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10화 (210/468)

제 70장. 혈풍(血風) 속으로. -02

반호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선우방의 말이 묘하게 심기를 건드려서였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지금까지 너에게서 살아남은 악인이 있어?”

“다 죽었죠.”

“일단 마주친 이는 전부 다 죽었지요.”

반호진에게 물었으나 대답은 다른 이들에게서 나왔다.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서조운과 정이륭이 대답했던 것이다.

“살아남을 가치가 없는 이들이니까.”

“맞아. 이번 역시도 마찬가지고. 특히 사천당가와 점창파가 엄청 이를 갈고 있지. 아무래도 제대로 끝을 맺지 못했으니까. 거기에 포달랍궁이 합류했다고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 다 죽이면 돼.”

“일단 전투는 이곳에서 할 거야. 각개격파도 없고, 기습도 없어.”

반호진이 미리 준비되어 있던 깃발을 한 곳에 꽂았다.

바로 제갈문곡이 회의 때 정한 지역이었다.

“남자답고 좋네요.”

“비겁한 방법도 전술의 일부분이라고 하나, 처음부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력이 압도적인 열세라면 모를까.”

모용척과 정이륭이 각자의 성격다운 대답을 했다.

특히 모용척은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중원무림을 대표하는 세력이라면 당연히 왕의 자세로 도전자를 기다려야 했다.

전략과 전술의 중요함을 모르지 않지만 그래도 첫 대결에서만큼은 백도무림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부적인 내용은 아직 논의 중이지만 그렇기에 일단 우리들끼리라도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방이 형과 척이 형은 선우세가와 모용세가로 가시겠죠?”

보좌하듯 사마의성이 자연스럽게 반호진의 말을 받았다.

그런데 그 모습을 누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는 다들 적응되기도 했고, 인정도 해서였다.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할 게 있어.”

“저도 그런데.”

“혹시?”

선우방과 모용척이 서로를 쳐다봤다.

왠지 모르게 순간적으로 통하는 게 있어서였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이 마주치자 찌르르한 감각이 느껴졌다.

“본가는 섬서성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어.”

“모용세가 역시 마찬가지예요. 일단 다른 이들과 달리 손발을 한 번 맞춰 봤으니까요.”

“내가 소림사의 제자로서 최전방에 서면 어쩌려고?”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믿어 주는 건 고맙지만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건 사마의성과 정이륭도 마찬가지인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조운이야 반호진이 어디를 가든 무조건 따라갈 생각이었기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함께할 거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그리고 솔직히 말해 여기 있는 사람들만큼 믿을 수 있는 이들이 없기도 하고요.”

“그게 좀 크긴 하지.”

오늘따라 죽이 척척 맞는 선우방과 모용척의 모습에 반호진은 물론이고 일행들 모두가 피식 웃었다.

이런 광경은 정말 보기 드물어서였다.

“물론 이건 형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하지만요.”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정이륭이 갑자기 끼어들자 모용척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시기가 너무 절묘해서였다.

마치 그가 대답을 듣기 전에 말을 해야 한다는 느낌이었기에 모용척은 의아한 눈으로 친구를 쳐다봤다.

“말해 봐.”

“사부님께서도 형님과 함께 움직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문주님이?”

“예.”

반호진은 물론이고 다른 일행들도 놀랐다.

늘 따로 움직이던 상일기가 합류한다고 하자 의아해하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빠르게 표정을 회복한 반호진이 물었다.

“이번 일로 심경 변화가 생기신 모양이야.”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근데 나는 전면적으로 나설 생각이 없는데. 우선은 후방에 있을 예정이야. 이건 사부님과도 얘기가 되어 있어.”

“역시 그렇군요.”

“안 놀라네?”

의외로 담담한 정이륭의 반응에 반호진이 도리어 눈을 껌뻑였다.

근데 놀라지 않은 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나서지 않으시잖아요. 그리고 형님은 살짝 비밀병기 같은 느낌도 있고요.”

“비밀병기는 무슨.”

쓸데없이 목소리를 내리까는 모용척을 보며 반호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다른 일행들의 반응은 달랐다.

모용척의 말에 동조하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비밀병기라기보다는 최종병기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오, 최종병기 좋네요. 마지막 심판관 같은 느낌?”

“소림검성이 아니라 소림마검이라는 말도 있더라고요.”

선우방과 서조운의 말까지는 그러려니 했으나 정이륭의 발언에 반호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소림검성도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으나 소림마검은 아예 거슬렸다.

특히나 소림이라는 두 글자에는 어울리지 않는 마(魔) 자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출처가 어디야?”

“녹림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사파나 마도인도 은근슬쩍 사용하는 것 같고요.”

반호진만큼이나 정이륭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들이 한 짓은 생각도 하지 않고 지껄이는 게 그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림사로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족족 쓸어버려야겠네요.”

“겸사겸사 창고도 털고. 그런 녀석들은 흔적 자체를 없애 버려야 해.”

서조운과 사마의성이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다 정이륭과 같은 마음이었다.

“그 얘기는 그만하고, 어떻게 싸울지에 대해서 논의하자.”

“우리는 후방에 있을 거라며. 그럼 예비부대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그런 셈이지. 하지만 마냥 구경만 하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흐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선우방이 턱을 쓰다듬었다.

섬서성 때와 달리 이곳에 집결한 백도무림의 무인들은 더 이상 방심하지 않았다.

철혈성을 겪었기에 새외무림의 세력이 중원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음을 알게 되어서였다.

