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장. 검신이었다. -02
이기어검이 어깨와 옆구리를 깊게 베고 지나갔음에도 구천문주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에서 더더욱 살기를 흩뿌리며 반호진에게 달려들었다.
단 한 번.
딱 한 번만 닿으면 모든 것이 끝났기에 구천문주는 고통을 참으며 단 한 가지만 생각했다.
바로 반호진의 몸뚱이에 자신의 독을 쑤셔 넣는 것만 말이다.
그러나 그의 독보다 반호진의 오른손이 움직이는 게 조금 더 빨랐다.
서걱.
익숙한 파육음과 함께 구천문주의 시야가 비틀어졌다.
동시에 몸이 기우뚱거리는 게 느껴졌다.
스극.
그리고 또 한 번 파육음이 들려왔다.
방금 전보다 좀 더 크게.
“어……라?”
구천문주의 동공이 서서히 확대되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였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양팔이 잘려 나갈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기에 구천문주는 지금 보이는 광경이 꿈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에 더더욱 환상처럼 보였다.
“고통은 없을 거다.”
쩌어억!
멍한 표정의 구천문주를 무심히 바라보며 반호진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구천문주의 몸이 양분되었다.
오른손으로 펼친 검격에 반 토막이 난 것이었다.
그리고 얼빠진 얼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쿠웅!
“무, 문주님!”
“어떻게 이런 일이……!”
처참한 모습으로 지면에 추락한 구천문주의 모습에 여기저기에서 당혹성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다들 경악한 것이었다.
반호진이 강하다는 사실은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지만 그래도 구천문주가 당연히 이길 거라고 구천문도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반호진이 이기자 구천문도들은 아연실색했다.
“지금이다! 몰아붙여!”
“복수의 시간이 왔다! 모조리 죽여!”
“전부 쓸어버려!”
구천문도들이 충격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제갈문곡이 소리쳤다.
지금 만들어진 틈을 그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쌔애애액!
그리고 그건 반호진도 마찬가지였다.
기세를 탄 이상 이 기회를 충분히 이용해야 했다.
“끄억!”
“컥!”
구천문주를 처치한 반호진이 그다음으로 노린 건 천좌들이었다.
비록 경쟁에서 패배해 구천문주가 아닌 천좌의 자리에 만족해야 하는 여덟 명이었으나 그들이 이룩한 경지는 결코 얕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괜히 남궁호와 팽만철, 일우가 고전한 게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가장 먼저 천좌들부터 공격했다.
이미 당우혁의 가세로 균형이 무너진 상태였기에 반호진이 참전하자 결과는 순식간에 나왔다.
“제기랄!”
“빌어먹을!”
가뜩이나 열세인 상황에서 반호진의 소천검이 사각에서 파고들자 제아무리 천좌들이라도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반호진의 검에는 구천문주의 피가 묻어 있었기에 닿는 순간 즉사였다.
“미쳤네.”
“아무리 힘을 빼놓았다고 하나 그래도 너무 허무한데.”
독공만큼 고하(高下)가 명백한 분야도 없었다.
하위의 독은 상위의 독에 절대 저항할 수 없기에 천좌들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 모습에 팽만철과 남궁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쉽게 천좌들이 쓰러질 줄은 몰라서였다.
“여, 여기 좀……!”
그러나 모든 곳의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사선을 넘나들며 가까스로 버티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인 방만춘이 숨을 고르는 세 사람을 보며 도움을 청했다.
“도와달라는데?”
“썩 내키지가 않는데.”
간절한 방만춘의 외침에도 팽만철과 남궁호는 물론이고 당우혁도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반호진에게 한 짓을 알았기에 선뜻 도와주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또한 무위가 공동파의 장문인답지 않았기에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꼭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지 않나?”
당우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청성파의 장문인이 방만춘에게 달려갔다.
세 사람이 꼼지락대는 사이 청성파 장문인이 움직인 것이었다.
