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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림-204화 (204/468)

제 68장. 시작인가? -03

당당하게 따라 달라고 요구하는 난희주와 조심스럽지만 확실하게 의지를 표명하는 백설을 보며 반호진은 옅게 웃었다.

그러고는 둘을 시작으로 동생들에게도 술을 따라 주었다.

“다음 빈 잔에는 제가 따라 드리겠습니다, 형님!”

“어허.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장유유서 몰라?”

소홍주를 받기 무섭게 서조운이 히죽 웃으며 말하자 모용척이 끼어들었다.

엄연히 순서가 있는데 그걸 건너뛰려 했기에 모용척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따르는 것에 순서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요? 따를 때는 나이 순서대로 따르는 거라고 들었지만.”

“지역마다 주도가 조금씩 달라.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그랬어.”

“그래요?”

서조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투리가 있는 만큼 문화가 조금씩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다른 일행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듯했다.

“아무나 하면 어때. 그냥 하고 싶은 사람이 하면 되지.”

“맞아.”

오늘도 어김없이 티격태격대는 서조운과 모용척의 모습에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성향이 비슷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자주 부딪쳤다.

“선우 공자님은 잘되어 가고 있는 거예요? 하북팽가와요.”

“어, 일단 큰 문제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저도 잘 모르고요. 아버지께서 팽가주와 의견을 조율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 정략결혼인가요.”

“어쩔 수 없죠.”

갑작스러운 난희주의 질문이었으나 이제는 이 사안에 대해 내성이 생겨서 크게 놀라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의미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막상 결혼이 코앞에 다가온 듯하자 마음이 복잡했던 것이다.

“방이 형이 제일 먼저 가겠네요.”

“너도 만만치 않게 혼담이 들어온다고 하던데.”

“저는 일단 보류예요. 아직은 생각이 없어서.”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는 선우방과 달리 모용척은 단호했다.

당장은 수련이 먼저라고 생각해서였다.

세인들은 비룡이니, 신성이니 떠받들어 주지만 모용척의 생각은 달랐다.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그게 네 뜻대로 되냐? 가주님이 결정하는 거지. 너나 나나 결정권은 없어. 그냥 아버지가 정해 주시면 가야지. 그게 가문을 위한 일이니까.”

“씁쓸하네요.”

“어쩔 수 없어. 이게 장남으로 태어난 우리의 의무이니까. 아버지도 그러셨고,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셨지.”

선우방이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씁쓸하지만 선우세가의 장남으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선택권이 선우세가에 있다는 점이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지금 혼사에 대한 말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꼭 결혼하는 건 아니니까. 엎어지는 경우는 흔하지. 오히려 조운이나 이륭이가 먼저 갈 수도 있고. 아니면 척이가 가장 먼저 갈지도 모르고.”

“사고를 쳐서 말이지?”

“뭐, 여러 가지 경우가 있으니까.”

사고 친다는 말에 모용척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는 절대 그럴 일은 없다는 듯이 말을 꺼낸 선우방을 쏘아봤다.

하지만 매서운 모용척의 눈빛에도 선우방은 실실 웃었다.

“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지?”

“전혀? 완전 재미있는데? 이렇게 모두 모여서 한잔하는 건 처음이잖아. 난 재미있어.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기도 하고.”

“백 소저는요?”

“저도 재미있어요. 사실 이 자리에 제가 겸상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기도 하고요.”

일행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먹고, 마시고 있었기에 반호진은 난희주와 백설에게 좀 더 신경 썼다.

어떻게 보면 갑작스러운 자리였기에 두 사람이 힘들어할 수도 있어서였다.

한데 반호진의 우려와 달리 두 여인은 진심으로 술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치근덕거리는 이들도 없고, 싫은 사람도 없었기에 둘 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다행이네요. 앞으로 자주는 힘들겠지만 종종 만들어 보겠습니다.”

“정해지면 나에게 말해 줘. 이번에 대접받았으니 다음에는 내가 대접할게.”

“그래.”

“기대해도 좋을 거야.”

난희주가 싱긋 웃었다.

술자리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애초에 단둘이 마시는 것도 아니었기에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었고.

그러나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진 듯했기에 난희주는 이 사실에 만족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지.’

한껏 치장한 보람이 없는 것 같았으나 난희주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것에 약한 남자였으면 진즉에 그녀나 다른 여자에게 넘어갔을 것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오늘 이렇게 치장에 힘을 준 건 자신에게 이런 모습도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목적은 이미 충분히 달성했다.

“너무 비싼 걸로 하지는 말고. 그럼 부담스러우니까.”

“에이. 내가 오빠를 몰라? 대신 술은 맛있는 걸로 챙겨 놓을게. 소홍주도 좋은 술이지만 독하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술이 꽤 많아. 음식처럼 술도 맛이 다양하거든.”

“적당히만 마신다면야.”

과음만 하지 않는다면 반호진도 좋았다.

주도에 깊게 파고들 생각은 없지만 다양하게 마셔 봐서 나쁠 건 없었다.

지난 생에서는 제대로 마셔 본 적이 없기도 했고.

“형님! 이번에는 제가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그래.”

처음 마시는 술이라서 그런지 어느새 불콰해진 얼굴로 서조운이 촐랑거리며 술병을 들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자신이 따라 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피식 웃으며 빈 잔을 들어 올렸다.

졸졸졸.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술병을 기울이는 서조운을 보며 반호진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쭉 지금처럼 다 같이 지냈으면 참 좋겠다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말이다.

‘이번 생에는 그렇게 만들어야지.’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반호진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번에는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고.

***

난희주가 떠나고 반호진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독경 소리를 들으며 오랜만에 소림사의 경내로 들어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백님!”

