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장. 예정되었던 난세. -01
담현만 그리 생각한 게 아닌지 이곳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점창파의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이대로 가만히 놔두다가는 끝이 안 날 듯하자 제갈문곡을 거론하며 좌중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래. 제갈세가주 생각도 들어 봅시다.”
“이대로는 끝이 안 날 것 같구려.”
점창파 장문인의 말에 청성파와 아미파의 장문인이 동조했다.
이렇게 결론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모두가 수긍할 만한 주장이 없기에 그런 것이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수장들이 살짝 기대하는 표정으로 제갈문곡을 바라봤다.
“우선은 지도를 봐 주십시오.”
대회의실의 중앙에는 거대한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바로 운남성과 인접해 있는 서장의 일부분, 그리고 마찬가지로 운남성과 맞닿아 있는 묘강의 일부분이 그려져 있는 지도였다.
“지금 나오는 의견을 크게 압축하면 두 개라고 생각합니다. 각개격파를 할 것인지, 아니면 두 세력이 결집한 후에 싸울 것인지.”
탁. 탁.
평범한 지도보다는 컸으나 그렇다고 엄청나게 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인 이들이 다 강호에서 알아주는 무인들이니만큼 지도를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제갈문곡은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묘강과 서장의 한 곳에 각기 다른 색깔의 작은 깃발을 꽂았다.
바로 포달랍궁과 구천문의 글자가 적힌 깃발이었다.
“맞소이다. 제갈세가주께서는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시오?”
“저는 후자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제갈문곡의 대답에 각개격파를 주장했던 이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떻게 보면 자신들이 틀렸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어서였다.
반면에 제갈문곡과 마찬가지로 일망타진을 주장한 이들의 얼굴은 밝아졌다.
전략전술에 밝은 제갈문곡이 자신들을 지지했다고 생각해서였다.
제갈문곡의 말에 곳곳에서 동조하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공공의 적을 앞두고 힘을 합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결속력이 끈끈한 건 아니었다.
같은 적이 있기에 협공을 하는 것일 뿐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할 마음은 없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과 사문, 소속이었다.
“거기에 후자를 선택할 경우 장점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구천문이 독공을 사용하는 문파라는 점이지요.”
“아!”
제갈문곡의 말에 당우혁이 탄성을 흘렸다.
무슨 의미인지 그는 단박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모르는 이들끼리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천문의 독공은 저희뿐만 아니라 포달랍궁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아하!”
“구역을 나눠서 싸운다고 하더라도 난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덧붙이는 설명에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이제야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 모습에 제갈문곡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반면에 저희는 다르지요. 사천당가의 독인들이 마음대로 독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군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지만 구천문보다는 훨씬 유리합니다.”
“맞네. 풍향을 이용한다면 더욱 편하게 공격할 수 있지. 그래서 위치가 중요하기도 하고.”
“그래서 먼저 위치를 선점하고 기다려서 한 번에 치는 게 낫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호오.”
당우혁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나 제갈세가의 수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처음의 불만이 서렸던 표정들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수적으로 저희가 유리한 건 사실입니다. 각개격파 역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력을 둘로 나누는 것보다는 보다 유리하게 싸우는 게 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점이 분명히 있는데 그걸 버리고 싸울 이유는 없으니까요.”
“거기에 어떻게 나눌 건지도 문제이고 말이오.”
조용히 듣고 있던 개방주가 입을 열었다.
설사 전력을 둘로 나눈다고 하더라도 문제였다.
상대적으로 싸우기 까다로운 구천문을 피하려고 할 게 당연했다.
포달랍궁도 만만치 않은 세력인 건 사실이나 구천문보다는 그래도 할 만한 편이었다.
“분명 한 곳으로 쏠리겠지요.”
“그렇겠지.”
개방주에 이어 남궁호도 입을 열고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몇몇 중년인들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누가 봐도 속이 훤히 보이는 행동에 팽만철이 콧김을 내뿜었다.
적을 앞에 두고 어디가 편하니, 어디가 어렵니 고민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였다.
“제갈세가주께서 생각해 두신 곳이 있을 것 같소만.”
“저는 이곳이 지리적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요. 풍향은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겠지만 지금은 이곳과 이곳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점창파 장문인의 말에 제갈문곡이 막힘없이 대답하며 지도 중 두 곳에 이름 없는 깃발을 꽂았다.
제갈문곡이 내심 결정해 둔 장소였다.
“전면전은 둘 중 한 곳에서 하더라도 적들이 올 때까지 숫자는 최소한 줄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 기습이라도 하자는 것이오?”
“기습이라기보다는 별동대나 특수작전조를 운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야 먼저 자리를 잡은 곳에서 적응도 하고 이런저런 준비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작게는 보급도 끊거나. 어차피 구천문과 포달랍궁의 전력을 파악해야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인원을 좀 더 추가하자는 겁니다.”
군소방파의 수장 중 한 명이 자신 있게 의견을 제시했다.
제갈문곡의 계획도 좋지만 너무 수세적으로 대응하는 것 같아서였다.
