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장. 제대로 해야지. -02
상관보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툭 하고 내뱉은 한마디가 심장을 관통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놀람도 잠시, 상관보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명백한 증거나 증인이 없는 이상 그를 옭아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처럼 떠보는 것밖에 없지. 이게 최선이야.’
이미 담현에게도 당했었기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되기도 했다.
덕분에 상관보는 창졸간에 신색을 회복하고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자네였구먼! 괴왕이 소림사 뇌옥에 갇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자네일 것 같았네.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나만이 그렇게 믿었었지!”
“괴왕을 저에게 보냈으니까요.”
“크흠! 내가 보낸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나는 결백하고 억울하네! 물론 자네가 그렇게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인정하네. 내 자식과 안 좋은 일로 부딪쳤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말일세. 하오문은 믿을 수가 없는 것들이네. 속이 시커먼 것들이지. 백도무림에 뒤통수를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어쩌면 우리 아들이 하오문의 암계에 당한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반호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짧은 사이에 이런 변명거리를 생각해 낸 게 말이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소가주의 말만 들으면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지금 중요한 게 하오문이 아닐 텐데요. 절 찾아온 목적을 잊으신 것 같습니다. 아니면, 가주님의 변명과 핑계를 제가 계속 들어야 합니까? 그럼 나가시죠. 저는 들을 생각 없습니다.”
“자, 잠깐만!”
상관보가 황급히 반호진의 말을 끊었다.
본능적으로 여기서 나가는 순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마무리를 짓게 되면 일이 더 악화될 거라는 걸 느껴서였다.
“다른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결정하시죠.”
“자자, 너무 그렇게 까탈스럽게 굴지 말고. 우리 서로에게 좋은 쪽으로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이렇게 나와 날을 세워서 좋을 게 없지 않나. 사람이 실수 한 번 했다고 너무 몰아붙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네.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의 실수였음을 인정하겠네.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잘못한 게 맞으니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정말 미안하네.”
어색하게 웃으며 상관보가 빠르게 말을 뱉었다.
그러고는 상관적에게 눈짓했다.
얼른 사과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상관보의 닦달에도 상관적은 입술만 깨물며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부분적으로만 인정하겠단 말이군요.”
“정확하게는 짚고 넘어갈 건 짚고 넘어가자는 말이지. 하지 않은 짓을 했다고 인정할 수는 없지 않나.”
의심이야 가겠지만 증거가 없기에 상관보는 지금까지 하던 대로 잡아뗐다.
사실 이것 말고는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했고.
“이왕 짚고 넘어갈 거 제대로 짚고 넘어가죠. 두 분이 사과할 사람은 저 말고 한 명 더 있습니다.”
“방장을 말하는 겐가?”
“아뇨. 하오문의 소문주입니다.”
“……!”
은근슬쩍 사과를 하지 않고 넘어갔던 상관적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깜짝 놀란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옆에 앉아 있던 상관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에서, 이 순간에 난희주의 이름을 꺼낼 줄은 몰랐기에 상관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게 하오문의 소문주이지 않습니까. 거기에 저는 우연히 끼어들게 된 것이고. 그러니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는 그때처럼 세 사람이 모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분적인 사과라고 해도 말이죠.”
“…….”
막힘없이 술술 말을 이었던 상관보가 지금만큼은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복잡한 눈빛으로 입술만 핥았다.
생각이 많아지자 입술이 바짝 마르는 모양이었다.
반면에 반호진은 상관보와 달리 여유로웠다.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니 하오문의 소문주가 오면 다시 오시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시발점은 분명 그 아이인 건 맞지만 중요한 건 우리와 자네 사이의 오해이지 않나? 이것만 풀면 될 것 같은데.”
상관보는 지금까지 그랬듯 자연스럽게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대화를 이끌어 갔다.
사실 그가 여기까지 온 것도 소림사라는 배경과 반호진의 실력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절대 숭산에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한데 난희주에게도 머리를 숙이라고 하자 상관보의 안면이 파르르 떨렸다.
“저는 혼자서 사과를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또한 부분적인 사과를 받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니 그게 싫으시다면 그냥 나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아마 다음번에 만났을 때에는 이렇게 대화만 하지는 않겠지요.”
반호진은 조금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상관보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노력했건만 결과가 달라지지 않아서였다.
실력과 별개로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내심 자기 뜻대로 주무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오판이고 오만이었다.
반호진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실력과 배경을 교활하게 활용했다.
스물한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오?”
“싫다면 나가면 되오.”
이를 악문 채로 물어보는 것 같은 상관적을 마주 보며 반호진이 손을 들어 출입구를 가리켰다.
불만이 있다면 언제라도 나가면 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걸 보고도 상관적은 얼굴만 붉힐 뿐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관적도 잘 알고 있어서였다.
“일단 알겠네.”
무거운 침묵이 실내를 점점 더 잠식해 갈 때 상관보가 입을 열었다.
