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196화 (196/468)

제 65장.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 -03

“서장요?”

찻잔을 들어 올리던 반호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동시에 묘한 빛을 띠었다.

그러나 하오문주는 그 미세한 변화를 보지 못했다.

워낙에 창졸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져서였다.

“예. 저도 우연찮게 알게 되었는데 서장무림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서장무림은 포달랍궁이 꽉 쥐고 있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러나 묘강이나 북해, 대막하고는 상황이 약간 다르답니다. 대막은 철혈성이 무너지면서 군웅할거의 시기가 도래해서 지금 난리도 아니고요.”

“그건 들었습니다.”

지난 생에서 천하사패 중 한 자리를 차지했던 철혈성이 지금은 사라졌다.

그리고 대막은 난세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패자였던 철혈성이 무너지자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세력들이 들고 일어났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피바람이 부는 중이었다.

“그럼 바로 서장에 대한 것으로 넘어갈게요. 서장은 포달랍궁이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철혈성처럼 확실하게 위치가 공고하지는 않아요. 포달랍궁에 비해 살짝 부족할 뿐이지 뇌음사의 세력도 상당한 편이에요.”

“두 세력이 견제는 해도 싸운 적은 백 년 이내에 없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없을 뿐이지 앞으로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평화가 길었던 건 서장무림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 예를 저는 대막이라고 생각해요.”

툭. 툭. 툭.

반호진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얘기였기에 반호진은 신중하게 생각했다.

“억측일 수도 있지만 최악의 상황도 가정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 게 세상이니까요.”

“저도 동의합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되는 경우는 의외로 흔하니까요. 이해관계에 따라 은원도 얼마든지 털어 낼 수 있는 게 사람이니까요.”

“맞아요.”

하오문주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부분을 볼 때마다 그녀는 반호진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나이가 많고 적은 걸 떠나 반호진은 생각이 상당히 트여 있었다.

고집이나 아집도 거의 없었고.

“아니면 구천문과 포달랍궁이 손을 잡을 수도 있고요.”

“예?”

하오문주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상상도 못 한 말에 정말 크게 놀란 것이었다.

서장무림에 대해서만 신경 썼지 묘강의 구천문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하지 못했었기에 하오문주는 멍한 얼굴로 두 눈을 껌뻑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역사적으로 별다른 교류가 없었던 두 문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그것도 그렇긴 해요. 모든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 하는 게 맞으니까요. 묘강과 서장은 맞닿아 있기도 하고요. 두 지역 다 땅덩어리가 크긴 하지만…….”

하오문주가 미간을 좁혔다.

다른 이였다면 한 차례 웃고 넘어갔을 터였다.

허황되다 못해 헛소리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말한 이가 반호진이었기에 하오문주는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가정일 뿐입니다. 문주님의 말씀대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본 것뿐입니다.”

“근데 실현 가능성이 아예 없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까요.”

“개방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묘강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니 곧 작은 거라고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희뿐만 아니라 금가장도 예의주시하고 있으니까요.”

이유는 달랐지만 하오문과 금가장 역시 새외무림의 상황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오문주는 그중 서장에 대해 좀 더 깊게 알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끼이익.

“들어오세요, 사부님.”

반호진을 방을 나선 하오문주는 곧장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곳에 제자인 난희주의 방이 있어서였다.

대화가 생각보다 길어졌지만 그녀나 난희주에게 시간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다? 어째 피부가 점점 더 좋아지는 거 같은데?”

“요즘 피부 관리에 더더욱 신경 쓰고 있어서요. 보여 줄 사람이 많잖아요?”

“어머? 얘 좀 봐라? 이제는 부끄러워하지도 않네?”

“부끄러워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요?”

난희주가 고혹적인 표정과 눈빛을 지으며 허리를 살짝 틀었다.

가슴과 둔부가 묘하게 돋보이도록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보통의 남자라면 눈이 돌아갈 만한 광경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의 이 모습을 보는 건 하오문주였다.

“호호호호!”

남자도 아니고 이제는 할머니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의 하오문주였기에 지금 난희주의 행동은 애교밖에 되지 않았다.

이미 수도 없이 봤을뿐더러 난희주가 꼬꼬마였을 때부터 키웠었기에 하오문주에게는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이제는 저도 물이 오를 대로 오르지 않았어요?”

“열아홉 살이면 아직 농염미가 부족하지. 남자도 모르는데 어찌 요염함이 나올까?”

“몰라도 할 수 있다고 하던데.”

“그건 타고난 애들이나 가능한 거고. 태생적으로 색기를 흘리는 애들이 있어. 이상하게 남자가 꼬이는 아이들 말이지. 근데 넌 아냐. 그냥 전형적인 미인상이야.”

“치잇!”

난희주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왕이면 다 가지고 싶은데 그렇지가 않아서였다.

남들은 예쁜 얼굴과 몸매를 타고났다고 부러워하지만 난희주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이 어중간하다고 생각했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드실까? 우리 소문주님께서?”

“아니에요. 술 드릴까요?”

“갑자기 술은 왜?”

“차는 오빠랑 드시고 오셨잖아요.”

“참 적응이 안 되는 것 같아. 반 공자님을 오빠라고 부르다니.”

대답을 하지도 않았건만 알아서 술병과 술잔을 챙기는 난희주를 보며 하오문주는 새삼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호진을 스스럼없이 오빠라고 부르는 게 말이다.

아마 그녀가 알기로 반호진을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여인은 현재 난희주 말고는 없었다.

“저희로서는 좋은 일이잖아요.”

“무조건 좋은 일이지. 근데 왠지 선을 긋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 그렇지. 여자가 아니라 여동생으로 선을 그은 것 같다고나 할까.”

