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02화 (202/468)

제 68장. 시작인가? -01

“당연히 놀랄 일이지. 자그마치 상관세가의 가주와 소가주가 나한테 고개를 조아린 건데. 물론 그 이유는 구 할이 오빠와 소림사 때문이겠지만. 만약 나 혼자였다면 절대 머리를 숙이지 않았을걸? 오히려 나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하오문을 집어삼키려고 했겠지.”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지.”

“그래서 더 감격스러워. 사실 사부님도 이 자리에 오고 싶어 하셨어. 상관세가주와 소가주에게 사과를 받는 경험은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험이니까.”

난희주가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동안 상관세가를 비롯해서 몇몇 무림세가들에게서 받았던 온갖 억압과 핍박들이 이번 일로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특히 느물느물하던 상관적이 부글부글 끓는 눈빛으로 어쩔 수 없이 사과하는 모습이 그렇게 통쾌하고 시원할 수가 없었다.

상관보도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두 눈에 서린 감정만큼은 가리지 못했다.

“같이 오지 그랬어. 문주님과 같이 와도 상관없었는데.”

“직접 받고 싶어 하셨지만 아무래도 얼굴을 드러내야 하는 게 좀 부담스러웠나 봐. 나야 이미 드러났지만 사부님은 아니니까. 그래서 진짜 아쉬워하셨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그러면서 오빠에게 진짜 고맙다고, 감사하단 말을 전해 달랬어.”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시발점은 분명 난희주였으나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상관세가가 괴왕 단위를 보내서였다.

그래서 지금의 결과가 나온 것이기에 솔직히 이런 말은 좀 부담스러웠다.

“왜? 너무 자주 들어서 이제는 질리나?”

“이런 건 질리지가 않지. 부담스럽다면 모를까.”

“오빠는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돼.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넘치도록 있으니까. 오빠가 우리를 생각해 주지 않았다면 이런 자리도 없었을 거 아냐.”

“정확하게는 상관세가를 더 골려 줄 생각이 컸지만.”

“그렇지만 저변에는 나와 하오문이 있다는 뜻이니까.”

난희주가 씨익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본심은 다르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의외로 반호진은 속마음을 드러내는 데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근데 그게 난희주는 솔직히 귀여웠다.

반전 매력이 있다고나 할까.

하는 행동은 상남자 저리 가라 할 정도인데 의외로 세심한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너 편한 대로 생각해.”

“안 그래도 그러고 있어. 이제는 오빠에 대해서 좀 알 것 같거든. 후후후.”

“과연 그럴까?”

“그보다 오빠도 알고 있지? 저 작자들 절대 그냥 지나가지 않을 거란 걸. 당장은 오빠의 무위 때문에 참고 있지만 틈이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물어뜯을 거야.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를 갈고 있을걸?”

“당연히 그렇겠지. 근데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어. 그걸 현실에 구현하는 게 문제지.”

난희주보다 상관보와 상관적에 대해 더 잘 아는 게 반호진이었다.

때문에 반호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이미 훤히 보여서였다.

“자신만만한데?”

“그럴 만한 실력이 있으니까.”

“와. 거만한 말인데 부정할 수가 없네. 십대세가 중 한 곳인 상관세가의 수장을 찍어 누른 걸 직접 봤으니. 근데 알지? 무림은 힘이 제일 법칙이지만 정보력도 무시할 수 없다는 거? 나도 나 나름대로 복수할 방법을 찾을 거야. 사과를 했다고 해서 앙금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다른 명문세가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사부님 역시 상관세가를 예의주시할 거라 하셨거든. 이번 사과가 마음에 안 든 건 사부님과 대사형도 마찬가지더라고.”

난희주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소림사가 나선다면 상관세가의 상황이 지금보다 악화되면 악화됐지 나아지지는 않을 게 분명해서였다.

상관보는 이번 일로 사태를 봉합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어설픈 봉합은 서로의 앙금만 더욱 키울 뿐이었다.

더욱이 부분적으로나마 사과를 했다는 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말은 소림사나 담현, 법무가 본격적으로 상관세가를 압박할 명분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막말로 오빠가 전면에 나서도 상관세가는 할 말이 없지. 둘 다 끝났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아니지. 상관세가도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으니 쌍방 다 시작인가.’

난희주는 상관보, 상관적 부자와 같은 족속들에 대해서 잘 알았다.

지금은 반호진의 위상에 짓눌려 있지만 언제고 틈이 보인다 싶으면 미친개처럼 달려들 터였다.

그때까지 오늘 있었던 일을 수도 없이 곱씹으면서 말이다.

‘오빠뿐만 아니라 나와 본문을 향해서도 복수심을 불태우겠지.’

난희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제 상관세가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난희주는 정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질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역으로 잡아먹어 주겠어.’

상관세가가 무림십대세가 중 한 곳으로 불리는 곳이라 하나 하오문의 전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현재는 홀로 덩그러니 떨어진 상태였기에 난희주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면대결은 아직 힘들지 모르나 싸움이라는 게 꼭 정면승부를 봐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싸움과 전쟁에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었다.

‘굳이 상대방에게 유리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지.’

심지어 하오문은 상관세가와 달리 정사중간의 문파였다.

그런 만큼 상관세가보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훨씬 다양했다.