특히 철혈성주가 보여 준 압도적인 힘은 무림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아마 하는 일은 섬서성 때와 비슷할 거야. 밀리는 전선들을 지원하게 되겠지. 혹은 생사가 위험한 이들을 구하거나.”

“멍청하게 무명을 얻겠다고 날뛰지나 않으면 좋겠는데.”

“그건 어쩔 수 없지. 일일이 다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섬서성 전투 때 질리도록 보았던 광경을 떠올리며 선우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데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하나같이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자신의 무공에 자신감을 갖는 건 좋으나 그게 자만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었다.

“이번에도 뒤치다꺼리만 할 거 같은데.”

“난 말린 적 없다. 전면에 나서고 싶으면 나서도 돼.”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그 전까지는 같이 있어야지. 이런 일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강요한 적 없다는 반호진의 말에 선우방이 씨익 웃었다.

투덜거리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이 일을 회피할 생각은 없었다.

또 나름 보람도 있었다.

죽을 뻔한 이들을 구해 주고 감사 인사를 받을 때의 감정은 지금도 가슴에 선명했다.

“맞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지.”

전쟁이 발발한 이상 피해는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대한 줄이는 건 가능했다.

그리고 철혈마황은 어쩔 수 없이 잡았지만 반호진의 이번 삶의 목표는 지난 생과 다르게 사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천하십대고수가 거의 전부 모인 만큼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할 만큼 하기도 했고.’

사실 반호진이 철혈마황을 잡은 것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개인적으로 자신의 몫은 충분히 했다고 여겼다.

물론 그럼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나서겠지만.

“구천문은 이미 한 번 패퇴시켰고, 포달랍궁이 가세했지만 전력상으로는 충분히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미리 위치를 선점한 만큼 준비도 철저하게 할 수 있고요. 게다가 보급도 저희가 무조건 유리하고요.”

“그래도 이왕이면 최대한 빨리 마무리를 짓는 게 좋지.”

“장기전으로 가도 저희가 불리한 건 없어요. 겨울이 오면 오히려 저희가 더더욱 유리해지니까요. 다만 일반 양민들의 피해가 커질 수 있으니 가급적이면 빨리 끝내는 게 좋긴 해요.”

철저하게 책사로서 생각한다면 전쟁이 겨울까지 이어져도 백도무림이 불리한 건 없었다.

애초에 무인들이기에 감기나 병에 걸릴 확률도 없었고.

또 운남성이 남쪽 지역이다 보니 겨울이라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춥지 않기에 식량 수급도 어렵지 않았다.

“그걸 구천문과 포달랍궁도 모르지 않겠지. 원정군의 불리함에 대해서는 잘 알 테니까.”

“맞아요. 그러니 첫 대결이 중요해요. 어쩌면 여기서 모든 게 판가름 날 수도 있어요. 제갈세가주께서는 구천문의 독을 이용하실 생각인 듯한데.”

사마의성의 매끈한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독은 분명 위협적인 무기이지만 반대로 아군에게도 위험했다.

제갈문곡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하려는 것 같은데 문제는 구천문이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포달랍궁의 규모만 파악되었지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만큼 변수가 너무 많았다.

“독에 관한 건 당가주님께 자문을 구할 거다. 그 부분은 크게 걱정할 것 없어. 다만 문제는 여기지.”

툭.

반호진의 손가락이 지도의 한 곳을 찍었다.

그런데 그 위치가 특이했다.

운남성도, 서장도 아닌 북쪽을 짚었다.

“어? 거기는…….”

“구천문과 포달랍궁이 손을 잡았지. 근데 꼭 두 세력만 힘을 합치라는 법은 없잖아?”

일행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상도 못 한 말에 다들 경악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사마의성만은 두 눈을 새파랗게 빛냈다.

“형님 말씀도 일리가 있어요. 가능성은 충분하죠. 특히나 백도무림의 전력 대부분이 운남성에 집결하고 있으니…….”

사마의성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반호진의 손가락으로 향했다.

뒷말을 잇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다들 알아차린 것이었다.

동시에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확실한 정보도 없고, 단순히 내 짐작일 뿐이야.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확인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래도 한 번 정도는 생각해 두자는 거니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거 없어.”

“다른 사람이었다면 모를까 네가 말하니까 단순히 추측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반호진이 웃으며 입을 열었으나 안타깝게도 일행들의 표정은 똑같았다.

선우방과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다들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서조운의 얼굴이 가장 경직되어 있었다.

반호진과 같이 북해에 갔었기에 지금의 말이 단순히 짐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스윽.

그런 서조운의 모습을 가장 먼저 발견한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에 서조운은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대비해서 나쁠 건 없다는 거지.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구천문과 포달랍궁에 집중하자고.”

서조운을 일별한 반호진이 사마의성을 바라봤다.

그러자 사마의성이 개방과 점창파, 사천당가를 통해서 알아낸 구천문과 포달랍궁의 정보들을 풀기 시작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처럼 사마의성은 꽤나 상세히 알아낸 정보들을 일행들에게 알려 주었다.

***

점창산을 떠나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 곳곳에 천막들이 즐비했다.

숙영지답게 각 구역별로 문파와 무가들이 나뉘어서 천막을 세운 것이었다.

그런데 반호진 일행이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이런 시선들은 적응이 안 되네.”

“나도.”

초면인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속닥거리는 건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처음에야 신기하기도 하고 유명세를 얻은 것 같아 기쁘기도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일거수일투족이 모조리 다 까발려지는 듯한 느낌에 선우방과 서조운은 살짝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즐길 때도 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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