나지 않을 거다. 또한 내가 물러나지도 않겠지.”
반호진이 막 이기어검을 조종하려는 순간 포달랍궁주가 입을 열었다.
동시에 사방을 짓누르던 존재감이 한순간에 갈무리되었다.
더불어 반호진은 볼 수 있었다.
어느 순간 훌쩍 물러나 있는 포달랍궁의 병력을 말이다.
“도망치는 건가?”
“그럴 리가. 그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할 말은 다했다는 듯이 포달랍궁주가 사라졌다.
축지법이라도 펼친 것처럼 순식간에 멀어진 모습에 반호진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만 먹는다면야 지금 당장이라도 추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혼자 따라가서는 개죽음만 당할 뿐이었다.
“형님.”
“돌아가자.”
아쉬운 기색이 절절히 남아 있는 반호진을 향해 서조운이 다가왔다.
표정만으로도 반호진의 심정을 알 수 있어서였다.
“지금 쫓아가는 건 무리겠죠?”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포달랍궁에 비해 우리 쪽은 다들 지쳤어. 추격하고 싶어도 못 해.”
“역시 그런가요.”
서조운이 입맛을 다셨다.
안 그래도 그 역시 이곳으로 오면서 주변을 살펴봤었다.
만약에 추격을 한다고 하면 할 수 있나 싶어서.
그런데 다들 지친 건 물론이고 싸울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쯤에서 마무리 지어야 해. 더는 무리야.”
“포달랍궁에 농락당한 거 같은데.”
“그렇다고 봐도 무방하지.”
두 사람의 곁으로 사마의성과 정이륭, 선우방, 모용척이 다가왔다.
다들 고군분투했다는 걸 보여 주듯이 온몸에 핏자국이 가득했다.
“조금만 더 힘을 냈으면…….”
“그랬으면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아쉽게도 다들 한계야. 그리고 이 정도면 우리가 진 건 아니야. 오히려 승리한 셈이지. 말이 좋아 퇴각이지 도망치는 거니까. 단지 그렇게 안 보일 뿐이지.”
아쉬워하는 서조운을 사마의성이 달랬다.
사실 아쉬운 건 사마의성도 마찬가지였다.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사마의성 역시 이번에 확실하게 끝을 냈어야 앞으로의 전쟁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 포달랍궁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쉬워하는 건 이쯤 하자고. 앞으로 생각할 것도 많은데. 북해빙궁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하고.”
“네.”
반호진은 몸을 돌렸다.
이미 화살은 떠났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미련 없이 본진으로 향했다.
전투는 끝났으나 정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더구나 구천문을 물리친 만큼 백도무림이 입은 피해 역시 컸기에 주검을 정리하는 무인들의 어깨가 쉴 새 없이 떨렸다.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으나 흔들리는 어깨의 모습만으로도 현재 심정이 어떠한지 느낄 수 있었다.
“으음.”
그 모습을 보며 반호진의 가슴도 무거워졌다.
이제는 전쟁이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반호진의 마음은 늘 똑같았다.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죽은 이들이든 살아남은 이들이든 말이다.
“형님.”
“왜?”
일행 중 유일하게 반호진과 함께 이동하던 사마의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마나 생각에 집중했는지 주변이 눈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제가 같이 가도 될까요?”
“안 될 건 없잖아?”
“어?”
“수뇌부가 참석하는 회의이지만 자격 조건이 따로 있는 건 아니잖아?”
사마의성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듣고 보니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자격 조건은 없었다.
단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대거 참여하기에 자신은 부족하다고 지레 판단해서 참석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회의가 열리는 거대한 천막 주변에 군소방파의 수장들이 모여 있었다.
“생각해 보니 형님 말씀이 맞으신 거 같아요.”
“그리고 너도 가주잖아. 사마세가의. 숫자는 적지만 가솔들도 있고.”
“아…….”
사마의성이 탄성을 흘렸다.
