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장. 나만의 방식으로. -04
반호진은 능글맞게 반문했다.
구천문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확실히 인원이 엄청 많기는 하지. 아무리 우리도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고 하나 수적으로 크게 밀리지 않았으니까. 근데 이 독을 챙겨도 구천문을 상대로는 소용없지 않나?”
“구천문한테는 그렇지. 근데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구천문만 있는 건 아니잖아?”
“어?”
“포달랍궁도 있잖아. 심지어 서로를 믿지 못해 숙영지도 따로 만들었지.”
반호진은 처음부터 포달랍궁을 생각하고 있었다.
포달랍궁의 전력은 분명 막강하지만 독이 안 통하는 세력은 아니었다.
오히려 독의 위험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 포달랍궁이었다.
“기발하네. 진짜 상상도 못 했어.”
“이간질까지 시키면 금상첨화인데, 그건 힘들겠죠?”
순수하게 감탄하는 선우방과 달리 사마의성은 입맛을 다셨다.
아직 동맹이 끈끈하지 않은 만큼 이간질을 시키기에 아주 좋았다.
다만 문제는 포달랍궁이 순순히 넘어갈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근데 나중에는 또 모르지. 우리와 포달랍궁만 피해가 크다면 그땐 가능할 거야.”
“근데 그렇게 되면 안 되겠죠.”
“맞아.”
은근슬쩍 끼어드는 서조운의 말에 반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좋은 건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고 구천문과 포달랍궁을 전멸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끼는 것보다는 당장 쓰는 게 좋다고 반호진은 생각했다.
보관할 수 있는 기간이 정확히 얼마인지도 모르는 상태이기도 했고.
“최대한 빨리 사용해야겠네요.”
“그 전에 당가주님께 가져가야지.”
잘 모를 때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가장 좋았기에 반호진은 암살대가 품에 가지고 있는 상태 그대로 포장했다.
암살대원의 야행복을 이용해서 말이다.
그러고는 다 함께 숙영지로 돌아갔다.
***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지만 그럼에도 제갈문곡은 정신이 맑았다.
계속 긴장해 있기에 피곤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그 이유를 제갈문곡은 잘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로군. 내가 살아 있다고 느낀 게.’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전경을 보며 제갈문곡은 옅게 웃었다.
이런 감정을 느낀 게 정말 오랜만이어서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긴장감과 부담감에 짓눌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겠지만 그는 달랐다.
오히려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내 손으로 끝낼 수 있어.’
비록 전장에 직접 나서지는 못했으나 제갈문곡은 그만의 방식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인정도 받고 있었고.
제갈문곡은 그게 너무나 기뻤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나쁘진 않네. 그보다 몸은 어떤가?”
“보다시피.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문제지.”
“아무래도 힘들겠지?”
제갈문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제 보고를 받긴 했으나 밤사이에 차도가 있을지도 몰라서였다.
“힘들지. 이룬 경지가 있어서 죽지 않는 거지 독이 약한 건 아니니까.”
“평생 가지고 가야 하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한두 달 정도 요양하면 완치할 수 있네.”
“으음!”
제갈문곡이 침음을 흘렸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는데 차도가 없는 듯해서였다.
“문제는 이 시간이 아무것도 안 하고 치료에만 집중했을 때 걸리는 시간이라는 거지.”
“계속 전투에 나선다면 상태가 더 심해지겠군.”
“맞네. 근데 누구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거지. 상황이 좋지 않은 게 사실이기도 하고.”
당우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죽을 정도의 중상은 아니지만 아직 완벽히 회복이 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전투를 치르면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뿐만 아니라 제 실력을 발휘하기도 힘들었다.
잘 쳐줘 봐야 본 실력의 구 할 내지 팔 할 정도였다.
“만류하기에는 대체할 수 있는 무인이 없네.”
“그걸 알고 있으니까 이러는 거겠지.”