“은근히 그런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요. 우리는 오빠, 동생 사이야. 라고 딱 잘라 말한 적은 없잖아요.”

또르륵.

어디서나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게 죽엽청이었으나 비싼 건 비쌌다.

지금 술잔에 따르는 죽엽청이 바로 그런 종류의 죽엽청이었다.

하오문주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술이기도 했고.

“천만다행이지. 아직은 기회가 있다는 뜻이니까. 여우들이 주변에 수두룩 빽빽한데도 말이지. 가장 큰 경쟁자가 백봉이지?”

“아무래도 그렇죠. 모용 공자가 오빠랑 늘 붙어 있으니까요. 근데 그것 때문에 주로 견제당하기도 해요.”

“시선몰이용으로는 딱이지.”

“호호호.”

적나라한 사부의 표현에 난희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표정과 눈빛은 긍정을 표하고 있었다.

“어떻게, 술자리 한 번 만들 수 있겠어?”

난희주는 사부와 함께 대작한 경험이 많았기에 오늘은 술이 아니라 차를 택했다.

같은 건물에 반호진 일행이 있기도 했거니와 굳이 오늘 술을 마셔야 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사부의 잔에만 술을 따르고 자신의 잔에는 차를 따랐다.

“하고 싶다고 그게 되나요.”

“흐음. 많이 죽었네, 우리 희주. 예전에는 못 꼬실 남자가 천하에 없다고 호언장담했었는데. 그 어떤 사내라도 다 꼬실 수 있다고 말하던 자신감은 어디 갔어?”

“쉽지 않은 상대도 있더라고요.”

“오호호호!”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는 난희주의 모습에 하오문주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나 비웃는 건 아니었다.

순수하게 웃겨서 웃는 것이었다.

“역시 세상은 넓더라고요.”

“맞아. 나도 깜짝 놀랐잖니.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정말 상상초월이야. 나 처음에 철혈마황을 잡았다고 했을 때 잘못 들은 줄 알았잖아.”

“저도 같이 있었잖아요.”

“우리 둘 다 같은 표정이었지.”

“맞아요.”

난희주는 차를 홀짝였다.

따뜻한 차가 천천히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몸에 열이 올라왔다.

“그래서 놓치기 아까워. 아예 쳐다보지도 못하면 모를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올려다보지도 말라잖아요.”

“그런 속담이 있기는 하지. 근데 우리 생각을 조금 비틀어 보자.”

“비틀어 보자고요?”

난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의를 알 수가 없어서였다.

“응. 이건 내 생각이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 말 그대로 나 혼자서 생각해 본 거니까. 너보고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알았어요. 제가 그것도 구분 못 할까 봐서요?”

“같은 여자로서 좀 예민한 부분이긴 해서. 그냥 이런 방법도 있다, 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

“알겠으니까 말해 보세요.”

“꼭 정실에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

난희주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사부가 말한 의미를 깨달아서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사실 모두가 본처 자리를 노리고서 경쟁하는 거잖아. 근데 생각해 봐. 당장 오대세가의 가주들만 하더라도 숫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정실과 후실이 모두 있잖아.”

“맞아요. 꼭 독점만이 답인 건 아니죠. 설사 오빠가 싫다고 해도 첩으로라도 받아 달라고 할 여자는 많을 거예요. 그리고 본문을 생각하면 오히려 후실이 나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내가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말한 거야.”

난희주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미 남궁세가, 사천당가, 하북팽가가 대놓고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다.

소림사의 방장인 담현에게 직접 찾아가서 물어봤다는 건 웬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실이 아니라면 난희주에게도, 하오문에게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절대 강요하는 건 아냐. 그냥 이런 방식이 떠올라서 말해 준 거야.”

“알고 있어요. 설마 제가 그걸 모를까요. 그리고 이것도 결국 중요한 건 오빠 마음이에요. 오빠가 싫다고 하면 거기서 끝이죠.”

“맞아. 그래서 신기해. 남자들은 열 여자를 마다하지 않는 족속인데.”

“남자라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건 아니니까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난희주 역시 하오문주와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아 온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편견을 부순 게 반호진이었다.

“너도 신기했던 모양이구나?”

“여느 남자들하고는 너무 다르니까요. 이렇게 면사 없이 편하게 생활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오히려 너무 무신경해서 자존심이 상한다고나 할까요. 만약 서 공자나 다른 분들이 없었다면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거예요. 서 공자가 자존감이 밑바닥까지 떨어지면 끌어올려 주거든요.”

“삼처사첩이 목표라고 하잖니. 호호호!”

하오문주가 크게 웃었다.

그러나 빈정대는 기색은 절대 아니었다.

서조운이 죽다 살아났다는 걸 알기에 오히려 이해하는 쪽이었다.

죽음이 가까워지는 게 눈에 보였을 텐데 어떤 꿈을 못 꿀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조운은 자격이 있었다.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하오문주에게 이 정도는 귀여웠다.

별의별 미친놈들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애교 수준이었다.

“다른 분들의 반응이 사부님하고 똑같아요.”

“난 그래도 응원하는 쪽이야. 충분히 그렇게 해도 될 능력을 가졌으니까. 사실 반 공자님을 제외하면 또래에 비교 대상이 얼마나 있다고?”

“그래서 노리는 곳이 많죠. 선우 공자는 하북팽가와 혼담을 주고받고 있고요.”

“충분히 노릴 만하지. 정 공자도 그렇고, 모용 공자도 그렇고. 그보다 어때? 눈에 들어오는 이들이 있어? 혹 반 공자님께서 은근슬쩍 거론한 아이가 있다거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