물론 그가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반호진 덕분이었다.
청성파 장문인이 장로들과 힘겹게 상대하던 오천좌를 반호진이 쓰러뜨려 주었기에 방만춘에게 갈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대인배라니까.”
“그래서 내 사윗감이지.”
“어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사윗감이라고 말하는 팽만철을 노려보며 당우혁이 버럭 했다.
그런데 그건 남궁호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아직 포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헛소리는 하지 않는 게 좋아.”
남궁호가 으르렁거렸으나 팽만철은 뱉은 말을 회수하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단 한 명이 가세한 것뿐인데 전황이 이렇게 급변할 줄이야.”
“그만한 실력자니까.”
당우혁도 더 이상 입씨름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시선을 돌려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반호진을 바라봤다.
뒷짐을 지고서 유유히 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절대고수 같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여덟 글자가 절로 떠오른다고나 할까.
“우리도 이제 그만 움직이자고. 숨을 고르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뒤처리까지 저 아이에게 맡길 수는 없지.”
“너희 둘은 치료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 더 싸울 수 있네.”
당우혁의 말을 남궁호는 단칼에 잘랐다.
내상이 도진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싸울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천좌들 수준이라면 힘들겠으나 그 아래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이 정도 내상에 골골될 나이는 아니니까!”
팽만철도 잔소리는 듣지 않겠다는 듯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성급한 성격답게 곧바로 행동한 것이었다.
“쯧쯧쯧!”
창백한 안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달려 나가는 팽만철을 보며 당우혁이 혀를 찼다.
아직도 자신이 이팔청춘으로 아는 것 같아서였다.
불혹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철이 들지 않은 팽만철의 모습에 당우혁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이내 땅을 박찼다.
푸스스스…….
마지막으로 버티던 이천좌가 쓰러지는 걸 확인한 반호진은 소천검을 회수했다.
하지만 섣불리 만지지는 않았다.
독공의 고수들이 흘린 피가 묻어 있었기에 반호진은 삼매진화로 혹시라도 검에 남아 있을 독들을 태워 버렸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포달랍궁 쪽을 바라봤다.
‘아직 나서지 않았네. 무슨 생각이지?’
반호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구천문 쪽은 수뇌부가 사라졌기에 빠르게 무너지는 중이었다.
한데 그 사실을 눈으로 직접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포달랍궁의 대응은 소극적이었다.
분명 구천문 다음에는 자신들 차례라는 걸 알 텐데도 포달랍궁주는 여전히 처음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신이 있다는 건가?’
계속해서 이기어검을 펼쳤으나 반호진의 공력은 절반 정도 남아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내공을 운용한 덕분이었다.
사마의성이 있는 곳을 향해 이동하면서도 공력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며 반호진은 포달랍궁 쪽의 전황을 꼼꼼히 살펴봤다.
혹시나 포달랍궁이 비밀리에 준비한 흉계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탁.
그러나 반호진이 본래 위치에 도착할 때까지 포달랍궁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물러나는 느낌이었다.
미세한 차이였지만 반호진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구천문을 미끼로 삼은 거 같아요.”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예. 이미 회생하기 힘든 수준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고요.”
승기를 잡았다는 걸 증명하듯 제갈문곡은 구천문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지금의 기세를 몰아 구천문을 괴멸시킬 생각인 듯싶었다.
덕분에 사마의성은 여유가 생겨 포달랍궁 쪽의 전황을 살폈다.
“구천문을 버리는 패로 사용한다라.”
“어떻게 보면 포달랍궁에게는 이득이에요. 구천문을 밀어붙일수록 우리의 피해도 덩달아 커지니까요. 물론 이러한 계획의 밑바탕에는 자신감이 서려 있어야 하지만요.”
처음에는 사마의성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암만 생각해 봐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고 판단해서였다.
하지만 여기에 북해빙궁을 추가하면 포달랍궁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되었다.
“그래도 어부지리를 노릴 정도는 아니야.”
