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08화 (208/468)

제 69장. 예정되었던 난세. -03

“서린이는 몸에 해롭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순수하게 천독환의 가치에 대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독 취급하는 거 같은데.”

당우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암만 봐도 당서린을 독처럼 보는 것 같아서였다.

“제가 어찌 당 소저를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단지 천독환이 부담스럽지 않아서 한 말입니다.”

“…….”

반호진의 말에도 당우혁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하는 게 맞는 듯해서였다.

하지만 반호진도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았다.

괜히 더 부정했다가 화만 부추길 것 같아서였다.

달칵.

대신 일행들이 침묵을 걷어 주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서 시선을 떼지 못했던 일행들이 서조운을 시작으로 목함을 연 것이었다.

“으음!”

“향은 똑같은데요?”

반호진의 목함에서 풍겨져 나온 향과 동일한 향에 일행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비슷한 향이 아니라 거의 흡사하기에 천독환 같아서였다.

거기에 당서건이 쐐기를 박았다.

“모두 천독환 맞습니다. 아버지께서 직접 챙기셨고요.”

“어…….”

당서건의 확인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흥분도 잠시 의문이 들어서였다.

순수한 호의라는 게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건 오랜 세월 동안 친분을 다져 오거나 특별한 경우에나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다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목함을 닫았다.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행들에게는 왜 주시는 겁니까?”

“왜 부담스러워하는지 알고 있네. 근데 이건 순수하게 호의로 주는 것일세. 자네는 물론이고 다들 뛰어난 후기지수이지 않나. 강호의 평화를 위해서 섬서성에서 싸우기도 했고. 근데 이렇게 말하면 믿지 않겠지?”

“예.”

“솔직하게 말하면 뇌물일세. 호감을 얻기 위한. 동시에 이번 전쟁에서 본가를 한 번 정도는 생각해 달라는 뜻이기도 하고.”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당우혁은 솔직하게 말했다.

괜히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였다.

“뇌물이라고 하니까 더 부담스럽습니다.”

“부담스러워할 것 없네. 만독환이라면 모를까 천독환은 가끔 선물로 외부인에게 나눠 주기도 하니까. 내가 알기로 꽤 비싼 값에 거래가 된다고 들었고.”

선우방이 일행들을 대표해서 입을 열었다.

친구인 반호진이야 당서곤의 일도 있으니 납득이 된다지만 자신과 동생들은 달라서였다.

“그래서 더 부담스럽습니다.”

“내가 과한 요구라도 할까 봐?”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예전이었다면 감히 당우혁을 앞에 두고 부언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스스로의 실력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고, 자신뿐만 아니라 동생들도 같은 심정이기에 선우방은 큰형 중 한 명으로서 대표해 말했다.

“이유 없는 공짜는 싫단 말이지.”

“예.”

“다들 같은 생각인 듯싶고.”

당우혁의 시선이 선우방을 지나 서조운, 모용척, 정이륭, 사마의성에게 향했다.

각자 다른 삶을 살아왔음에도 모두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깊은 연대감에 당우혁은 부러움을 느꼈다.

하나같이 대단한 재능들을 가진 이들이 서로를 시샘하고 질투하지 않는 것도 놀라운데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있자 당우혁은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저기에 서건이도 있으면 딱인데.’

당우혁은 다시 한번 아쉬움이 들었다.

지난번 기회가 왔을 때 너무 미온적으로 행동한 게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후회만 해서는 달라지는 게 없었다.

미래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행동해야 했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따로 원하는 건 없는데 말이지. 사천당가에 호의를 가져 주는 것 말고는.”

“그것도 조건입니다.”

선우방과 당우혁의 대화에 반호진이 끼어들었다.

뒤에 말이 붙는다는 것 자체가 요구하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면 거저 아닌가? 백독환은 이미 복용했다는 말을 들어서 말일세.”

“그게 사천당가까지 알려졌군요.”

“딱히 비밀은 아니지 않나. 그래서 나름 고심해서 준비한 선물인데 말이지. 근데 이렇게나 부담을 느낄 줄은 몰랐군.”

“저의를 알 수 없는 호의보다는 깨끗한 거래가 편합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떤가?”

좀처럼 뜻을 거둘 생각을 보이지 않는 반호진 일행의 모습에 당우혁이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좋은 절충안이 떠올라서였다.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깨끗한 거래가 낫다고 했지? 그럼 거래를 하지. 이 천독환을 가지고. 어차피 자네는 원래 받아야 하는 입장이고 문제는 다른 아이들 아닌가?”

“그렇죠.”

“한 명당 서건이와 비무 열 번. 이 정도라면 나도 편하고 아이들도 편할 것 같은데.”

반호진이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이런 절충안이라면 양쪽 다 이득이었다.

당서건 역시 사룡 중 한 명이니 일행들의 상대로 모자람이 없었다.

거기에 천독환이라면 충분히 괜찮은 거래였다.

“나쁘지 않은데?”

“난 찬성.”

“저도요. 이 정도면 서로에게 이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좀 손해 보는 느낌이지만 모두가 받아들인다면 찬성하겠습니다.”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는 선우방, 서조운과 달리 모용척은 말이 길었다.

특유의 허세를 보여 주며 어쩔 수 없이 찬성한다는 듯이 말하자 당우혁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저런 성격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또 달랐다.

어렸을 적에 보긴 했었으나 그때는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저도 좋습니다.”

“형님 말씀과 마찬가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상황이 좀 다른데요.”

