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장. 혈풍(血風) 속으로. -01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의 말에 선우청과 모용궁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반면에 상일기는 대답이 없었다.
노인의 말을 곱씹는 것이었다.
“현재 수뇌부의 상황은 문주님께서도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지 않습니까?”
“구심점이 되어 달라는 말은, 군소방파들을 대표해 달라는 말입니까?”
“예.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백도무림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문주님께서는 참석하지 않으셨지만 방금 끝난 회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만 발언권일 뿐 저희들의 영향력은 미비합니다. 동의를 구하지만 결국 모든 결정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힘이 없는 저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는 실정이지요. 저는 이게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조차도 저희는 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힘이 없기 때문이지요!”
노인이 말하다가 흥분했는지 점점 뒤로 갈수록 어조가 격앙되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상일기의 눈빛은 점차 가라앉았다.
“때문에 문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상 문주님은 바른 말을 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으니까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저희는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제발 저희들을 살펴 주십시오!”
“군소방파의 입장을 대변해 주십시오!”
“방천문의 힘이 필요합니다!”
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함께 온 중소방파의 수장들이 마치 짠 것처럼 입을 모아 소리쳤다.
상일기가 구원자라도 되는 것마냥 말이다.
그 모습에 모용궁과 선우청의 얼굴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같이 온 수장들도 머리를 푹 조아렸다.
오로지 믿을 건 상일기밖에 없다는 듯이 말이다.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럴 능력도, 위치도 안 되는 사람입니다.”
“무, 문주님!”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나 담담한 어조로 거절하는 상일기의 모습에 노인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쉽게 허락하지는 않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이렇게 당황하지도 않을 줄은 몰라서였다.
설득하는 데 있어 시간이 조금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결국에는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상일기 역시 작은 문파인 방천문의 수장인 만큼 알게 모르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반감을 가지고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대답은 추측과 달랐다.
조금도 동의하지 않는 듯한 말투와 표정에 노인의 머릿속은 순간적으로 백지가 되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으나 그건 제 역량 밖입니다. 또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직접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정말 원한다면 그래야 하겠지요. 그게 무림의 법도이지 않습니다.”
“문주님!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어린아이들의 화살받이가 되어 허망하게 죽을지도 모릅니다! 오로지 중원무림의 평화를 위해 후기지수들이요! 그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저희가 바라는 건 오직 한 가지입니다! 구파일방, 오대세가와 동등한 위치에서 싸우고 싶을 뿐입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요!”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나같이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마치 떼를 쓰는 듯한 태도에 상일기의 미간이 좁혀졌다.
말만 저럴 뿐 속내는 다르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래서 상일기는 갈무리해 두었던 기도를 개방했다.
우우우웅!
“흡!”
“으음!”
삽시간에 터져 나온 상일기의 기도에 앉아 있는 이들은 물론이고 서 있던 수장들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번 행동으로 상일기의 결심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무, 문주님! 제발 한 번만 다시 생각을……!”
“중원무림을! 아직 못다 핀 젊은이들을, 후기지수들을 생각해 주십시오!”
조금의 여지도 두지 않는 단호한 모습의 상일기를 향해 수장들이 다시 한번 간청했다.
그러나 상일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만 번지르르할 뿐 결국에는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그 모습에 이번 일을 주도했던 노인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상일기의 표정에서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그렇다고 더 매달릴 수도 없었다.
눈빛과 기도로 축객령을 내리고 있어서였다.
“상 문주님…….”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그러나 솔선수범도 보이지 않고 이렇게 대뜸 찾아와서 부탁하니 저로서는 다른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직접 보여 주시지요. 후기지수들을 위하는 마음을요.”
심유한 눈으로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는 상일기의 눈빛에 수장들이 하나같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상일기의 말대로 순수하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이곳을 찾아와서였다.
결국 불청객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상일기의 처소에서 떠나야 했다.
“어찌 저리도 염치가 없는지.”
“듣는 제가 다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불청객들이 사라지자 모용궁과 선우청이 혀를 찼다.
속셈이 너무 뻔해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어쩌면 그래서 혼자 오지는 못하고 우르르 몰려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욕보셨습니다, 문주님.”
“아닙니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이지요. 허허허.”
선우청이 못난 꼴을 보였다는 듯이 입을 열자 상일기는 고개를 저었다.
산전수전 다 겪다 보니 이런 일은 그에게 있어 딱히 충격적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기도 했고.
순수하게 협의지심을 가지고 이곳에 온 이들은 상일기가 보기에 극소수였다.
“잘하셨습니다. 저들은 절대 불쌍한 이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군소방파 중에서는 입김이 센 이들입니다. 아마 저들의 부탁을 들어주셨다면 고생만 엄청 하셨을 겁니다.”
“철저하게 이용만 당했겠지요.”