“맞아요. 그래서 저는 전략적 퇴각도 예상하고 있어요. 굳이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일단 저희 쪽 사기가 많이 오르기도 했고요.”
구천문주가 죽자 수많은 무인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쳤다.
승리했다는 사실에 없던 힘도 샘솟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고스란히 다른 이들에게로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또한 그걸 포달랍궁이 모를 리 없었다.
“가장 좋은 건 이 자리에서 끝을 내는 건데…….”
반호진의 두 눈이 번뜩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구천문주를 잡았기에 반호진은 아직 여력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돌아와서도 내공 회복에 신경 쓰고 있었고.
더욱이 포달랍궁주는 북해빙궁주에 버금가는 강자인 만큼 두 존재가 합류하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어쩌면 지금이 둘을 만나지 못하게 만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꽈아아앙!
그런데 그때 굉음과 함께 살 떨리는 존재감이 전장을 휘어잡았다.
서장칠성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삽시간에 전장 전체로 뻗어 나갔던 것이다.
“으음!”
“흡!”
그와 동시에 서조운과 정이륭이 침음을 흘렸다.
무시무시한 존재감에 자기도 모르게 침음이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동시에 포달랍궁 쪽의 전투가 멈췄다.
마치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포달랍궁의 혈승들이 뒤로 일제히 물러나며 오직 단 한 명만이 전장으로 걸어 나왔다.
저벅저벅.
고요한 전장을 왜소한 체구의 혈승이 가로 질렀다.
그러나 작은 체구와 달리 혈승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도는 천하를 뒤덮을 정도였다.
그걸 느꼈기에 백도무림의 무인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물러나거라.”
“너희도 물러나.”
홀로 걸어오는 혈승의 모습에 담현이 입을 열었다.
지금 다가오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기에 제자들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운상을 비롯해서 개왕과 운왕, 성중경과 황보세가주도 제자들과 가솔들을 퇴각시켰다.
절대고수에게는 숫자가 무의미하단 걸 알았기에 미리 물린 것이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 모양이야.”
“혼자서 가능하겠소?”
“그러니까 혼자 왔겠지?”
담현의 물음에 왜소한 체구의 혈승, 포달랍궁주가 빙긋 웃었다.
하지만 담현을 비롯해서 수장들은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미소 짓는 포달랍궁주에게서 무지막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서였다.
담현은 물론이고 가장 내공이 깊은 개왕마저도 기가 질릴 정도의 기도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그래도 궁주의 실력이 궁금하던 차였소이다.”
“호오. 혼자 나설 생각이더냐?”
겉모습은 비슷할지 모르나 실제 나이는 차이가 꽤 났다.
그걸 알아서인지 포달랍궁주는 천하의 법왕을 어린아이처럼 대했다.
일부러 기를 죽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얕은 수에 흔들릴 담현이 아니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않겠소이까.”
“후후후.”
담현의 말에 포달랍궁주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담현을 지나 운상과 개왕, 운왕을 지나 수장들을 가볍게 훑었다.
나중에는 자세히 볼 가치도 없다는 듯이 대충 훑어보자 시선이 스쳐 지나간 수장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무시도 이런 무시가 없어서였다.
“아직 궁주보다는 훨씬 젊기도 하고.”
“체력과 육체적인 능력으로 비벼 보겠다. 나쁘지 않은 전략이야. 허나 아무리 발악해도 좁혀지지 않는 격차라는 게 존재하지. 그러니 애초부터 다 같이 달려드는 게 나을 거야. 어차피 나중에는 그리될 테니까.”
“처음으로 중원에 와서 그런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구려.”
“푸흣! 푸하하하!”
주둥아리 좀 그만 나불거리라는 말에 포달랍궁주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소림사의 방장답지 않은 호전적인 모습이 재미있어서였다.
하지만 웃는 모습과 달리 포달랍궁주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시간이 갈수록 사나워져 갔다.
파아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