적을 더욱 불편하게 해야 이쪽의 승산이 높아지기에 중년인은 기습과 암습을 가리지 말고 해야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별동대는 문주가 이끄는 건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의견을 제시한 사람이 직접 나서야 더욱 효과적이지 않겠나. 문주가 따로 생각해 놓은 게 있는 듯한데.”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팽만철의 말에 의견을 제시했던 중년인이 펄쩍 뛰었다.
별동대의 운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거지 자신이 직접 참여하겠다는 건 아니어서였다.
더욱이 단독으로는 상대할 수가 없어서 백도무림 전체가 힘을 합치도록 만든 게 구천문과 포달랍궁이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조차 홀로 상대하지 못하는 곳이 두 곳인데 자신더러 싸우라고 하자 중년인은 대경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럼 남들보고 나서라는 건가? 응? 자네는 두렵다면서 왜 그 일을 다른 이에게 시키나?”
“…….”
중년인이 팽만철의 시선을 피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차마 입 밖에 꺼내지는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팽만철은 물론이고 지켜보고 있던 남궁호와 당우혁, 제갈문곡은 알고 있었다.
중년인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말이다.
“직접 나설 게 아니면 주둥이는 다물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가만히라도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끄응!”
대놓고 면박을 주는 팽만철이었으나 중년인은 감히 따지지 못했다.
하북팽가의 수장이자 천하십대고수인 도왕에게 감히 따질 배짱이 그에게는 없었다.
“왜? 불만 있어? 있으면 말해.”
“아, 아닙니다.”
쫙 깔리는 팽만철의 음성에 중년인이 황급히 대답했다.
시선을 내리깔면서 말이다.
그런 중년인의 모습에 팽만철은 혀를 끌끌 찼다.
나름 배짱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아서였다.
“개인적으로는 장 문주님의 의견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조율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백도무림의 방식에는 맞지 않으나 전쟁이라는 걸 생각하면 효과적이긴 하지.”
제갈문곡에 이어 개방주가 말했다.
그 역시 일정 부분은 동의하는 바였다.
전쟁이라는 게 꼭 정정당당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였다.
이쪽이 정정당당하게 싸운다고 해서 적이 그렇게 나오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걸 이용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개방주는 필요하다면 별동대나 특작조를 운용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저 역시. 중원무림을 대표하는 저희가 기습이라니요. 전력이 압도적으로 불리해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처음부터 그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렇다고 포달랍궁과 구천문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사람을 봐 가며 말을 하는 팽만철답게 담현에게는 정중하게 말했다.
소림사의 당대 방장이기도 하지만 반호진의 사부라는 점도 한몫했다.
“저도 팽가주와 같은 생각입니다. 이렇게 생각이 일치할 줄은 몰랐습니다만.”
“백도무림은 백도무림다워야지요.”
남궁호에 이어 당우혁도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동조했다.
팽만철의 의견을 지지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
“보아하니 다들 같은 생각인 것 같군요.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갈까요.”
모두가 동의하는 듯하자 제갈문곡은 자연스럽게 회의를 이어 갔다.
어떻게 보면 가장 민감하고 골치 아픈 안건으로 말이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말을 꺼내기 무섭게 다시 한번 대회의실이 시전 한복판으로 변했다.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였기에 제갈문곡은 인내심을 가지고서 차분히 진행했다.
‘흐음.’
그리고 그 모습을 담현이 답답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제갈문곡과 마찬가지로 담현도 이 안건이 거론된 순간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했었다.
어느 누구도 화살받이가 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서 제갈문곡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래도 머리가 아프긴 하군.’
군소방파의 반발은 예정된 일이었다.
그러나 예상하고 있었다고 해서 피로감이 덜한 건 아니었다.
때문에 담현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한마디를 꺼냈다.
“가장 앞에서 본사가 싸울 것입니다.”
“어……?”
“예?”
예상치 못한 말이어서일까.
잔뜩 붉어진 얼굴로 고성을 내지르며 어떻게든 스스로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하던 군소방파의 수장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건 열심히 중재하던 제갈문곡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전쟁에서 소림사가 가장 앞장서겠다는 말입니다.”
“그 일에 개방이 빠질 수 없지. 본방이 소림사의 옆에 서겠소이다. 흘흘흘!”
거기에 개방주가 가세했다.
소림사 혼자 의무를 짊어지게 놔두지는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개방주에게 담현은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
똑똑똑.
“들어오게.”
초대를 받은 반호진은 사천당가의 무인이 열어 주는 문을 자연스럽게 지나쳤다.
얼굴에 살짝 부담스러운 표정을 띠고서 말이다.
고작 문을 여는 일에 쓸데없이 경건하고 공손한 무인의 자세에 반호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반대로 서조운과 모용척은 아주 흡족한 듯이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간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 거 같은데 이상하게 진짜 오랜만에 본 것 같은 기분이네. 아마도 자네가 매우 보고 싶었던 것 같네.”
“부담스럽습니다.”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