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14화 (214/468)

제 71장. 나만의 방식으로. -03

“생각은 나중에 실컷 해. 지금은 한 가지에만 집중해. 이기는 것에만. 위로도, 후회도 살아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거야.”

“명언이네.”

“쓸데없는 게 아니라 잠시 미뤄 두라는 거다.”

“고맙다.”

“낯간지러운 말은 하지 말고.”

선우방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준 반호진은 처참하고 잔혹한 광경을 두 눈에 담았다.

전투가 끝났다는 건 누군가가 죽었거나 다쳤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서 곡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반호진은 섣불리 그들을 위로하지도, 다가가지도 않았다.

이별의 시간은 오로지 저들의 몫이었다.

제삼자가 감히 재단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반호진은 조용히 시신들을 수습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분도 계시네요.”

“찾을 수가 없는 것일 수도 있지.”

죽음의 순간을 남긴 듯한 주검의 표정을 보며 반호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그는 과거로 돌아오면서 강해졌다.

전생의 그보다 말이다.

그러나 강해졌다고 해서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신이 아닌 이상, 아니 설사 신이라고 해도 전쟁은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에게 있어 경쟁과 탐욕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기에 애당초 완벽하게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저라도 기억해야겠어요.”

“그 마음가짐이면 됐다.”

반쯤 감긴 시신의 두 눈을 감겨 주며 반호진은 서조운과 함께 죽은 이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아직 전쟁 중이기에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 줄 수는 없었다.

하나 그렇다고 중원무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를 대충 묻는 건 반호진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이들이 있기에 지금까지 중원무림이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윽.

마음속으로 진심을 담아 명복을 빈 반호진의 시선이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상일기를 찾아갔다던 무리들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딱 전선만 지켰대요. 다른 곳을 도와주지도 않고 맡은 구역만 지켰다고 들었어요.”

“벌써 확인한 거야?”

“괘씸하잖아요. 이륭 형이랑 문주님도 궁금해하실 것 같기도 하고.”

“빠르네.”

“제가 또 궁금한 건 못 참잖아요.”

슬그머니 다가와 가려운 곳을 긁어 주듯 알려 주는 사마의성의 말에 반호진은 피식 웃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건 반호진도 마찬가지였다.

이해는 가나, 그렇다고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

삭월조차 구름에 가린 야심한 밤에 산악 지대를 가로지르는 검은 인영들이 있었다.

어둠을 휘감고서 소리 없이 접근하던 인영들은 수많은 천막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듯한 광경을 내려다봤다.

군데군데 횃불이 밝혀져 있고 보초가 있었으나 검은 야행복을 입은 이들의 안광에는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숙영지 곳곳을 살폈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흠칫!

그때 무미건조한 음성이 어둠을 갈랐다.

전방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어두컴컴한 수풀 곳곳에 은신해 있던 이들이 두 눈을 감았다.

유일하게 드러나 있는 두 눈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스스로의 은신술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나름 묘강에서는 난다 긴다 하는 이들이니까요. 중원무림으로 치자면 살문 정도의 위상일 겁니다.”

“그런데 구천문에 속해 있단 말이지.”

“정확하게는 키워진 암살자들입니다. 독에 특화된.”

저벅저벅.

듣는 이의 마음마저 평온하게 만들어 줄 것만 같은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승복을 입고 이마에는 계인이 찍힌 노승의 등장에 은신하고서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이들이 몸을 떨었다.

상상도 못 한 인물의 등장에 경악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놀라기는 일렀다.

뚜벅뚜벅.

노승에 이어 이번에는 푸른색 낡은 무복을 입은 노도인이 어둠을 가르며 나타났다.

때마침 구름 밖으로 모습을 보인 초승달로 인해 노도인의 얼굴이 드러나자 은신하고 있던 이들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노승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인물의 등장에 대경한 것이었다.

부르르르!

초면이지만 용모파기로 몇 번이고 외운 얼굴이기에 숨어 있던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정작 암습을 하러 온 건 그들이었는데 말이다.

“반응을 보아하니 빈도를 아는 모양입니다.”

“중원을 노리는 자들이 장문인과 저를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허허허.”

담현의 말에 운상이 흐릿하게 웃었다.

그로서는 딱히 달갑지가 않아서였다.

하지만 시선만큼은 은신해 있는 이들에게 향해 있었다.

특히 백 명을 이끄는 수장에게 가장 오래 머물렀다.

“아니까 더 놀랬을 겁니다. 두 분이 여기에 계실 줄은 몰랐을 테니까요.”

“저희도 있습니다!”

가장 먼저 들려 왔던 목소리의 주인공인 반호진에 이어 서조운, 선우방, 모용척, 정이륭, 사마의성이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일기까지 정이륭의 옆에 서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이들은 숨이 턱 막혔다.

동시에 너무나 곤혹스러웠다.

한창 쉬고 있어야 할 인물들이 줄줄이 나타나서였다.

“나는 예상한 네가 더 놀랍구나. 솔직히 헛걸음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순순히 물러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서이지 않겠습니까.”

평온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담현과 반호진의 모습에 백 명으로 이루어진 암살대를 이끌고 온 대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모두 물러난다!

구천문주에게서 특명을 받았으나 상대가 법왕과 검왕, 명왕이라면 제아무리 암살대라도 답이 없었다.

심지어 숙영지에 파고들기도 전에 발각당했기에 암살대주는 임무를 계속 수행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확하게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는 게 맞았다.

이대로 진행해 봤자 무의미한 죽음만 있을 뿐이기에 대주는 망설이지 않았다.

“흐음. 이거 어쩌나. 오는 건 마음대로인데, 가는 건 아냐.”