“근데 사부님이나 사형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싶네.”

“오빠랑 내 선에서 정리될 정도이긴 하지. 상관세가가 다른 무림세가나 문파들과 연합하지 않는 이상. 상관세가 하나쯤이야.”

“이야. 자신감 넘치는데?”

“상관세가만이면 안 무서워.”

난희주가 오랜만에 콧대를 세웠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그렇지 하오문도 어디 가서 꿀리는 세력은 아니었다.

진짜 만만했으면 이미 진즉에 다른 세력에 복속되었을 터였다.

지금까지 상관세가처럼 하오문을 탐낸 곳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래. 아주 좋은 모습이야. 자신감을 가져야지.”

“응? 웬일이야? 오빠가 좋은 말도 해 주고?”

“내가 항상 악담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아?”

“악담까지는 아니더라도 칭찬에 인색한 성격인 건 맞지.”

“할 때는 해. 할 일이 별로 없어서 안 한 것뿐이지.”

난희주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반호진을 쳐다봤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려서였다.

“조심하라는 말은 안 해도 되겠네. 뭐, 너야 알아서 잘하니까.”

“당연하지. 참, 저번에 산채들 털면서 구조한 사람들 있잖아.”

“맞아. 어떻게 됐어?”

“아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어. 친척이 없는 경우에는 일단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내가 신경 쓰기로 했고. 그리고 여자들은 모두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해서 지금은 본문에서 일을 하고 있어.”

“역시 그렇게 됐나.”

반호진의 얼굴에 언뜻 씁쓸한 기색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산채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기에 반호진은 그녀들의 선택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게 그녀들과 아이들에게 행복한 것일 수도 있었다.

“너무 안쓰러워하지 마. 다들 잘 지내고 있으니까. 오빠한테도 안부 전해 달라고 했어. 구출되었을 때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었다고. 그래서 미안하고 고맙대.”

“행복하게 잘살면 된다고 전해 줘. 날 만나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으니 이 정도가 적당하겠다.”

“은근히 세심하단 말이지. 보통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데.”

“난 늘 열린 마음으로, 열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야.”

“흐음.”

난희주는 팔짱을 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그러나 표정과 눈빛을 보면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까웠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해. 나는 나대로 생각할 테니.”

“장난이지, 장난. 난 언제나 오빠 편이야. 앞으로도 그렇고.”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내가 이런 말 한다고 해서 오빠가 이상한 부탁을 할 사람은 아니잖아?”

난희주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함께한 시간이 제법 되기도 했거니와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이제는 반호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난희주는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반호진은 이런 사람이라고 말이다.

“살아가면서 제일 조심해야 하는 게 말조심이야. 입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말을 많이 해서 좋을 건 없지.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저번에 내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슬슬 수집한 것들이 얼추 정리되었을 것 같은데.”

“장강수로채, 황하수로채, 동정수로채에 관한 거 말이지? 안 그래도 오는 김에 가져왔어. 최근에 대한 내용들로 정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 최대한 정확도를 높이고 싶었거든. 잘하는 분야에서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잖아?”

똑똑똑.

난희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 밖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바로 백설의 기척이었다.

“들어오시죠.”

“실례하겠습니다.”

반호진의 허락에 백설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방 안에서의 대화는 모두 들을 수 있었기에 백설은 깊게 감동한 얼굴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허락만 한다면 절이라도 올릴 기세였다.

“오빠에게 줘.”

“네.”

하지만 임무가 있기에 백설은 대신 눈빛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품에 안고 온 두꺼운 책자를 건네면서 말이다.

“……이렇게나 내용이 많아?”

“수로채만 해도 세 개인데 이 정도면 간략한 거지. 한 장에 사람 한 명에 대한 내용만 적어도 이거의 몇 배는 될걸?”

“듣고 보니 그러네.”

총 두께가 한 뼘을 훌쩍 넘을 것 같은 모습에 반호진은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양이 적지는 않을 거라 예상하긴 했으나 그래도 많아서였다.

“이건 일차야. 아직 덜 정리된 것들이 있어서 그건 인편을 통해서 보내 줄게.”

“신경 많이 썼네.”

“이 정도는 당연하지. 오빠가 부탁한 건데. 그리고 우리도 주기적으로 하는 일이야. 금가장만큼은 아니지만 알게 모르게 수적들이랑 부딪치는 일들이 많거든. 가끔 힘을 합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지.”

촤라락.

반호진은 백설이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는 책들을 받아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가장 위에 있는 책자를 집었다.

“숫자 순서대로 보면 편할 거야. 이유가 따로 있는 건 아니고 각 수로채별로 정리했어. 정확도는 나름 높아. 아무래도 직접 보고 판단을 내린 게 아니라 주변 정보들을 취합해서 만든 거라 약간의 오차는 있을 거야. 오빠 정도라면 상대의 무공 수위가 훤히 보이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건 감안해 주었으면 해.”

“당연히 그래야지. 이 정도만 해도 예상했던 것 이상인데.”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진심이 담긴 반호진의 말에 난희주는 물론이고 백설도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그간의 노고를 인정받는 것 같아서였다.

“사실 이 정도까지 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 사실 녹림십팔채가 약해지면서 우리가 얻은 반사이익도 상당하거든. 팔흉도 오빠가 거의 다 쓸어버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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