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장. 나만의 방식으로. -02
막말로 눈 뜨고 코 베인 상황이었기에 천좌들이 노성을 터트렸다.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포효했던 것이다.
하지만 천좌들의 괴성에도 검과 상일기는 멈추지 않았다.
반호진이 이기어검으로 천좌들을 공격하면 상일기가 귀신같이 수세에 몰려 있던 네 사람을 한 명씩 빼내서 후방으로 던졌다.
“감사합니다!”
날아오는 점창파의 장문인을 안전하게 받아 낸 장로가 진심을 가득 담아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그건 남궁세가, 하북팽가, 화산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체면이 구겨지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걸 따지는 이는 없었다.
전장의 한복판일뿐더러 먼저 비겁한 수를 쓴 건 구천문이었기에 각 파의 장로들은 수장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네 사람 역시 자존심이 상하기보다는 눈빛으로 상일기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만약 시기적절하게 반호진과 상일기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위험한 상황까지 갈 뻔했기 때문이다.
“잡아! 어떻게든 잡으라고!”
“이대로 놓쳐선 안 돼!”
반대로 구천문의 천좌들은 악을 질렀다.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희생된 구천문도만 백 명이 넘었다.
그것도 어중간한 독인들이 아닌 나름 중견급 인사들이었다.
바로 다음 세대의 구천문을 책임질 이들 말이다.
그럼에도 자살 공격을 지시한 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초반에 천하십대고수급들을 쓸어버리기 위해서.
한데 그게 실패한다면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몸으로라도 막아!”
“장문인을 지켜야 한다!”
“가주님을 지켜라!”
하지만 천좌들의 바람과 달리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화산파와 남궁세가, 하북팽가, 점창파의 무인들이 악착같이 전선을 유지하며 버텨서였다.
어떻게든 장문인과 가주들을 지키겠다는 듯이 버텼기에 제아무리 천좌들이라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없었다.
뻐어어엉!
거기에 상일기라는 존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명왕이라는 별호답게 상일기는 결코 만만한 무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얄밉다 못해 짜증 나기 짝이 없는 반호진의 이기어검도 있었다.
“으아아아!”
절대 정면으로 싸우지 않고 얍삽하게 치고 빠지는 둘의 움직임에 천좌들이 울부짖었다.
짜증과 조바심이 섞인 포효였다.
그러나 울분은 토해 낼 수 있을지언정 결과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전부 날려!”
그리고 이제 겨우 첫 번째 전투임에도 백도무림은 구천문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철저하게 거리를 벌리고서 검기나 강기 등으로 독인들을 공격했다.
독은 분명 위험하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몸에 접촉하든 호흡을 통해 흡입하든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퍼퍼퍼펑! 퍼어엉!
게다가 예전과 달리 지금은 질적으로도 구천문에 밀리지 않는 상태였다.
단순히 숫자만 많았던 전과 달리 현재는 고수도, 숫자도 구천문에 밀리지 않았기에 여덟 명의 천좌들은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독왕이라도!’
‘독왕만은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천좌들이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백도무림이 이렇게 대항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사천당가 덕분이었다.
독에 대한 대비는 물론이거니와 구천문을 견제하는 게 가능해서였다.
그 말인즉슨 사천당가만 없다면 독의 위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휘이익!
눈빛을 교환한 것과 동시에 여덟 명의 천좌들이 일제히 구천문주에게로 향했다.
표적인 당우혁이 구천문주와 겨루고 있어서였다.
“어림없지.”
콰아아앙!
다만 문제는 천좌들의 속셈을 상일기와 반호진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거기다 사천당가의 무인들도 본능적으로 위기를 파악했기에 전부 당우혁에게 모여들었다.
“죽여!”
“독왕만은……!”
눈치 빠른 적들의 대응에 천좌들이 서둘렀으나 안타깝게도 당우혁이 한발 더 빨랐다.
상일기의 전음을 듣고는 망설이지 않고 물러났다.
그것도 구천문주의 공격으로 일어난 반동을 이용해 훨훨 날아가자 천좌들은 닭 쫓던 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이냐!”
그 모습에 삼천좌가 도발하듯 소리쳤다.
천하십대고수이자 무림십왕 중 한 명이며 사천당가의 수장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냐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삼천좌의 도발에도 당우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떼거지로 달려온 주제에.”
“당우혁……!”
퍼퍼퍼펑!
삼천좌의 포효가 짙은 검은 연기에 갇혔다.
당우혁을 지키기 위해 달려 온 사천당가의 장로들과 무사들이 살포한 독이 퍼져 나가는 것이었다.
묘강의 독이 중원무림에 위협적인 것처럼 반대로 사천당가의 독 역시 구천문에게는 위험했다.
구천문이 독을 단단히 챙겨 온 것처럼 사천당가도 마찬가지였기에 삼천좌를 비롯해서 다른 천좌들도 섣불리 독연 속으로 달려들 수 없었다.
“흐음.”
물론 가능한 이가 있기는 했다.
묘강의 지배자이자 독공에 한해서는 천하제일이라고 할 수 있는 구천문주는 몸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멀리서 지켜보는 한 줄기 시선이 그를 지켜보고 있어서였다.
‘철혈마황을 잡은 놈이 저 녀석이란 말이지.’
구천문주의 시선이 빡빡한 전선 넘어 고고하게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청년에게로 향했다.
피가 난무하고 시체가 쌓여 가고 있었음에도 이제 고작 약관이나 될 법한 청년은 이 아비규환의 광경이 익숙하다는 듯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니, 그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전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그런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난놈은 난놈이라는 건가.’