“전투에서 최전방에 선다면 방금 전에 지껄인 말을 믿겠지만, 개인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모용궁의 말에 선우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상일기가 솔선수범을 보이라고 했지만 그 말에 따를 이들은 장담컨대 다섯 명 안쪽일 터였다.
그것도 후하게 쳐줘서 그 정도였다.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내부의 화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전세가 불리해지면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련히 다른 분들께서 신경 쓸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럴 정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있었던 회의를 생각하면요.”
모용궁이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분명 제갈문곡의 능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전쟁은 그도 처음인 만큼 몇몇 부분에서는 서투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지금과 같은 일도 제갈문곡은 모를 가능성이 컸다.
“모두의 뜻을 하나로 모으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최대한 노력해 볼 수밖에요. 지금 모인 인원이 전부가 아니기도 하고.”
“맞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전쟁을 앞두고 치고받고 싸울 수는 없었다.
내부분열이 일어난 순간 전쟁의 결과는 자명했기에 지금은 어떻게든 힘을 모으고 합쳐야 했다.
찾아온 이들 역시 싸워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도 했고.
그러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일단은 이 상황을 제갈세가주님께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알 수도 있으나 모를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니까요.”
“같이 가시죠.”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혼자 가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웠는데 모용궁이 선뜻 함께 가 준다고 하자 선우청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는 사이 상일기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
저녁 식사 후 반호진의 방에도 일행들이 모여 있었다.
늘 그렇듯 일행들이 반호진의 방으로 모인 것이었다.
촤르륵!
모두가 착석하자 사마의성은 자연스럽게 중앙의 탁자에 지도를 펼쳤다.
대회의실에서 제갈문곡이 사용했던 지도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거의 동일했다.
“오늘 회의에서 있었던 내용을 설명해 드릴게요.”
“이럴 거면 차라리 호진이가 참석하는 게 낫지 않아? 전달받는 것보다는 그게 더 확실할 것 같은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하는 사마의성을 보며 선우방이 입을 열었다.
한 사람 건너서 내용을 전달받는 것보다는 일행 중 한 명이 직접 보고 듣는 게 객관적이고 정확할 것 같아서였다.
“그럼 네가 나 대신 가.”
“난 가고 싶어도 못 가.”
선우방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서였다.
반호진과는 입장이 많이 달랐다.
“회의 내용이야 원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으니 굳이 참석할 필요는 없죠. 상 문주님도 참석 안 하셨잖아요.”
“안 그래도 할 말이 있어. 회의가 끝나고 군소방파의 수장 몇몇들이 사부님을 찾아왔다고 하더라고. 사부님이 군소방파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고 지껄이면서.”
웬만해서는 흥분하지 않는 정이륭이 얼굴을 붉혔다.
그 정도로 감정이 격앙된 것이었다.
한데 그건 말을 들은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낯짝도 두껍네.”
“모용세가주님도 같이 계셨다고 들었어.”
“허! 아빠가 가만히 있었대?”
이번에는 모용척이 흥분했다.
그딴 개소리를 상일기와 함께 들었다고 하자 모용척은 금방이라도 달려갈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사부님과 선우세가주님도 함께 계셨으니까.”
“아, 그럼 함부로 날뛰면 안 되지.”
모용척이 빠르게 납득했다.
두 사람과 함께 있었다면 부친이 참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더욱이 상일기의 처소였다면 참는 게 맞았다.
“그런 이들이야 늘 존재했으니까. 암적인 존재들 때문에 허망하게 패퇴한 적이 한두 번인가.”
“맞습니다. 도려낼 수도 없기에 더욱 난감하지요. 그러나 앞으로 있을 전쟁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품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문주님께서도 나름 조용히 돌려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러셨겠지.”
지난 생에서도 이와 같은 일은 있었다.
다만 상황이 달랐던 만큼 결과 역시 달랐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아주 많이 양호하게 정리된 셈이었다.
“제갈세가주님은 알고 계시려나?”
“지금쯤이면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모용세가주님이나 선우세가주님이 가만히 계시진 않았을 것 같은데. 또 이곳에는 눈과 귀가 많잖아요.”
“그런 족속들은 개망신을 줘야 하는데.”
가장 예의 바른 선우방마저도 분노를 금치 못했다.
동시에 진심으로 궁금했다.
대체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 있기에 그런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지가 말이다.
“그래서 저는 소림사의 행보가 더욱더 대비된다고 생각해요.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꼭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은 아닌데 소림사는 다르니까요. 방장께서 말씀하시길 이번 전쟁에서 소림사가 가장 앞장서겠다고 하셨어요.”
“호진이랑 똑같네. 나서야겠다고 생각하면 망설이지 않고 다 때려 부수잖아.”
“마지막 말이 좀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