“쉽지 않은 문제로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그래도 최악은 아니지 않나. 만약 어제 빼내지 못했으면 나도 위험했을 것이네.”
동갑은 아니더라도 같은 시대를 살아왔고, 이래저래 부딪치고 어울린 적이 많았기에 당우혁은 편하게 말했다.
사석이기도 했고.
그래서 당우혁은 솔직하게 말했다.
“위험하긴 했지. 나조차도 자살 공격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당할 줄도 몰랐고.”
“짜 놓은 함정을 빠져 나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비겁하기도 했고. 하지만 두 번은 안 당해.”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나. 그보다 반 소협이 구한 독은 어떤가?”
“우리가 연구할 거 빼고는 그대로 사용해도 되네. 보관을 아주 잘해 놓았어.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좋군.”
제갈문곡이 눈을 빛냈다.
사용할 수 있는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더욱이 그 패가 공짜로 얻은 것이었기에 제갈문곡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근데 암살대가 올 거라는 건 어떻게 안 거라던가? 자네는 아닐 테고. 개방인가?”
“방주님과 후개도 몰랐다고 하더군.”
“두 사람도 몰랐다고?”
당우혁이 눈을 껌뻑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개방의 당대 방주와 후개조차도 모른 사실을 반호진이 알고 있었다고 하자 놀란 것이었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반호진이 금가장, 하오문과 인연이 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이곳의 모든 상황을 전달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설사 그 정도의 사이라고 해도 철혈성 때를 생각하면 금가장과 하오문은 중립을 지킬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기도 했고.
그러니 개방도 모르는 정보를 반호진이 알고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내가 전달받기로는.”
“그럼 어떻게 알아낸 거지?”
“직감일 수도 있고, 무언가를 운 좋게 발견한 것일 수도 있고. 사실 암습에 대한 대비는 우리도 하고 있었지 않나.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니까. 다만 반 소협은 거기서 한발 더 나간 거지.”
“흐음.”
당우혁이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운이라고 하기에는 반호진의 행동에서 확신이 느껴졌다.
“결과적으로는 좋게 되지 않았나. 나도 궁금하기는 하나 반 소협이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해 줄 성격도 아니고.”
“절대 아니지.”
당우혁이 격하게 긍정했다.
적어도 제갈문곡보다는 반호진에 대해서 잘 알기에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었다.
“그러니 별수 있나.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당장 당면해 있는 문제가 크기도 하고.”
“준비는 잘 되어 가고?”
“늘 그렇듯이 최선을 다할 뿐이네.”
“그건 의미가 없어. 중요한 건 결과지.”
“알고 있네.”
제갈문곡이 빙그레 웃었다.
과정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게 결과라는 걸 제갈문곡도 알고 있었다.
“다행이군.”
“근데 자네는 결과가 보이는데도 포기하지 않는 것 같던데.”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확실하게 나오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지.”
“기준점이 모호한 거 같은데. 너무 엿가락 같네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으나 당우혁은 짐짓 모르쇠로 나갔다.
그 역시 제갈문곡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으나 문제는 포기가 안 된다는 점이었다.
“포달랍궁 쪽과 같이 할 건가?”
“그게 가장 좋지 않겠나. 혼란은 이왕이면 크면 좋으니까.”
당우혁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제갈문곡 역시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놀리는 것도 적당히 놀려야지 다음이 있다는 걸 알아서였다.
“어?”
뎅뎅뎅뎅!
보초가 울리는 경종 소리보다 먼저 당우혁이 적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떠오르는 태양빛으로 인해 서서히 흩어지는 안개 사이로 구천문이 움직이고 있었다.
“포달랍궁도 움직이는군.”
“아침잠도 없는 녀석들.”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말일세. 그런데 분위기가 어제와는 묘하게 다르군.”
툴툴거리는 당우혁과 달리 제갈문곡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구천문의 진영을 훑었다.