비슷한 또래의 후기지수들은 제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는 것도 힘들어하는데 반호진은 달랐다.
온몸에서 여유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덤벼 볼 테면 덤벼 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스윽.
“문주님!”
퇴각하라는 수신호에 주변에 몰려와 대기하고 있던 천좌들이 화들짝 놀랐다.
예상했던 것보다 피해를 덜 입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구천문이 밀리는 건 아니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을 입기는 했으나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수장들이 중독당한 백도무림의 상황이 더 안 좋았다.
한데도 더욱 밀어붙이기는커녕 퇴각을 명령하자 천좌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쪽을 봐라.”
“어?”
“왜 물러나는 거지?”
구천문주는 설명 대신 북서쪽을 가리켰다.
바로 포달랍궁의 진영이었다.
그런데 물불을 가리지 않는 기질을 지닌 포달랍궁이 물러나고 있었다.
“전초전이니까. 초반에 다 쓸어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힘들다는 걸 느낀 거지. 우리와 마찬가지로. 또 오늘만 있는 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에 떨떠름한 대답이었으나 구천문주의 명령이었기에 천좌들은 따랐다.
핵심 전력이 치고받은 이곳과 달리 포달랍궁 쪽 전선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 말은 언제라도 이쪽 진영으로 넘어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기에 불만을 드러낼지언정 순순히 따랐다.
도착하자마자 전투를 시작했기에 문도들이 지치기도 했고.
스스슥!
잠시 후 천좌들의 지휘에 따라 구천문도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망치는 게 아니라 전술적인 퇴각이라는 듯이 절대 등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할 만한데?’
빠르게 물러나는 구천문과 포달랍궁을 번갈아 바라보며 반호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천하사패 중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임에도 의외로 크게 밀리지 않아서였다.
중간중간 위태로운 상황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막아 냈다.
그게 반호진은 내심 놀라웠다.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물론 반호진도 알았다.
백도무림이 강해서, 이번 전투에서 우세를 점해서 포달랍궁과 구천문이 물러난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지금의 퇴각은 전략적 퇴각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물러난 것이었다.
“후우! 어찌어찌 첫 번째 진격은 막았네요.”
반호진의 곁에서 잔뜩 긴장한 상태로 전장을 주시하던 사마의성이 이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호흡도 편하게 하지 못했다.
눈 한 번 제대로 깜빡이지 못했고.
그러나 그 대가는 확실하게 챙겼다.
“잘 봤어?”
“예. 병력 운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장을 바라보는 시야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요.”
“훔치는 것도 능력이야.”
“물론이죠.”
반호진의 말에 사마의성이 씨익 웃었다.
훔친다고 표현했으나 엄밀히 따지면 그 말은 틀렸다.
사마의성만 본 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봐서였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똑같은 걸 보고도 다른 이들은 그냥 지나쳤고, 사마의성은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뭐, 흡수하는 것도 기본적인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거니까. 당장 나만 해도 그러잖아. 같이 봤는데 받아들이는 게 완전 다르지.”
“대신 형님은 압도적은 무위를 가지고 계시잖아요. 애초에 추구하는 방향이 다른 거죠. 저는 따라 하고 싶어도 따라 할 수가 없고요.”
“반대로 네가 가려는 길을 난 완전 모르지. 그걸 아는 사람도 드물고.”
“헤헤헤.”
반호진의 칭찬 아닌 칭찬에 사마의성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칭찬이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적어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건 맞았기에 사마의성은 활짝 웃었다.
“저희 도착했습니다!”
“고생했다.”
반호진의 앞으로 서조운을 비롯해서 일행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약하고는 복귀한 것이었다.
“이 정도야 가뿐하죠!”
“천독환이 제 역할을 충분히 한 모양이야.”
“선물받은 값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형님을 닮아서 그런지 빚지는 게 영 싫더라고요.”
보는 눈이 많고 듣는 귀가 많다 보니 서조운이 목소리를 깔았다.
천독환은 분명 좋은 선물이지만 그렇기에 께름칙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건 서조운만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다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갚을 일은 많아. 그래서 다들 일부러 사천당가 쪽 위주로 움직인 거 아냐?”
“완전 귀신이라니까.”
“사람의 심리가 이렇게 무서워요. 이래서 사람들이 기름칠, 기름칠 하는 거라니까. 일단 주면 적든, 많든 돌아오잖아? 속물적이긴 해도 사실이긴 하니까.”
선우방이 피식 웃었다.
반박할 여지가 없어서였다.
“가주님들이나 장문인들은 어때? 일부러 당가주님을 비롯해서 사천당가의 장로들을 최대한 물고 늘어지던데.”
“안 그래도 슬쩍 보고 왔는데 다행히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 같아. 구천문도 나름 맹독을 준비했겠지만 사천당가도 독공이 꿀리지는 않으니까. 일단 가주님들과 장문인들의 실력이 뛰어나기도 하고. 조금 늦었으면 많이 위험했을 텐데 다행스럽게도 늦지 않게 치료를 받아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네. 근데 문제가 좀 있어.”
“당장 싸우기는 힘들겠지.”
“맞아.”
선우방은 물론이고 일행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핵심 전력인 수장들이 나서지 못하는 건 정말 큰 문제여서였다.
반면에 구천문은 피해를 입긴 했으나 핵심 전력들이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해결책을 찾는 건 수뇌부가 하는 일이니까.”
“그래.”
여기서 고민하고 걱정한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선우방은 반호진과 함께 전장을 수습하러 이동했다.
특히 또래의 무인들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자 선우방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만약 호진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두 눈도 감지 못한 채 싸늘하게 식어 버린 주검을 보며 선우방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가정이지만 자신이 이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