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2장. 연합 대 연합. -01
다만 문제는 구천문이 그걸 순순히 허락할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말 그대로 구천문도 수백 명을 갈아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만큼 천좌들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이 기회를 살펴 백도무림에 최대한 피해를 입힐 생각이었다.
새벽에 실패한 걸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큰 피해를 입혀야 했다.
“더 이상은 못 간다!”
“여기까지다!”
그런데 그때 백도무림의 진영에서 형형색색의 빛줄기들이 솟구쳤다.
점창파와 화산파, 남궁세가, 하북팽가에 이어 이번에 합류한 공동파의 장로들이 일제히 강기들을 뿌려 댄 것이었다.
그 결과 광신도처럼 달려들던 구천문도들이 달려오던 중에 폭발했다.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도중에 날려 버린 것이었다.
“이익!”
그 광경에 천좌들이 이를 갈았다.
기세를 몰아 정신없이 밀어붙일 생각이었는데 그 계획이 너무나 허무하게 막혀 버려서였다.
“물러나!”
시간이 갈수록 접근하기는커녕 돌격 도중에 부하들이 죽어 나가자 결국 팔천좌가 고성을 질렀다.
이대로는 무의미한 손실만 늘어날 것 같아서였다.
그사이 각 파의 장로들이 만들어 준 틈을 이용해 무인들이 황급히 움직였다.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빠르게 부축해 후방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으으…….”
“제, 제발 살려 주세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태가 다들 썩 좋지 못했다.
겨우겨우 살아만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이 파리한 안색에 사천당가의 무인들이 다급히 해독약을 먹었으나 상태가 호전되는 이들은 소수였다.
이내 고통스러워하다가 죽었다.
“으음!”
“허어…….”
특히 군소방파의 피해가 극심했다.
평제자들은 물론이고 장로들까지도 중독에 신음하다 죽는 광경에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어제의 전투로 전우의 죽음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가슴이 무거워졌다.
“역시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겠어.”
“내 생각에도.”
“제자들과 장로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침통한 얼굴로 주검이 된 동료들을 바라보던 무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익숙한 목소리에 몸이 절로 반응한 것이었다.
한데 앞으로 나서는 팽만철, 남궁호, 일우의 안색이 그리 좋지 못했다.
해독이 되기는 했으나 아직 여독이 남아 있어서였다.
쿵! 쿵! 쿵! 쿵!
네 사람을 시작으로 점창파와 공동파의 장문인, 그리고 각 파의 장로들이 앞장서자 반대쪽에서도 일단의 무리가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바로 어제 이들과 혈투를 벌였던 구천문의 천좌들이었다.
초반부터 제대로 한 방을 먹였다고 생각해서인지 다가오는 천좌들의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잔뜩 서려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나 역시. 그러니 오늘은 좀 바꿔 봐야 하지 않겠나.”
“일그러진 얼굴이 너무 보고 싶은데.”
팽만철이 히죽 웃었다.
옆에 서 있는 남궁호의 말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조심해라. 특히 중독에. 이번에 또 중독되면 위험하다.”
어느새 다가온 당우혁이 두 사람을 비롯해서 어제 중독되었던 이들을 한 번씩 바라봤다.
다들 천하를 호령하는 고수들이지만 몇몇 극독은 그런 고수들조차 단숨에 녹여 버릴 정도로 대단했다.
구천문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천좌들 정도면 충분히 그렇게 만들 역량이 있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잔소리는 그만하라고. 어제 그만큼 했으면 됐잖아. 우리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럼 치료도 안 해 줘도 되겠네?”
“오늘은 치료할 일이 없을 거야. 중독되지 않을 테니까.”
팽만철이 자신만만한 어조로 등에 메고 있던 거패도를 뽑아 들었다.
그런데 남궁호와 일우는 물론이고 장문인들의 기세 역시 비슷했다.
이번에는 절대 당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일별한 당우혁이 두 손을 풀었다.
사실 말은 안 했지만 그도 같은 각오였다.
오늘은 반드시 결판을 낼 생각이었다.
스스슥!
구천문주가 있는 곳을 노려보는 당우혁의 뒤로 장로들이 섰다.
먼저 비겁한 수를 사용한 만큼 당우혁도 똑같이 나갈 작정이었다.
“어라?”
“협공하실 생각인가?”
당우혁은 물론이고 남궁호와 팽만철, 일우, 점창파와 청성파, 아미파의 장문인들 뒤로 흉흉한 기세를 풍기는 장로들이 서는 걸 본 서조운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사람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하고 고고한지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건 선우방과 모용척도 마찬가지인 듯 서조운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현실적인 판단이에요. 어제와 같은 몸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은 평소와는 다르니까요.”
“그래도 저렇게 마음을 먹기 되게 힘들었을 텐데. 저거 진짜 쉽지 않은 일이야.”
“전쟁이잖아요. 그걸 감안하신 거겠죠. 일반적인 비무였다면 절대 저러지 않았을 거예요. 비무는 연기하는 게 가능하지만 전쟁은 날짜를 합의할 수가 없으니까요.”
놀란 일행들과는 달리 사마의성은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실과 이상은 다른 것처럼 인간은 타협을 할 줄 알아야 했다.
자존심도 살아 있을 때나 챙길 수 있는 법이었다.
또한 구천문이 먼저 비겁하게 나왔기에 명분도 있었다.
그걸 구천문 역시 알고 있기에 아까 전에 문도들을 희생시킨 것이었다.
