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장. 혈풍(血風) 속으로. -03
반면에 모용척은 달랐다.
원래부터 자기애가 강했던 인물답게 주변의 시선을 즐겼다.
마치 이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저는 형처럼 얼굴이 두껍지 않아서요.”
“그럼 형님도 얼굴이 두껍다는 거냐? 나처럼 태연하니까?”
“형님과 형은 다르죠.”
자연스럽게 반호진을 걸고넘어지는 모용척의 말에 서조운이 검지를 휘휘 흔들었다.
시선이 집중되는 건 같았으나 눈빛에 담긴 감정은 엄연히 달랐다.
그리고 가장 큰 차이점은 태도에 있었다.
거들먹거리는 모용척과 달리 반호진은 아예 무신경했다.
“허!”
“형도 알면서 왜 그래요?”
“그래. 네 똥 굵다!”
냉정하게 사실로만 때리는 서조운을 향해 모용척이 항복 선언을 했다.
다 맞는 말이다 보니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여전히 활기 넘치는구나.”
“한창 그럴 때이지 않습니까.”
“근데 정말 괜찮겠느냐?”
반호진 일행과 함께 이동한 법무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미 결정을 내린 건 알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였다.
말이 좋아 후방이지 반호진의 성격상 밀리는 전선이 보이면 바로 움직일 게 분명했다.
당우혁에게 천독환을 선물받은 건 알지만 그럼에도 법무로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형께서도 제 실력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지. 사부님 다음으로 잘 아는 게 나니까. 그러나 전쟁은 변수가 워낙 많지 않더냐.”
“잊으신 거 같은데 전쟁 경험은 제가 더 많습니다, 사형.”
“허허허.”
장난스럽게 말하는 반호진의 말에 법무가 헛웃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 반호진은 이런 대규모 전쟁을 한 번 치러 봤었다.
그걸 깨닫자 법무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사형께서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독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했지만, 그럼에도 많이 위험할 겁니다.”
“명심하마.”
법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천문은 사천당가가 맡아 주기로 했으나 모든 독인들을 막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또한 독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 구천문 역시 잘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이쪽 진영으로 파고들려 할 게 분명했다.
“뒤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든든하구나. 근데 그걸 저 사람들도 알아야 할 텐데.”
법무의 시선이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각자 맡은 바 일을 하면서도 시선은 이쪽을 향해 힐긋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시선에 담긴 감정들이 다양했다.
시기와 질투, 경외심뿐만 아니라 강렬한 분노와 불만도 있었다.
‘이유는 전면에 나서지 않아서겠지.’
노기가 서린 눈빛을 반호진에게 보내는 이유는 듣지 않아도 명백했다.
천하십대고수급이나 되는 반호진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사실이 거슬린 것이었다.
더욱이 반호진뿐만 아니라 명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상일기도 후방에 머물기로 했기에 분노가 더욱 커진 상태였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여론을 조작했다.
반호진과 상일기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 저변에 깔린 속셈은 너무나 비열했다.
두 사람이 희생해야 자신들이 입을 피해가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수로서 책임과 의무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걸 강요해서는 안 되지.’
일정 부분은 법무도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자에게 강자의 방식이 있다면 약자에게는 약자의 방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도를 넘어도 너무 넘은 것이었다.
고수가 관용을 베푸는 건 절대 당연한 게 아니었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지금까지 반호진은 단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렇기에 법무는 사제를 믿었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고.
“우리도 천막부터 세우죠.”
“이따가 배식도 받아야 하니까.”
“자자, 시작합시다.”
법무가 담현을 만나기 위해 이동하자 일행들은 익숙하게 등에 메고 있던 봇짐을 풀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노숙을 수도 없이 했기에 천막은 순식간에 세워졌다.
그것도 일행들 모두가 함께 머물 정도로 꽤 큰 천막이었다.
“자자! 우리는 여기에 천막을 친다!”
“서둘러! 시간이 없다!”
