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장. 시작인가? -04
두 눈의 초점이 점점 흐릿해져 가는 이대제자들의 모습에 반호성이 일갈했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내공을 담아서 소리쳤던 것이다.
그 덕분인지 서서히 눈이 풀려 가던 이대제자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흡!”
“이익!”
투정을 부리긴 했으나 이대제자들은 알고 있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도 반호진이 해 주는 이유를 말이다.
그렇기에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이대제자들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들을 위해 개인적인 시간까지 내 주는 반호진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다들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냈다.
“좋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근성에 반호진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바란 광경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무림이라는 세계는 나이가 어리다고, 힘이 약하다고 봐주는 따뜻한 세계가 아니었다.
그 어떤 곳보다 냉혹하고 잔인한 곳이 앞으로 이대제자들이 살아가야 하는 무림이었다.
‘강하게 키워야지.’
승려라고 하나 무승 역시 무인이었다.
강호와는 절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신분이 소림사의 무승이었기에 반호진은 이왕이면 강하게 키우고 싶었다.
육체적인 건 물론이고 정신적인 부분까지도 말이다.
괜히 심기체(心技体)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우욱!”
“웩!”
기꺼워하는 반호진과 달리 이대제자들 중 몇몇은 곳곳에 엎어져서 속을 게워 내고 있었다.
아침 식사했던 음식이 역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누구도 포기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오늘은 방식을 조금 바꿔 볼까. 합격진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도 확인할 겸.”
“그럼 저희가 다 같은 편이에요?”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겠지?”
“오오오!”
다 죽어 가던 얼굴로 구토를 하던 이대제자들이 반색했다.
혼자서 반호진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다 같이 공격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고작 자신들이 협공을 한다고 해서 반호진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허무하게 쓰러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냥 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내기를 할까?”
“설마 사백님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지는 않으시겠죠? 그렇죠?”
“에이! 설마!”
“소림검성이신데!”
정현과 이대제자들이 선수를 쳤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반호진도 양심은 있었다.
아무리 골탕 먹이는 걸 즐겨도 나름 지키는 선이 있었다.
“밑밥 안 깔아도 된다. 나도 어린애들 농락할 정도로 비양심적이진 않거든.”
“오오오!”
“그럼 할 만한 수준인 건가요?!”
반호진의 말에 이대제자들이 반색했다.
허언을 안 하는 반호진의 성격을 알기에 다들 기대하는 것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내 몸에 손을 대는 사람은 바로 휴식. 거기에 일대일로 지도대련 한 번을 해 주마.”
“우오오오!”
“진짜 딱 한 번만 접촉하면 되는 거예요? 손이든 발이든?”
휴식이라는 두 글자에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반호진의 입에서 휴식이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다들 함성을 내질렀던 것이다.
두 번째 특혜도 분명 좋은 것이지만 휴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발바닥이든 팔꿈치든 상관없어. 박치기를 해도 되고. 어떻게든 닿기만 하면 돼.”
“정해진 인원이 있어요?”
“인원에 제한을 둘 필요가 있을까?”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어오는 정현을 마주 보며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한 명이라도 나오겠느냐고 물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럼 전원 통과할 수도 있겠네요!”
“뭐, 꿈은 크게 가지는 게 좋으니까.”
“사백님께서 늘 말씀하시잖아요. 세상일이라는 게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고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요!”
“그렇긴 하지.”
“저희들도 그동안 열심히 수련했다고요!”
정현의 말에 이대제자들이 동조하듯 웅성거렸다.
눈에 띄는 성장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매일매일 점진적으로 성장했기에 이대제자들은 나름 자신이 있었다.
혼자라면 일말의 가능성도 없겠으나 모두가 함께라면 혹시 몰랐다.
더구나 공격이 성공하는 게 아니라 신체 어느 부위로든 닿기만 하면 되었기에 이대제자들은 가능성이 아주 조금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거야 직접 확인해 보면 알겠지. 합격진인 만큼 쓰러졌다고 끝이 아니야. 쓰러져도 계속해야 해. 차륜전을 써도 좋고. 시간은 내가 끝이라고 할 때까지.”
“예!”
“그럼 준비.”
스스슥!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대제자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능숙하게 각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숫자가 딱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이대제자들은 융통성 있게 자리를 배치했다.
나한진의 이해도가 가장 높은 아이가 자연스럽게 주도해서 위치를 잡아 주는 모습에 반호진이 히죽 웃었다.
“다 됐어요!”
“실전에서는 안 기다려 주는 거 알고 있지?”
“으에엑!”
씨익 웃으며 쇄도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정현이 비명을 질렀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를 향해 달려들어서였다.
한데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정현의 행동은 기민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던 것이다.
“흩어졌다가 다시 포위해!”
“움직임을 봉쇄해야 해!”
기민하게 반응하는 건 정현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놀면서 나한진 수련을 하지는 않았다는 듯이 이대제자들은 거의 한 몸처럼 움직였다.
반호진의 돌진에 흩어지면서도 진형을 유지했다.
간격을 널널하게 벌렸을 뿐 나한진은 유지한 상태였다.
“호오.”
이대제자들의 신속한 대응에 반호진이 살짝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표정과 달리 움직임이 기민하고 정확해서였다.
아직 일대제자들이 펼치는 나한진에 비하면 부족한 점들이 있었으나 예상했던 수준보다는 높았다.
그래서 반호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당할 것 같으면 매달려!”
“어차피 단판으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 희생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허어. 마지막 발언은 좀 그런데? 소림사의 제자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려들으라니.”