모두가 찬성하는 쪽으로 가자 정이륭도 동조했다.

그런데 그때 사마의성이 조심스레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다른 일행들이야 무위가 출중하지만 사마의성은 상황이 달라서였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무공이 괄목할 정도로 발전했으나 아직 용의 칭호를 가진 이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기문진법의 실력자라고 들었는데. 한 명만을 가두는 진법에도 뛰어나다고. 그래서 일행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 준다고 들었네만. 안 그런가?”

“맞습니다. 그런 걸로도 적용이 된다면 저도 좋습니다.”

“해결됐군.”

당우혁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깔끔하게 해결이 된 것 같아서였다.

“그럼 여기서 모두 복용하는 걸로 하죠. 전문가도 계시니.”

“적어도 이곳에서 나보다 더 독공에 뛰어난 이는 없지.”

“그러니까요.”

살짝 치켜세워 주는 반호진의 말에 당우혁의 미소가 짙어졌다.

거만이 아니라 진실이었기에 당우혁은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더구나 다른 이도 아니고 반호진이 인정하는 듯이 말했기에 더더욱 기분이 좋았다.

“그럼 감사히 복용하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거래였으나 그럼에도 당우혁이 신경 써 준 것은 사실이기에 선우방과 서조운은 인사치레일지라도 고마움을 표하고는 목함을 열어 단숨에 천독환을 털어 넣었다.

뒤이어 정이륭, 모용척, 사마의성도 망설이지 않고 천독환을 복용했다.

“자네는 안 먹나?”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얼마든지 물어보게.”

“열 번의 비무가 당장은 힘들지 않습니까?”

“전쟁을 앞두고 있으니까. 무엇을 염려하는지 아는데 걱정할 필요 없네. 사천당가는 그렇게 경우 없는 가문이 아니니.”

만족스러운 대답에 반호진도 천독환이 들어 있는 목함을 열었다.

그러고는 특유의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천독환을 입에 털어 넣었다.

파르르.

독약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공할 쓴맛이 입을 시작으로 전신을 엄습해 오는 느낌이었으나 반호진은 참았다.

예로부터 몸에 좋은 약은 쓰다고 하지 않았던가.

주의 사항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반호진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서 으적으적 씹었다.

그럴 때마다 눈썹이 크게 떨렸지만 반호진은 느끼지 못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상 문주님. 모용세가주님, 선우세가주님.”

제자와 자식들이 반호진과 함께 있다는 인연으로 친해진 두 사람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상일기는 갑작스레 찾아온 무리들을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태도는 정중하기 그지없었으나 묘하게 무언가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런데 그건 그뿐만이 아닌지 선우청과 모용궁의 얼굴도 살짝 굳어져 있었다.

“우선 갑자기 찾아온 점에 대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오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내일 아침에 회의가 시작되기에 남는 시간이 지금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앉으시죠.”

무작정 찾아왔으나 앞으로 함께 싸울 전우들이라 할 수 있었기에 상일기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찾아온 인원이 꽤 많았기에 자리가 모자랐다.

“저희는 서 있어도 됩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보이지 않는 서열이라도 있는 모양인지 자리에 착석하는 이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앉았다.

그리고 앉지 못한 이들은 자연스럽게 앉은 이들 뒤에 섰다.

스윽.

상일기는 보지 못했으나 모용궁과 선우청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두 사람은 알아차려서였다.

“역시 두 가주께서도 이곳에 계셨군요.”

“예. 아무래도 아들과 인연이 있는 분들이다 보니.”

대표 격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노인의 말에 선우청이 담담한 신색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노인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전 대회의실에서도 느꼈지만 예전과는 새삼 많이 달라진 게 느껴져서였다.

“아들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검룡이라니. 제 손주는 언제쯤 용의 칭호를 얻을 수 있을지.”

“운이 좋았습니다.”

“허허허.”

겸손하게 대답하는 선우청의 모습에 앉아 있는 이들은 물론이고 뒤에 시립하듯 서 있던 수장들의 얼굴에 짙은 부러움이 떠올랐다.

불과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선우방은 그저 그런, 수많은 후기지수 중 한 명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무림에서의 위치가 완전히 달라졌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운, 저희 아이도 받고 싶습니다.”

“저도요.”

“제 제자도 받았으면 정말 소원이 없겠습니다.”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대답에 선우청이 겸연쩍게 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나름 좋게 마무리를 짓고자 말을 했는데 분위기가 어째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모양새였다.

“그보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당황해하는 선우청을 대신해 모용궁이 나섰다.

피차 서로의 생각을 아니 본론으로 넘어가자는 뜻이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상 문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말이지요. 정확하게는 청이라고나 할까요.”

“청요?”

“예.”

의자의 중앙이자 상일기의 정면에 앉은 노인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연배는 비슷할지 모르나 강호에서의 위상은 감히 노인이 비빌 수가 없는 이가 상일기였다.

그렇다 보니 노인은 은연중에 상일기의 눈치를 살폈다.

“저에게 그럴 만한 게 있습니까?”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말이지요. 그리고 이건 모용세가주님이나 선우세가주님께도 절대 나쁘지 않은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이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으나 정작 세 사람의 표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선우청과 모용궁의 경우 이들의 목적을 알고 있었고, 상일기는 몰랐으나 본능적으로 께름칙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섣불리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단 들어는 보겠습니다.”

“상 문주님께서 군소방파들의 구심점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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