“기둥 확실하게 박아! 나중에 쓰러지지 않게!”
“비나 눈이 와도 무너지지 않게 만들어!”
반호진 일행이 자리를 잡자 그 주위에 선우세가와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삼삼오오 나뉘어져 천막을 세웠다.
마치 반호진 일행이 머물 천막을 호위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선우방과 모용척이 그 모습을 당연하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섬서성 때와 비슷해요.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무리가 몇몇 있어요.”
조용히 지켜보는 반호진의 곁으로 서조운이 슬쩍 다가왔다.
그러나 시선은 적당히 긴장해 있는 이들과 적당히 들떠 있는 후기지수들에게 향해 있었다.
긴장한 이들은 전쟁을 한 번이라도 겪어 본 이들이었고, 들뜬 기색을 보이는 이들은 단 한 번도 전쟁을 치러 보지 않은 이들이었다.
후자인 경우 이쪽을 향해 호승심을 감추지 않았다.
“현실 파악 못 하는 이들이야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백날 말해 봐야 소용없겠죠. 직접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릴 테니.”
“다 자업자득이야. 운이 있다면 덜 다치고 정신 차리겠지.”
“가장 좋은 건 안 다치고 정신 차리는 거지만요. 근데 붙잡고서 말해 줘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겠죠.”
“그러려니 해야지. 왜? 안타까워?”
반호진이 뒷짐을 지고서 물었다.
오늘따라 감정적인 것 같아서였다.
“조금요? 근데 제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요. 저들을 살릴 수도, 전쟁을 끝낼 수도 없고요.”
“그건 나도 힘들어.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그걸 알아야 해. 깨친다고 해야 하나? 근데 깨져야 성장도 하는 법이니까. 성장통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형님께서는 어느 정도 확신하고 계시는 거죠? 북쪽이요.”
서조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일행들은 그저 혹시나 하는 정도였으나 그는 달랐다.
북해까지 직접 갔기에 반호진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이게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좋을 게 없기에 일부러 애매하게 물었다.
“반반?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침공해 올 수도 있으니까. 운이 좋다면 내가 죽은 후에 침공이 있을 수도 있고. 말 그대로 대비하자는 차원에서 말한 거야.”
“정말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데, 우선은 앞으로 다가온 전투부터 집중하자. 설마 섬서성에서 철혈성과 전투를 치러 봤다고 이번 전쟁도 만만하게 보는 건 아니지?”
“절대요! 전쟁의 참혹함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요.”
서조운이 펄쩍 뛰었다.
하늘에 맹세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었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하면 두려워하는 쪽이었다.
전장에서는 무슨 일이든지 벌어질 수 있었고, 생사는 실력만으로 가려지지 않았다.
“그래. 그거면 돼.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지 말고. 적당히 긴장하고 적당히 자신감을 가져야 해. 네 본 실력을 온전히 다 발휘할 수 있도록.”
“이번에는 제 멋대로 날뛰지 않고 형님을 보필하겠습니다!”
“그건 아직 이르고.”
반호진이 어림없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그의 옆에 서려면 아직 멀었다.
적어도 천하십대고수에 비빌 정도는 되어야 같은 선상에 설 수 있었다.
“곧 자격을 갖출 거예요! 머지않아요!”
“꿈과 목표는 좋은 것이지. 암.”
몇 살 차이 나지 않음에도 어린아이 다루는 듯한 말투에 서조운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나 감히 따지지는 않았다.
생명의 은인이자 서조운이 가장 존경하는 게 반호진이었기에 딱 여기까지만 했다.
***
단 사흘 만에 백도무림 진영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남서쪽과 북서쪽에서 구천문과 포달랍궁이 등장해서였다.
이곳에 집결한 백도무림의 규모도 결코 적지 않은데 구천문과 포달랍궁의 숫자 역시 상당했다.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역시 저렇게 나오네요.”
“어깨 위의 물건이 장식은 아니라는 거지.”