쌔애애액!

소리 없이 이동하던 암살대를 향해 은빛 섬광이 번뜩였다.

허리춤에 있던 검이 저절로 두둥실 떠올라 날아간 것이었다.

-흩어져!

그와 동시에 대주가 전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맞서 싸운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나이는 어릴지 몰라도 반호진은 천하십대고수와 같은 반열에 있는 무인이었다.

고작해야 암살대 따위가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대주는 망설이지 않고 퇴각을 명했다.

서걱.

하지만 문제는 반호진의 말대로 도망치고 싶다고 해서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은신술에는 자신이 있지만 그건 일반적인 무인들을 상대할 때였다.

이 자리에는 천하십대고수급 무인이 무려 넷이나 있었다.

반호진의 이기어검에 십여 명이 순식간에 자상을 입고 쓰러졌다.

웅웅웅!

거기에 운상은 태극검을 펼쳐서 암살대를 끌어당겼다.

막대한 인력을 만들어 아예 잡아들였던 것이다.

스윽.

거기다 담현과 상일기가 가세하니 도주하고 싶어도 도주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침투와 암살에 모든 능력이 특화되어 있다 보니 무인으로서의 무력은 보잘것없는 실력이었다.

독에 능하기는 하나 여기 있는 일행들은 웬만한 독이 아니면 통하지 않았다.

“잔챙이들은 저희가 잡겠습니다!”

“죽여도 상관은 없는데, 물건은 가급적 망가뜨리지 마.”

“옙!”

도망치는 순간 붙잡힌 구천문의 암살대원들이 하나둘 바닥에 처박혔다.

인력(引力)에 끌어당겨져서 오든, 아니면 강제로 부상을 입고 날아오는 족족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거칠게 바닥에 처박히면서도 신음 소리는 일절 없었다.

나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는 듯이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것이었다.

쿵! 쿵! 쿵! 쿵!

잠시 후 운 좋게 제법 멀리까지 도망쳤던 나머지 암살대원들이 반호진의 앞에 떨어졌다.

일행들이 죄다 잡아 온 것이었다.

제 딴에는 반항을 좀 했는지 곳곳에 상처를 입었으나 죽은 암살대원은 없었다.

“실력들이 제법이야. 찾아내는 데 고생 좀 했어.”

“그럴 수밖에. 구천문에서 고르고 고른 인원일 텐데. 괜히 백 명만 보낸 게 아냐.”

“근데 실토를 할까? 고문해도 소용없을 것 같은데.”

선우방이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살수로서 키워진 이들이 얼마나 입이 무거운지 잘 알아서였다.

고문에 해박한 기술자가 있다면 모를까 이 상태로는 심문하는 게 쉽지 않을 터였다.

“안 해도 돼. 어차피 이들의 목표는 분명하잖아.”

“독을 풀려는 것이겠지? 식량에.”

“할 수 있다면 하겠지만 최우선적인 임무는 아냐. 이들의 목표는 정해져 있어. 바로 요인 암살이지.”

“팽가주님?”

“역시 미래의 장인어른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 그런가. 팽가주님이 가장 먼저 나오네?”

선우방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이런 말을 꺼낼 줄은 몰라서였다.

“벌써부터 챙기는 거예요?”

“챙길 만하지. 장인어른이 될지도 모르는데. 근데 신중하게 생각해 보는 건 어때요? 아직 안 늦었어요. 진지하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놀리는 서조운과 달리 모용척은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팽수영은 반려로 괜찮을지 몰라도 장인어른으로 팽만철은 절대 아니었다.

선택지가 하나뿐이라면 모를까 굳이 하북팽가를 선택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아무것도 안 정해졌거든. 그나저나 죄송하네요. 저희들만으로도 충분했을 것 같은데.”

선우방이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이런 대화는 그만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선우방은 상일기를 시작으로 운상과 담현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괜찮네. 산책 겸 나온 거니까. 제자와 차만 마셨지 이렇게 오붓한 시간을 가진 게 오랜만이거든. 게다가 암습을 미연에 방지했으니.”

담현이 인자하게 웃었다.

결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그나 운상, 상일기였기에 이렇게 쉽게 제압한 것이지 반호진과 일행들뿐이었다면 시간이 꽤 걸렸을 터였다.

반호진이야 걱정할 게 없지만 다른 일행들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저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됐다. 근데 소지품은 왜 확인하는 것이냐?”

암살대가 오기 전 반호진은 담현을 비롯해서 상일기와 운상에게 부탁했었다.

가급적이면 죽이거나 제압할 때 최소한의 상처만 남겨 달라고 말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기에 담현은 넌지시 물었다.

“이독제독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연구도 할 수 있지만 잘만 사용하면 저희가 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허어?”

담현은 물론이고 운상과 상일기의 동공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란 것이었다.

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이 녀석들은 분명 중독된 가주님들과 장문인들을 노렸을 겁니다. 해독을 했다 하더라도 몸 상태가 정상이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런 좋은 기회가 왔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사부님께서도 느끼셨겠지만 중원과는 은신술이 살짝 다릅니다. 실력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고요. 아마 웬만한 중견고수도 지근거리까지 와야 기척을 느낄 겁니다.”

반호진의 말에 서조운을 비롯한 일행들이 얼굴을 굳혔다.

안 그래도 은신술 때문에 고생한 게 사실이어서였다.

“맞아. 솔직히 은신술은 뛰어나더라고. 정신없이 도망치는데도 기척이 거의 없었어.”

“그래도 일단 첫 습격은 막았으니까.”

“암살부대가 더 있다는 거지?”

“구천문의 규모를 생각하면 더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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