남들은 별거 아닌 말이라고 할지 모르나 사마의성에게는 아니었다.
지금의 한마디가 사마의성에게는 너무나 큰 의미로 다가왔다.
“아니야?”
“맞아요. 저도 가주예요. 제가 있는 곳이 사마세가이고요.”
“그렇지.”
많은 걸 깨달은 듯한 사마의성의 모습에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이제야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어쭙잖은 무림세가보다 사마의성의 능력이 훨씬 더 뛰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반 대협.”
“들어가시지요.”
“예.”
무당파의 순번인지 천막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두 명의 도인이 정중한 자세로 읍을 한 후 출입구를 열었다.
그런 둘에게 반호진도 한 차례 합장을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왔느냐.”
“예.”
“사마 공자와 함께 왔구나.”
“예, 방장.”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담현과 법무가 두 사람을 반겼다.
그런데 약속된 시간이 되었음에도 곳곳에 빈자리가 보였다.
반호진과 사마의성이 거의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방주님은 좀 어떻습니까?”
“내외상이 심하셔서 당분간은 거동이 힘들다고 합니다.”
본래 자리의 주인이었던 개왕을 대신해서 앉은 오중건을 향해 반호진이 물었다.
포달랍궁주를 상대하느라 개왕의 부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물어 본 것이었다.
그런데 오중건의 표정대로 개왕의 상처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많이 심각한 모양이군요.”
“그렇다고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닙니다. 반년 정도 제대로 요양을 하면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행이네요.”
“방주님보다는 남궁 대협과 팽 대협, 일우 장문인이 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법무의 옆자리에 앉은 반호진을 일별한 오중건이 한쪽의 빈자리를 쳐다봤다.
바로 남궁호와 팽만철, 일우, 당우혁의 자리였다.
개왕을 대신해 자리를 채운 오중건과 달리 네 사람의 자리는 아직 비워져 있었다.
“내상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싸웠으니 몸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겁니다.”
“이거야 원. 이겨도 이긴 것 같지가 않으니. 반쪽짜리 승리인 것 같습니다.”
오중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구천문을 괴멸시켰고 포달랍궁이 퇴각했지만 백도무림이 입은 피해도 상당했다.
숫자도 숫자지만 수뇌부의 전력 반 가까이가 이탈했기에 오중건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죽은 이가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패배한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번 전투에서 졌다면 이렇게 편하게 마주 보지는 못했을 겁니다.”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제갈문곡이 입을 열었다.
너무 승리에 도취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이렇게 침체되는 것도 사기에 안 좋았다.
어느 정도는 사기를 고양시킬 필요가 있기에 제갈문곡이 웃으며 분위기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슬슬 회의를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군데군데 빈자리가 있었으나 회의를 하기로 약속한 시간은 이미 진즉에 지났다.
그렇기에 안절부절못하던 곤륜파의 장문인 운왕이 조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로서는 한시가 급했기에 재촉하는 것이었다.
“맞습니다. 지금까지 안 왔다는 건 올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보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방만춘이 가세했다.
부상이 상당한 모양인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내상은 없는지 혈색은 괜찮았다.
“거참 성격들도 급하네.”
“오셨습니까.”
천막의 출입구가 걷히며 팽만철을 필두로 남궁호와 당우혁, 일우, 그리고 청성파와 아미파, 점창파의 장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우혁을 빼고 다 중독의 후유증 때문인지 안색이 좋지 않았으나 걸음걸이에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방주님은?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가?”
“예. 그래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허어.”
가장 먼저 반겨 준 오중건을 보며 팽만철이 탄식을 흘렸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으나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라고 하자 팽만철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십니다.”
“천만다행이군.”
“그럼 회의를 시작할까요.”
뒤늦게 참석한 이들이 자리에 앉는 걸 보며 제갈문곡이 입을 열었다.
운왕과 방만춘의 모습을 보니 회의를 서둘러 시작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얼른 시작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