각각 남서쪽과 북서쪽에서 천천히 진군해 오는 구천문과 포달랍궁의 병력을 보며 사마의성이 입맛을 다셨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으나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었는데 역시나 두 세력은 만만치 않았다.
함께 싸우기는 해도 백도무림의 의도대로 싸울 생각은 없다는 듯이 포달랍궁과 구천문은 병력을 합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양쪽에서 공격하겠다는 듯이 방향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포달랍궁이 구천문의 독을 인정한 거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까다로운 건 사실이니까. 어디 보자, 바람이.”
서조운의 말에 대꾸해 준 반호진이 손가락을 펼쳤다.
바람의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풍향은 저희가 유리해요. 가끔 반대로 바뀌긴 하는데 평소에는 지금과 같다고 해요. 한 가지 아쉬운 건 사천당가와 구천문이 충돌했을 때 일어나는 여파가 포달랍궁에게는 닿지 않는다는 거예요.”
“계획대로 되었다면 좋겠지만, 순순히 당해 줄 곳들이 아니지. 구천문과 포달랍궁은. 그리고 결국 승부는 실력에 의해 결판나게 되어 있어.”
아쉬워하는 사마의성과 달리 반호진은 담담했다.
사천당가와 점창파가 구천문과 싸워 봤다고 하나 반호진만큼 잘 알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반호진은 애초부터 요행이나 운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확실하지도 않은 운과 요행을 기대하느니 실력을 믿는 게 백 배, 천 배 나았다.
“공격해라!”
“전부 쓸어버려!”
미리 약속이 되어 있는지 이제 막 도착하자마자 두 세력이 동시에 돌격했다.
포위하겠다는 듯이 양쪽에서 공격해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자 백도무림 역시 둘로 나누어졌다.
선언했던 대로 담현이 개방과 함께 최전선에 서서 포달랍궁의 진격을 막았고, 반대편은 사천당가가 중심에 서서 구천문과 싸웠다.
휘이익!
그때 묘강인 특유의 새까맣고 왜소한 체구의 구천문도들이 무언가를 던졌다.
잔뜩 부풀어 오른 돼지 오줌보 같은 물건이었는데 그걸 보자마자 당우혁이 소리쳤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허공에서 터트려! 이쪽으로 날아오지 못하게 해!”
쌔애애액!
당우혁의 지시에 사천당가의 무사들이 암기를 날렸다.
독공과 암기술을 기본적으로 익히고 있기에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잔뜩 챙겨 놓았던 암기들을 던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반응이 살짝 늦었다.
지시는 빨랐을지 몰라도 수행하는 무인들의 손이 살짝 늦었기에 구천문이 던진 것들이 진영 곳곳에 떨어졌다.
퍼엉! 퍼퍼펑!
날아오던 중에 터진 것도 있었으나 반 정도는 진영 곳곳에 떨어졌다.
물론 구천문이 던진 것이니만큼 다들 알아서 피했다.
한눈에 봐도 위험해 보였기에 예상 낙하지점에서 벗어났는데 문제는 범위였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만큼 충격이 상당했고, 그로 인해 터지면서 담겨 있던 내용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치이익!
“끄아아악!”
“우웩!”
끈적끈적한 검은색 액체가 사방팔방으로 비산하며 무인들을 덮쳤다.
나름 적당히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오만한 착각이었다.
폭발로 인해 흩어지는 범위는 상당히 넓었고, 얼마나 맹독인지 단 한 방울만 몸에 닿아도 순식간에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하며 고꾸라졌다.
구천문을 상대해야 했기에 피독주를 준비했음에도 소용없었다.
휘이이익!
심지어 독공을 익힌 사천당가의 무인조차 쓰러져서 몸서리치는 모습에 모두가 아연실색할 때 두 번째 공격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더욱 많은 숫자였다.
거기다 크기도 다양했다.
마치 사천당가의 암기를 예상했다는 듯이 말이다.
“산개해!”
“호흡을 멈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