왠지 모르게 어제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어제와 똑같이 진군하는 포달랍궁으로 인해 더욱 대비되는 느낌에 제갈문곡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따 보자고.”
“살아서 봤으면 좋겠군.”
“당연히 그럴 것이네. 난 서린이 자식은 보고 갈 거거든.”
갑자기 움직이는 포달랍궁과 구천문으로 인해 백도무림의 진영도 부산스러워졌다.
적들의 진격에 황급히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구천문 쪽에서 수백 명이 뛰쳐나왔다.
육탄돌격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독낭(毒囊)에 대비해!”
가장 앞에 있던 구천문도들이 득달같이 달려오자 곳곳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독낭에 혹독하게 당했기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한데 구천문이 노린 건 그게 아니었다.
“구천문을 위하여!”
“구천문 만세!”
상대가 독인이었기에 수뇌부는 절대 섣불리 다가가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근접전을 벌여서 좋을 게 없어서였다.
그래서 마주 달려가지 않고 자리를 지켰는데 구천문은 바로 그 점을 역이용했다.
최대한 접근한 다음에 몸을 터트렸던 것이다.
퍼퍼퍼펑!
난전을 유도할 것처럼 달려든 구천문도들이 몸을 폭사하자 수십, 수백 개의 육편(肉片)들이 비산했다.
미리 계획되어 있다는 듯이 대부분이 백도무림 진영을 향해 날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육편보다도 더 무서운 건 바로 핏방울이었다.
크고 작은 핏방울들은 그 자체로도 극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적게는 수 년, 많게는 수십 년 동안 뒤섞이고 농축된 독혈은 존재 자체가 살인무기였다.
치이익!
“끄아아악!”
“사, 살려 줘……!”
“내 손, 내 눈!”
갑작스러운 폭사에 무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분명 어제 수뇌부가 자살 공격에 당한 걸 보기는 했으나 그들은 그렇게라도 공격할 수밖에 없는 위치의 존재들이었다.
고작 자신들을 위해 폭사할 줄은 몰랐기에 무인들의 반응은 조금 늦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즉사 아니면 고통 가득한 죽음이었다.
“다 같이 죽는 거다!”
“구천문 위하여……!”
게다가 구천문의 폭사는 단발성 공격이 아니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듯이 자살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선두의 구천문도가 폭사해서 공간을 만들면 뒷열의 구천문도가 파고들어 몸을 터트렸다.
그러자 전선이 순식간에 무너지며 난장판으로 변했다.
“미, 미친!”
뭐에 홀린 것마냥 몸을 폭사시키는 구천문도들의 모습에 백도무림의 무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났다.
구천문도들이 흩뿌리는 광기에 기가 죽은 것이었다.
거기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성과 신음 소리에 다들 몸을 사렸다.
전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두려움에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휘이익!
그때 독혈로 이루어진 혈무(血霧) 사이로 커다란 무언가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사람 크기 정도 되는 덩어리였는데 혈무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피, 피해!”
느릿하게 날아오는 덩어리의 정체를 가장 먼저 파악한 점창파의 제자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말보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덩어리가 먼저 아군을 덮쳤다.
푸학!
“이 미친 새끼들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덩어리는 바로 독살당한 아군의 시체였다.
독에 중독된 상태로 죽었기에 아군의 시체 역시 미약하지만 독을 품고 있었다.
그걸 구천문은 무기로 삼은 것이다.
“으아아아!”
“침착해! 일단 물러나야 해!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 해!”
“죽어라!”
날아오는 시신 중 지인이 있던 모양인지 몇몇 무인들의 눈이 뒤집어졌다.
두려움을 광기가 잠식한 것이었다.
하지만 평정심을 잃고 흥분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였다.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던 무인들은 앞서 죽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중독되어 쓰러졌다.
“뒤로 물러나!”
그 광경에 제갈문곡이 거칠게 소리쳤다.
이대로는 답이 없었기에 일단 물러난 뒤에 전열을 재정비할 생각이었다.
“어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