어중간한 대답과 함께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 말에 상관적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반호진의 말에도 상관보는 대답이 없었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방을 나섰다.
그런데 방을 나오기 무섭게 상관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져서였다.
“……아버지.”
“일단 돌아간다.”
“예.”
상관보만큼이나 상관적의 얼굴도 잔뜩 찡그러져 있었다.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더 열 받는 건 이렇게 당했음에도 큰소리 한 번 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상관적은 그게 너무나 화가 났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참지만, 이 빚은 나중에 반드시 되돌려줄 것이다!’
상관보를 따라 밖으로 나온 상관적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전각을 올려다봤다.
당장이라도 반호진을 씹어 먹을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반호진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똑똑똑.
“들어오너라.”
“예.”
늦은 시각이었지만 반호진은 그럼에도 방장실을 찾았다.
담현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방장실에는 그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사제와 관련된 일인데 나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요. 소림사하고도 엮여 있는 문제니까요.”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법무를 마주 보며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법무는 알 자격이 있었다.
동문수학한 사이이기도 하거니와 차기 방장이 법무이기에 반호진은 대답하며 착석했다.
“한 잔 받거라. 두 사람 때문에 편히 마시지 못했을 텐데.”
“마시는 건 잘 마셨습니다. 두 명이 안 마셨지요.”
“허허허.”
반호진의 성격을 알기에 어느 정도 짐작하기는 했었다.
근데 진짜로 둘에게 그럴 줄은 몰랐기에 담현은 실소를 흘렸다.
“사부님께 들어 보니 반쪽도 안 될 법한 사과를 했다던데. 단위를 보낸 사실에 대해서는 극구 부인했다고.”
“저한테도 그랬습니다. 당당하게 오해라고 하더라고요.”
“허!”
법무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들어도 정말 기가 차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철면피도 그런 철면피가 없을 정도였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아마 본인도 알고 있을 게다. 자신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증거가 없다는 것도. 그걸 믿고 저러는 게지.”
“그래도 십대세가 중 한 곳이라 불리는 상관세가의 수장이 하는 짓이라고는 너무 간교합니다. 만약 사제의 사문이 본사가 아니었고, 사제의 실력이 사룡 정도였다면 정말 크게 다쳤을 겁니다.”
법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행히 반호진의 실력이 알려진 것보다 높아서 화를 피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재활 치료를 받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랬겠지. 그래서 나 역시 참지 않은 것이고. 그건 분명 잘못된 행동이니까.”
법무만큼은 아니지만 담현 역시 이번 일로 크게 노했었다.
반호진이 강했기에 별 탈 없이 지나간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그리고 거기에 괘씸죄가 추가됐다.
순순히 인정하고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증거가 없다는 걸 이용해 꾀를 부렸기에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담현도 속으로 많이 언짢은 상태였다.
“제가 보기에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정신이라면 절대 이렇게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도 분명 저희가 많이 참고 있다는 걸 알 텐데.”
법무가 평소답지 않게 분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 정도로 이번 사안은 심각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향후 소림사를 든든하게 떠받칠 반호진이 크게 다쳤을 수도 있기에 법무는 평소와 달리 강경하게 발언했다.
“우선은 호진이의 얘기를 들어 보자꾸나. 화는 그 후에 내더라도 늦지 않다.”
“알겠습니다.”
“그래. 널 찾아가서 뭐라고 하더냐?”
법무가 차를 냉수 마시듯이 벌컥벌컥 마시는 걸 일별하며 담현이 물었다.
그 말에 반호진이 한 차례 심호흡을 하며 간략하고 명료하게 설명했다.
“오해를 풀자는 식으로 저를 계속 유도하더군요. 그래서 사과는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일단 어중간한 사과는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이 한 명 부족해서 그 사람이 오면 다시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하오문의 소문주 말이로구나. 하긴, 소문주로 인해서 일어난 사건이기는 하지.”
“그래서 사부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독단적으로 일을 키운 것 같아서요.”
“소림에 피해가 갈 것 같아서?”
“예.”
반호진이 생각하기에 상관보에게 내민 조건은 합당했다.
그러나 문제는 상관보가 상관세가의 수장이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오늘도 상관세가주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수작질을 부리기도 했고.
때문에 반호진으로서는 우려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다. 네가 잘못한 게 있느냐?”
“없습니다. 저는 곤경에 빠진 친구를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맞아. 그렇다고 네가 소림사의 제자로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지. 즉 명분은 너에게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솔직히 명분이 없다고 해도 나는 두 사람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사부님.”
조용히 듣고 있던 법무가 슬쩍 자신의 의견도 얹었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따져 봐도 잘못은 상관세가가 했다.
게다가 오늘 보여 준 행태로 인해 괘씸죄까지 추가되었기에 법무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바로잡아야 하고, 책임도 져야지. 나는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