과하게 단체전에 몰입한 듯한 발언에 반호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십 명이 진형을 구축하고서 주변을 돌고 있었으나 반호진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잔뜩 긴장한 건 이대제자들이었다.
숫자가 많다고 하나 반호진이 제대로 마음먹고 무공을 펼치면 단 한 방에 모두 나가떨어진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따아악!
그 사실을 증명하듯 반호진은 왼손으로만 꿀밤을 먹였다.
오른손은 뒷짐을 지고서 산책이라도 나온 듯이 여유롭게 빈 공간을 유영하며 이대제자들의 이마 정중앙에 꿀밤을 놓았다.
“으억!”
“억!”
금광신보는 펼치지도 않았다.
또한 공력 역시 사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신체능력만 사용해서 움직였음에도 이대제자들은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눈으로 본다고 해서 생각대로 몸이 움직일 정도의 수준이 아니어서였다.
“흡!”
물론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었다.
반사신경이 뛰어난 이는 가까스로 피해 냈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인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몇 없었다.
“으흑!”
“으아아!”
설사 한 번은 피했을지 몰라도 두 번째는 아니었다.
마치 회피할 방향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이 그대로 따라와서 날리는 꿀밤에 이대제자들이 이마를 부여잡고 뒤로 나뒹굴었다.
단순히 꿀밤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몸이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지, 진영 유지해!”
“서로 위치 확인해! 무너지면 안 돼!”
“왜 다들 뒤로 넘어가는 거야! 버텨! 악으로 깡으로 버티라고! 넘어질 거면 앞으로 넘어져!”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동기들과 사형제들의 모습에 이대제자들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아무리 현격한 차이가 난다고 하나 그래도 너무 허무하게 당하는 것 같아서였다.
특히 반호진은 얄밉게도 나한진의 축이 되는 이부터 먼저 공격했다.
“어림없지.”
곳곳에서 내지르는 괴성 때문인지 이대제자들이 독기를 가득 품고서 달려들었다.
자기 한 몸 희생해서라도 반호진의 움직임을 봉쇄하려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자연스럽게 신체접촉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눈에 뻔히 보이는 수에 순순히 당해 줄 반호진이 아니었다.
쿵! 쿵! 쿵! 쿵!
굳이 금광신보를 펼칠 것도 없이 반호진은 유려한 몸놀림으로 이대제자들의 육탄돌격을 피해 내며 쉴 새 없이 왼손가락을 튕겼다.
이마는 물론이고 옆통수와 정수리를 가리지 않고 꿀밤을 먹였기에 이대제자들의 얼굴에 혹이 수도 없이 생겨났다.
“컥! 맞은 데 또 맞았어!”
“으어어어…….”
공력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나 반호진 정도쯤 되면 육체가 살인무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다들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고자 발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맞은 부위를 비벼도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끄응!”
반면에 오뚝이처럼 재까닥재까닥 일어나는 이들도 소수지만 있었다.
그리고 그 소수에는 정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성장했다는 듯이 정현은 고통으로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계속해서 반호진에게 달려들었다.
그 근성 어린 모습에 반호진은 속으로 웃었다.
‘기특한 녀석.’
정현의 무재는 냉정하게 말해 중상위 정도에 불과했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런데도 정현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다.
반호진의 조언도 한몫하기는 했겠지만 중요한 건 본인의 의지였다.
힘들고 괴로워서 포기할 법도 한데 정현은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가시적인 성과가 없음에도 반호진의 말을 믿고 우직하게 수련했고, 그 결과가 본인은 모르지만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으으! 더는 못 하겠어…….”
“헉헉!”
대부분의 이대제자들이 지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 정현은 달랐다.
마찬가지로 다리가 풀리기는 했으나 집중력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두 눈에 여전히 힘이 있었고, 그게 말해 주는 건 아직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호오. 체력이 많이 올라왔는데?”
“흐흐흐!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근데 체력만 좋아서는 반쪽짜리라는 거 알지?”
“그냥 시원스럽게 칭찬해 주시면 안 되나요.”
달려들던 정현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째 칭찬다운 칭찬을 안 해 주는 것 같아서였다.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만 해.”
“넵!”
“물론 그렇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없지만.”
“으악!”
이번에는 미간을 때리는 반호진의 손가락에 정현이 뒤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초반에는 좀 버티는가 싶더니 이제는 그냥 충격에 몸을 맡겼다.
쓸데없이 저항하느니 체력이라도 보존하겠다는 심보였다.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거야? 안 일어나? 누워서 맞을래?”
“아니요!”
반호진의 성격이라면 쓰러져 있어도 꿀밤을 날릴 게 뻔하기에 이대제자들이 부리나케 일어났다.
죽을 만큼 힘들지만 반호진이 그만 하지 않는 걸 보면 아직 더 할 수 있다는 걸 뜻했기에 이대제자들은 이를 악물고서 다시 나한진을 펼쳤다.
***
점창파의 대회의실에 평소에는 보기 드문 광경이 벌어졌다.
보통은 텅 비어 있거나 장문인과 장로들만 모였는데 지금은 달랐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비롯해서 군소방파의 수장들이 전부 다 모여 있었다.
“흐음.”
빼곡한 대회의실을 찬찬히 둘러보며 담현이 미간을 좁혔다.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직 다 온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회의실의 열기는 뜨거웠다.
많은 이들이 각자의 의견을 주장해서였다.
스윽.
중구난방한 대회의실의 모습에 담현은 이내 깊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중재자가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잠시만 조용히 해 주시오. 제갈세가주의 의견도 들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