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장. 보복은 확실하게. -04
사마의성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서조운을 노려봤다.
자신을 너무 속물로 몰아가는 것 같아서였다.
물론 농담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선우방은 현실적인 부분을 언급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 끗발 있는 곳이라면서요. 어느 정도는 있겠죠. 또 여기가 끝이 아니잖아요. 아직 갈 곳이 수두룩한데.”
“다 모으면 상당하기는 하겠다.”
“주인 다 찾아 줘도 부수입이 짭짤하니까요.”
모용척이 선우방을 보며 씨익 웃었다.
처음이 아니기에 이제는 보기만 해도 얼추 견적이 나왔다.
또 거저 얻는 게 아니라 일한 보상을 받는 것이기에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돈맛은 너희들이 본 거 같은데?”
“솔직히 이만큼 했으면 모를 수가 없죠. 흐흐흐흐!”
“산적들이 쓰는 것보다는 저희가 가져가는 게 낫기도 하고요. 저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사용할 생각이에요.”
단순히 재산이 늘어나는 것에 재미를 들린 모용척과 달리 정이륭은 개인적으로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흔히들 말하는 소외계층에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아예 안 쓸 생각은 없었다.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들이 있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궁색하게 굴지 않을 작정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네, 형님.”
한없이 주기만 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응원해 주고 믿어 주는 반호진의 모습에 정이륭이 활짝 웃었다.
자신은 챙겨 준 게 별로 없다고 하지만 그를 비롯해서 일행들의 생각은 달랐다.
형언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기에 다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은 같았다.
“자, 수색할 시간이다!”
“모두 흩어져서 꿍쳐 놓은 것들 싹 다 찾아내!”
“수상한 것들은 다 뜯어내 봐!”
“기술자들은 한쪽으로 모이고! 사마 공자님과 함께 창고로 간다!”
반호진 일행이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하오문도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신들은 애초에 치울 필요가 없었기에 신경도 쓰지 않고 각각 흩어져서 건물로 들어갔다.
외진 곳에 있는 만큼 각자의 재산을 따로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서였다.
근처에 마을이나 전장이 있는 게 아니었기에 대부분 현물로 가지고 있을 터였고, 하오문도가 노리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다들 고맙네.”
그 모습에 반호진이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 일도 아닌데 다들 열심히 하고 있어서였다.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성심성의껏 하는 모습이었기에 반호진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도 사람이야. 밑바닥 인생이라고 해서 의협심이 없는 게 아냐. 단지 그걸 보여 줄 계기가 없었을 뿐이지. 설마 백도무림인만 협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전혀. 협객은 누구나 될 수 있어. 익힌 무공이나 소속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가장 중요해.”
“내가 이래서 오빠를 좋아한다니까.”
“좋아하기는.”
“왜? 부담스러워?”
난희주가 은근한 눈빛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매혹적인 눈빛으로 지그시 쳐다봤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에 백설은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부담이 안 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삼봉 중 둘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썩 믿음이 가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쳇! 재미없어.”
“재미가 중요한 자리가 아니니까. 우리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자고. 부인들인지, 아니면 끌려온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반호진이 휘적휘적 걸어갔다.
산채에 들어왔을 때부터 기척을 느꼈었기에 반호진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제가 열겠습니다!”
반호진이 산채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단층 목조전각으로 향하자 눈치 빠른 서조운이 한발 먼저 뛰어나갔다.
그러고는 다른 건물들과 다르게 유달리 두꺼워 보이는 문을 열었다.
“어?”
“왜 그래?”
“이거 안 열리는데요?”
“네 힘으로도?”
양옆으로 열기도 하고, 밀어 보기도 하고, 당겨도 봤지만 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우방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쩍 말랐던 예전과 달리 살이 오르면서 근육도 같이 오른 서조운이 문을 열지 못하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안에서 잠겨 있는 거 같아요.”
“그럼 간단한 방법이 있지.”
빠각!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서조운과 선우방의 모습에 모용척이 나섰다.
누가 말을 하기도 전에 대뜸 발길질을 했던 것이다.
실패는 생각도 하고 있지 않다는 듯이 진기까지 실었기에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뒤로 넘어갔다.
“허!”
“어때? 깔끔하지?”
조금 과격하지만 확실하게 문이 열린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모용척이 히죽 웃으며 일행들을 돌아봤다.
“잘하긴 했는데, 좀 과했어. 안에 있는 사람들도 생각했어야지.”
“힉!”
“누, 누구세요?”
내부에는 문이 세 개 더 있었는데 그중 한 곳에서 누가 보더라도 폭행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멍투성이의 여인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드러냈다.
그것도 정이륭과 모용척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말이다.
머리는 산발에 얼굴 곳곳에 남겨져 있는 멍 자국에 일행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산채를 정리하러 온 사람입니다. 혹시 강제로 붙잡혀 있으셨습니까?”
한눈에 보더라도 평범한 몰골이 아니었음에도 반호진은 정중히 물었다.
심리적으로 몰려 있는 사람에게는 사소한 행동도 위협적으로 다가올 수 있어서였다.
특히나 성적 노리개로 붙잡혀 있었다면 온갖 폭력과 핍박에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기에 반호진은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과 어조로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주르륵!
그런데 반호진의 말에 여인이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따뜻한 말투도 말투지만 산채를 정리하러 왔다는 말에 안도의 감정이 들어서였다.
“지, 지금 들린 말이 무슨 뜻이야?”
“뭐라고 하신 거야?”
“……!”
