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장. 시작인가? -02
“그놈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녀석들이라. 없는 게 세상에 유익해.”
“후후!”
눈곱만큼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말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난희주가 웃었다.
그리고 그건 백설도 마찬가지였다.
하오문도 정사중간의 문파이지만 팔흉은 악 중의 악이었다.
존재 자체가 불필요했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을 텐데 들어줘서 고마워.”
“이 정도 가지고 뭘. 우리가 받은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소문주님의 말씀이 맞아요. 저도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해요.”
“둘 다 왜 이렇게 나에게 기름칠을 할까. 혹시 부탁할 거 있어?”
반호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왠지 모르게 싸한 느낌이 살짝 들어서였다.
무릇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기에 반호진이 난희주를 지그시 바라봤다.
“내가 뭐 꼭 부탁할 게 있어야지만 이러는 줄 알아?”
“아냐?”
“난 그렇게 계산적이 사람이 아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럴지 몰라도 오빠에게는 아냐.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도 않고.”
“그래?”
“응!”
난희주가 격렬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반호진은 반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순히 믿기에는 철혈마녀라는 별호가 잊히지 않아서였다.
아직은 별다른 별호가 없는 난희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철혈마녀라는 별호를 다시 손에 넣을 것 같았다.
“네가 그렇다면야. 저녁은 먹고 갈 거지?”
“오빠가 쫓아내지 않으면?”
“그럼 다 같이 먹자. 너 바쁘지 않으면.”
“알았어!”
모두 함께 먹자는 반호진의 말에 백설도 반색했다.
이런 자리를 통해 친분을 더욱 돈독히 해서 나쁠 건 없어서였다.
실제로 당장 급한 일은 없기에 백설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무사들에게도 전음을 보냈다.
***
나뭇잎들이 빨갛고 노란 색깔로 물들어 가며 가을을 알리듯이 해가 떠 있는 시간도 점차 짧아졌다.
어느새 노을이 구름을 붉게 물들여 갈 때 회의실 겸 접객실로 사용하는 가장 큰 방에 일행들이 모였다.
“어어?”
반호진 다음으로 가장 먼저 방에 들어온 서조운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자리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물건이 탁자에 놓여 있어서였다.
“으응?”
“어라?”
그런 반응은 뒤이어 방에 들어온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건에 모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그리고 그건 마지막에 등장한 난희주와 백설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게 식탁 한가운데에 놓여 있자 놀란 얼굴로 두 눈을 껌뻑거렸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지금 저기에 있는 게 제가 예상한 것 맞죠?”
“뭘 예상했는데?”
아직도 놀람이 가시지 않은 얼굴의 서조운을 보며 반호진이 반문했다.
얼굴 가득 장난기를 담고서 말이다.
그 모습에 서조운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술 아니에요?”
“맞아. 소홍주라고 제법 비싼 술이라던데?”
“진짜 술이라고요?”
“응.”
서조운은 물론이고 모두가 놀랐다.
설마 했는데 진짜 술이라고 하자 다들 똑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번갈아 쳐다봤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서조운에 이어 선우방이 입을 열었다.
얼굴 가득 미심쩍은 기색을 띠고서 말이다.
지금까지 술을 기피하다시피 했던 게 반호진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술자리를 만들자 의아한 걸 넘어 이상했다.
“생각해 보니까 단 한 번도 이런 자리가 없었잖아. 매일 밥만 먹거나 차만 마셨지. 그래서 한 번 정도는 다 같이 모여서 술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이 자리를 마련했어. 추억도 될 테고.”
“저는 좋습니다!”
“저도 좋습니다.”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용척이 냉큼 대답했다.
그로서는 이런 자리가 좋으면 좋았지 싫지 않아서였다.
정이륭 역시 가끔 혼자 술을 마시기도 했기에 웃으며 동조했다.
“이륭이는 술도 담글 줄 아니까.”
“진짜?”
“에?”
선우방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정이륭에게 향했다.
이런 건 처음 들어서였다.
함께 생활한 지 제법 되었음에도 몰랐던 사실이었기에 반호진을 비롯해서 일행들이 하나같이 놀란 눈으로 정이륭을 바라봤다.
“하하하. 사부님께서 술을 좋아하셔서 어쩌다 보니 배우게 되었습니다. 전문적인 건 아니고, 간단하게 담그는 정도입니다. 어깨너머로 배운 거라서요.”
“나도 얼마 전에 알았어. 혼자 마시고 있더라고.”
선우방이 씨익 웃으며 정이륭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정이륭이 어색하게 웃었다.
왠지 모르게 혼자만의 비밀을 들킨 것 같아서였다.
“사내대장부라면 술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에 있어 음주가무는 빼놓을 수가 없으니까요.”
“넌 좀 심하게 파고들었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지저분하게 놀지는 않았습니다. 이건 맹세할 수 있습니다!”
음주가무 운운하는 모용척을 반호진은 두 눈을 가늘게 만들고서 바라봤다.
모용척의 과거 행실을 떠올려 보면 지금의 발언을 곧이곧대로 믿어 주기 힘들어서였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는지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어?”
“왜 그러세요?”
“오, 오늘 많이 다르신데요?”
“그래요? 어떤 점이요?”
자리에 앉던 서조운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자 난희주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얼른 말해 보라는 듯이 물어봤던 것이다.
“화장이 조금 달라진 거 같은데요? 백 소저도 그렇고.”
“맞아요. 신경 좀 썼어요. 여자들은 가끔 그런 날이 있거든요. 제대로 꾸미고 싶은 날이요.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꼭 성공하는 건 아닌데 오늘은 운이 좋았어요. 화장이 제대로 됐거든요. 설이도 그렇고.”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부끄러운 모양인지 백설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집중된 시선을 받는 것도 처음이지만 화장을 한 게 익숙하지 않았기에 백설은 좀처럼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잘 어울리네.”