지금의 상황을 예상했을 테니까.
‘그래도 부족해.’
어제와 달리 이번에는 상일기도 앞으로 나섰다.
가주들과 장문인들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기에 더는 지켜보기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제갈문곡이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급히 공동파를 수혈했으나 냉정히 말해 턱없이 부족했다.
공동파가 구대문파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라고 하나 화산파나 청성파, 아미파에 비하면 급이 많이 떨어지는 게 현실이었다.
‘일단 방만춘은 실력도 없지.’
천하십대고수들과 나란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같은 반열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방만춘의 어깨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지만 콧구멍도 벌렁거리고 있을 것이었다.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전쟁은 현실이었다.
‘제갈 대협께서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테고. 따로 준비한 게 있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미봉책?’
사마의성의 시선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제갈문곡에게로 향했다.
구천문뿐만 아니라 포달랍궁 쪽 전선도 살펴야 했기에 제갈문곡의 시선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지금요?”
“응.”
제갈문곡에게 향해 있는 사마의성의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반호진이 입을 열었다.
마치 지나가는 투로 말이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구천문 쪽으로 이동하는 선우세가와 모용세가의 무사들을 주시했다.
정확하게는 선우방과 모용척을.
“당장 떠오르는 최선책은 한 가지예요. 근데 그건 실행하기가 어려우니 지금처럼 차선책을 사용할 수밖에요. 여기에 한두 가지를 추가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어떤 걸?”
“지리적 이점이 있는 만큼 이걸 충분히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병력 보충이 상대적으로 저희가 더 수월하니까요. 묘강, 서장과 인접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단순히 숫자만 따지면 중원이 월등하죠. 거기에 우연히 얻은 묘강의 독도 있으니까요. 가지고 있는 걸 적재적소에 활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요.”
“최선책은 뭔데?”
“형님요.”
사마의성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현재 백도무림이 지닌 가장 강력한 패 중 하나는 누가 뭐래도 반호진이었다.
더욱이 나이가 적지 않은 다른 천하십대고수들과 달리 반호진은 체력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창창했다.
단순히 실력만 따지자면 무림십왕 중에서도 최상위권이었기에 사마의성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날 너무 띄워 주는데.”
“아부가 아니라 사실이니까요. 냉정하게 말해서 이곳에 모인 분들 중에 철혈마황을 단독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어느 정도 맞상대가 가능한 분들은 계십니다. 하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저는 형님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마의성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이 났다.
단 한 칼에 피를 흩뿌리며 튕겨 날아가던 남궁호의 모습이 말이다.
그런 철혈마황을 쓰러뜨린 게 반호진이었다.
그때와 달리 이곳에는 법왕도 있고, 검왕도 있었으나 사마의성은 두 사람이 반호진보다 강할 거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 혼자서는 이 전쟁을 끝낼 수 없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님께서 이렇게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요. 정확하게는 포달랍궁주 때문이지 않습니까? 구천문주와 포달랍궁주는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가 없으니까요.”
“역시 머리가 좋다니까.”
“이거로 형님께 간택받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사마의성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말이다.
“어째 점점 척이를 닮아 가는 것 같은데. 그러지 마. 척이는 한 명으로 족해.”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수상하단 말이지.”
“구천문이요?”
“응.”
반호진이 미간을 좁혔다.
구천문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포달랍궁과 달리 이미 한판 붙었었던 만큼, 거기에 자의적이라고는 하나 퇴각했던 것 역시 사실이었기에 자존심 회복을 위해서라도 저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구천문은 너무 미련하게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저도 이해가 안 돼요. 동맹을 맺었으면 당연히 보조를 맞추는 게 정상인데 지금의 구천문은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요. 무리하면 무리할수록 포달랍궁에 어부지리를 준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저희를 확실하게 이길 자신이 있거나.”
안 그래도 사마의성 역시 구천문의 행보가 이해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제의 전략이 성공했다면 또 모르겠으나 실패했었다.
그렇다면 더욱 신중하게 전투에 임해야 하는데 구천문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공격적으로 나왔기에 사마의성은 의아했다.
“꿍꿍이속이 있겠지만 중요한 건 그조차도 이용해야 한다는 점이지. 우리로서는 나쁠 거 없으니까.”
“일단 하나라도 확실하게 잡는 게 중요하니까요.”
반호진의 말이 맞았다.
분명 구천문은 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을 터였다.
그걸 알아낸다면 상대하기가 수월하겠으나 문제는 구천문이 그렇게 녹록한 상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백도무림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었다.
‘결국 승리는 잘 싸운 쪽이 가져가는 법이니까.’
야생만 하더라도 먹이사슬은 절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이지 않았다.
호랑이도 늑대 무리에게 잡아먹히는 게 야생이었다.
때문에 사마의성은 구천문, 포달랍궁 연합에 절대고수가 더 많다고 하더라도 백도무림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절대고수는 분명 승패를 좌지우지할 엄청난 전력이지만 그렇다고 뒤집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할 수 있어. 이미 몇 번이고 그래 왔고.’
단합력이 늘 약점으로 꼽히는 중원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그럼에도 언제나 마지막에는 승리했던 게 중원무림이었다.
비록 힘겹고 피투성이인 승리일지라도 이긴 건 이긴 것이었다.
사마의성은 이번 역시 그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어려울수록 잘 싸우는 신기한 족속이 무림인들이었다.
‘형님께서는 역시 저쪽이 신경 쓰이시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