“오냐.”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나 그 정도로 나이 안 먹었다.”

“으헤헤헤!”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는지 이대제자들이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어미 새를 발견한 아기 새처럼 반호진의 주위로 순식간에 이대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동안 수련을 잘했는지 어디 한번 볼까.”

“으엑!”

“벌써 시작하는 거예요?”

“아침 막 먹었어요!”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정현이 질색한 표정을 짓자 다른 아이들도 흠칫거렸다.

보자마자 수련을 시작할 줄은 몰라서였다.

“자연스럽게 소화시키는 거지. 나 없는 동안 설렁설렁 수련했다던데?”

“누, 누가 그래요? 저희는 진짜 열심히 했어요!”

“맞아요!”

정현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얼굴 가득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흐음. 내가 들은 말과는 다른데.”

반호진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이 떠올라서였다.

물론 열심히 했을 거라는 건 알았다.

그러나 문제는 매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했느냐였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맞아요! 진짜 열심히 수련했는걸요!”

“뭐, 그건 보면 알겠지. 나 없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수련했는지, 안 했는지를.”

“헉!”

여기저기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의 발언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그럼 오랜만에 무한 대련 훈련을 시작해 볼까?”

“으으으!”

“역시…….”

이대제자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무한히 반복되는 대련에 벌써부터 기가 질린 것이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반호진은 늘 했던 말을 꺼냈다.

“강요하지는 않아. 하기 싫은 사람은 빠져도 돼. 따로 개인수련을 해도 좋고.”

억지로 시키지는 않겠다는 듯이 반호진이 말했다.

하지만 손을 드는 이는 없었다.

죽을 정도로 힘이 들지만 자신에게 분명히 도움이 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어서였다.

또한 반호진이 이렇게 가르쳐 주는 게 천금과도 같은 가치가 있다는 걸 알기에 이대제자들은 모두 투정을 멈추고 마음을 다잡았다.

“마음의 준비가 되었어요.”

“마음의 준비씩이나. 체조는? 몸은 풀고 시작해야지. 덜 풀고 격렬하게 움직이면 근육이 뒤틀린다.”

“체력 훈련 하면서 풀어둬서 괜찮아요.”

“그럼 시작해 볼까? 각자 상대 잡아서 마주 봐. 방향은 늘 그렇듯이 오른쪽으로 도는 거야. 바로 옆의 대련이 안 끝나면 다음으로 넘어가고.”

“네!”

이제는 다들 익숙해진 상태지만 반호진은 다시 한번 주지시켰다.

지칠 대로 지치면 방향감각은 물론이고 정신 줄을 놓는 경우도 허다해서였다.

물론 그런 상태가 되면 반호진이 더욱 신경을 쓰긴 했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각인시켜서 나쁠 건 없었다.

“자, 그럼 시작하자!”

“어? 사백님도 참여하시는 거예요?”

“당연하지. 내가 언제 빼는 거 봤어?”

“어, 그렇긴 한데 수준 차이가…….”

“잔말이 많다.”

말끝을 흐리는 정현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반호진은 무한 대련 훈련을 시작했다.

예전이었다면 속가제자이기에 다른 일대제자들의 눈치를 봤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적극적으로 이대제자들을 봐주기 시작하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이들의 성장이 두드러졌기에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일단 방장인 담현이 허락하기도 했고.

“으아아악!”

“너무 빨라요!”

“빠르면 예상하고 피해야지. 반사신경이 딸리면 예측력으로 피해야 하는 게 정상 아냐?”

“그게 아무나 되는 게 아니잖아요!”

“시끄럽다.”

반호진의 첫 상대가 된 정현이 울상을 지었다.

적당히 힘을 빼고 상대해 주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였다.

분명 자신의 수준에 맞춰 줬을 텐데도 정현은 반항은커녕 두들겨 맞기만 했다.

“억! 으헉! 컥!”

“머리를 써, 머리를. 상대의 습관이 뭔지, 어느 초식을 주로 사용하는지, 어떤 유형의 무인인지 계속 생각해. 몸뚱이만 믿으면 절대 절정의 벽을 넘을 수 없어.”

“그게 쉽나요?!”

“쉽지 않으니까 계속 노력해야지.”

반박의 여지가 없는 정론에 정현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말처럼 쉬웠다면 이 세상에 절정고수 아닌 사람은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불평한다고 달라질 건 없기에 정현은 혼신의 힘을 다해 반호진의 손을 피했다.

반격은 그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따악!

“악!”

검도 아니고 왼손만 움직였음에도 정현은 얼마 안 가 꿀밤을 맞았다.

반호진의 검지가 정확히 이마를 가격했던 것이다.

그런데 충격이 제법 상당한 모양인지 비명과 함께 정현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이마가 좀 단단해진 것 같은데? 뼈가 튼튼해졌나?”

“아파요!”

“아프면 맞지 않게 피해야지.”

“으으!”

벌겋게 부어오른 이마 한가운데를 손바닥으로 벅벅 비비며 정현이 신음을 흘렸다.

진짜 아픈 모양인지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자, 그럼 다음에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어떻게 피할 건지 궁리해 둬. 안 그러면 오늘도 이마가 남아나질 못할 거야.”

“히이익!”

처음도 아니건만 질색팔색하는 정현의 모습에 반호진은 씨익 웃으며 다음 상대를 찾아 이동했다.

다 또래이고 비슷한 실력이라 그런지 대련이 끝난 조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이대제자들을 날려 버렸다.

정현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던 것이다.

“악!”

“억!”

“흐엑!”

초반에는 그나마 체력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버텼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대가 바뀌는 속도가 빨라졌다.

체력이 떨어지자 집중력도 덩달아 떨어지면서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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