소리 내어 우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는지 두 손으로 입을 막고서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앞으로 두 개의 작은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처음 모습을 보인 여자가 가장 연장자인 듯 두 쌍의 눈동자는 불안감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일행들은 분노를 숨기지 못 했다.
너무나 어린 소녀들의 모습에 분노한 것이었다.
“산적들은 전부 다 죽었어요. 채주와 부채주도요. 그러니 이제는 안심하셔도 돼요.”
“저, 정말요?”
“밖에 소리 못 들으셨어요?”
“듣긴 들었는데…….”
모두가 선뜻 입을 열지 못할 때 난희주가 성큼 나섰다.
옆에는 어느새 백설이 바짝 붙어 있었다.
두 여인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살갑게 손을 잡자 놀랍게도 여자들의 떨림이 점차 멎어갔다.
“모두 죽었어요. 더 이상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산적은 없어요.”
“흑!”
“그러니 이제 마음 놓아도 돼요. 다 끝났어요.”
“흐흐흑!”
난희주의 따뜻한 목소리가 마음의 벽을 녹여서일까.
여인들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방에는 셋만 있던 것이 아니었는지 안쪽에서도 대성통곡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난희주는 반호진에게 눈짓 했다.
“남자들은 나가자. 우리가 있어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네, 형님.”
“알겠습니다.”
전음을 보낸 것도 아니었으나 반호진은 귀신같이 난희주의 눈짓을 알아보고는 일행들과 하오문도들을 데리고 나갔다.
여자들만 남겨 두고서 말이다.
이곳은 난희주에게 맡겨도 되었기에 반호진은 사마의성을 앞세우고 채주의 방으로 향했다.
“의외인 것 같아요. 난 소저에게 저런 면모가 있을 줄은.”
“희주도 여자잖아.”
“여우라고만 생각했는데.”
“저런 경우를 많이 봤을 거야. 어딜 가나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특히나 쓰레기인 놈들은 자기보다 약자를 괴롭히면서 우월감을 가지니.”
반호진이 괜히 산적을 보는 족족 치워 버리는 게 아니었다.
살아 있어 봤자 세상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 산적들이었다.
좋은 산적은 죽은 산적이라고 생각했기에 반호진은 지난 생에서도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었다.
“맞아요.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죠. 근데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함께하길 잘한 거 같아요. 저분들의 집을 찾아 주고, 보내 주는 데 하오문이 분명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문제는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 경우인데.”
“어…….”
서조운이 눈을 껌뻑였다.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단은 구출이 먼저지. 나중 일은 따로 대화를 나눠 보면 되고. 의성아.”
“여기부터는 저에게 맡겨 주세요.”
“그래. 믿는다.”
“네!”
신뢰가 담겨 있는 반호진의 목소리에 사마의성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첫 산채이니만큼 알게 모르게 긴장이 되었던 것이다.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겠으나 중요한 건 성공이 아니라 실수하지 않는 것이었다.
반호진에게 못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사마의성은 진지한 얼굴로 채주가 머무는 전각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
저벅저벅.
길이라고는 전혀 없는 우거진 수림을 반호진이 느릿하게 가로질렀다.
인적은커녕 방향도 제대로 잡기 힘들 정도로 온갖 나무와 풀로 무성했으나 반호진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처음 온 곳이었으나 목적지가 명확하기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길은 몰라도 산적들의 기척은 확실하게 감지하고 있었기에 반호진은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산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역시 일을 제대로 한단 말이지. 이왕이면 싹 다 쓸어버릴 때까지 소문이 안 났으면 좋겠는데.”
뒷짐을 진 반호진은 허리까지 올라온 수풀을 가로지르며 느릿하게 이동했다.
그런 반호진의 눈에는 오래된 목책과 그 목책을 잔뜩 휘감은 덩굴, 그리고 졸고 있는 보초가 보였다.
목책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산채는 꽤 오랫동안 습격을 받은 적이 없는지 산채와 숲의 경계가 없었다.
그 정도로 자연스럽게 주변과 녹아들어 있었다.
“쯧쯧쯧!”
그래서인지 보초를 서는 건지 졸러 나온 건지 반호진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심지어 이인일조가 기본일 텐데도 보초를 서는 산적은 하나뿐이었다.
그마저도 현재 대놓고 숙면을 취하는 중이었다.
“으응?”
졸긴 했어도 잠귀는 밝은 모양인지 반호진이 혀를 차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하지만 비몽사몽인지 연신 눈을 비볐다.
그러다가 반호진을 발견하고는 퍼뜩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너도 내가 누군지 아나 봐?”
“어어어?!”
졸린 표정이던 사내가 반호진의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거칠게 눈을 비벼 댔다.
아직 꿈에서 안 깬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비벼도 반호진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네가 보고 있는 게 맞아.”
“다,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어떻게 왔긴. 직접 산을 타서 왔지. 네놈들 때문에 이 몸이 직접.”
“허어업!”
사내가 숨을 들이켰다.
대화까지 나누었음에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동시에 전신에서 소름이 돋았다.
숭산에 있어야 할 반호진이 이곳에 왔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기에 사내는 다급히 어설프게 만든 초소에 매달려 있는 작은 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허. 누구 마음대로 초를 치려고. 참고로 난 시끄러운 걸 아주 싫어해.”
푹.
창백해진 얼굴로 종을 향해 손을 뻗던 사내가 멈칫거렸다.
딱 한 뼘의 거리를 남겨 두고서 말이다.
조금만 뻗으면 종을 울릴 수 있건만 사내는 그럴 수 없었다.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단검이 저절로 뽑혀져 나와 심장에 박혔기에 사내가 할 수 있는 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호진을 쳐다보는 것밖에 없었다.
“제, 제기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