“그래? 평소에도 이렇게 하고 다닐까?”
“그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근데 웬일이래? 술은 나도 예상치 못했어.”
“마시기 싫은 사람은 안 마셔도 돼. 억지로 먹일 생각은 없어.”
반호진은 굳이 마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으나 일행들 중 누구도 안 마시겠다고 하는 이는 없었다.
이런 자리가 흔치 않기에 다들 즐기려는 기색이 완연했다.
“잠깐만. 우리는 괜찮아도 조운이나 의성이는 아직 이르지 않나?”
하나둘 자리를 채우는 음식들을 보며 반호진이 일행들에게 한 잔씩 따라 주는데 선우방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나이가 애매한 이들이 있어서였다.
“술은 어른들한테 배우는 거라 들었습니다.”
“맞아요. 한두 잔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흐음.”
서조운과 사마의성의 말에도 선우방은 미간을 좁혔다.
어른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고민이 되어서였다.
“참고로 저는 사부님께 이미 배웠어요.”
“넌 조금만 마셔.”
“많이도 마실 수 있는데? 나 은근히 술 잘 마셔.”
손을 살짝 들고 말했던 난희주가 씨익 웃었다.
내공을 쓰지 않으면 반호진보다 더 잘 마실 수 있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그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술 잘 마시는 게 자랑이냐. 적당히, 기분 좋게 마시는 게 좋은 거지.”
“내 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마 내가 걱정되는 거야?”
“네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주사가 무서운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취할 일은 없으니까.”
자신만만한 난희주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백설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난희주와 대작을 해 본 게 그녀였다.
그렇기에 백설은 난희주의 호언장담이 진짜임을 잘 알았다.
“백 소저를 보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물론이지. 설이도 은근히 잘 마셔. 내공을 안 쓰면 거의 나만큼 마실걸?”
“아하하하.”
갑자기 집중되는 시선에 백설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제법 친해졌음에도 이렇게 모두가 쳐다보면 이상하게 백설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편해지긴 했어도 당장 이 방의 주인인 반호진은 소림검성이라 불리는 절대고수였고, 좌우로 앉아 있는 이들은 무림의 신성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다른 분들은?”
“얘기해 봤는데 모두 다 같이 먹는 건 힘들 거 같아. 특히나 술자리는 더더욱. 그래서 내일 따로 술과 맛있는 음식을 챙겨 주기로 했어.”
“호위무사 일도 힘든 일이라니까.”
“해 본 것처럼 말한다?”
“직접 해 보지는 않았어도 많이 봤으니까.”
하오문의 일에 이래라저래라할 수는 없기에 반호진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여기서 더 말하는 건 월권이었기에 반호진은 서조운과 사마의성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우와.”
“감사합니다.”
“가볍게. 딱 기분 좋은 정도로만.”
반호진이 따라 주는 술을 서조운과 사마의성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반호진이 직접 따라 주는 것이었기에 둘 다 예의를 다했다.
“우리가 주도를 가르쳐 줄 줄이야.”
“주도가 별거 있나. 맛있게 마시고, 즐겁게 즐기고, 주사 안 부리면 되지.”
“그게 정답이긴 해. 그럼 한 잔 할까?”
“그래.”
모두와 차례대로 눈을 마주한 후 반호진은 술을 들이켰다.
식도가 화끈해지는 느낌과 함께 소홍주 특유의 그윽한 향이 올라왔다.
동시에 취기도 확 올랐다.
술에 익숙한 몸이 아니다 보니 몸이 바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크흐!”
“으허, 좋다!”
“맛있는데?”
술맛을 아는 이들은 특유의 소리를 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처음 마시는 서조운과 사마의성도 의외로 입에 맞는지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맛있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물론이고 선우방과 모용척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냐?”
“의외로 맛있는데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느낌이기도 하고요. 좀 독한 거 같긴 한데 못 마실 정도는 아니에요.”
“저는 깔끔하고 좋은데요? 향도 마음에 들어요.”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호의적인 반응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였다.
“맛있다고 홀짝이면 어느 순간 훅 간다.”
“에이. 저를 뭐로 보고. 형님이 계시는데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맞아요.”
모용척이 오랜만에 형 노릇을 하겠다며 한마디 했으나 본전도 찾지 못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난희주와 백설이 손을 가리고서 웃었다.
또르륵.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술자리를 만든 거야?”
“좀 전에도 말했다시피 이런 자리가 없었잖아. 이제는 조운이와 의성이도 열여덟이 됐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둘 다 결혼을 해도 이상한 나이는 아니더라고.”
“그렇기는 하지. 일찍 가는 경우에는 열일곱, 열여섯에도 가긴 하니까. 오히려 무림인들이 많이 늦게 가는 편이지.”
반호진의 빈 잔에 소홍주를 따르며 선우방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새삼 동생들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우리 둘이 술 한잔했을 법도 했는데, 안 했지.”
“수련이 중요했으니까. 나를 비롯해서 애들도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고. 아, 그래서 오늘이구만?”
“적당하잖아?”
“귀신같다니까.”
“가끔은 풀어 줄 때도 필요해. 너무 팽팽하게 당겨져 있으면 끊어지니까. 또 이번이 아니면 이런 자리를 만들기 힘들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에는 반호진이 선우방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런데 선우방의 술잔이 채워지기 무섭게 반호진의 앞으로 빈 잔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나도 한 잔 더 줘.”
“저도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