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장. 보복은 확실하게. -03
가까스로 터진 일갈에 분위기가 일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나운 표정이었던 산적들의 얼굴이 일제히 창백해졌다.
그러고는 너 나 할 거 없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어느 누구도 감히 반호진과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튀, 튀어!”
“왜 이곳까지 온 거야……!”
“그러길래 가만히 있자고 했잖아! 빌어먹을 채주 새끼!”
반호진이 온 이유는 명백했다.
섬서성에서 녹림십팔채가 뒤통수를 쳤기에 그걸 복수하기 위해서 온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산적들은 망설이지 않고 도망쳤다.
싸워 봤자 개죽음이라는 사실을 잘 알아서였다.
휘이이익!
심지어 그중에는 병장기도 챙기지 않고 도주하는 이들도 있었다.
평소였다면 귀중품들을 어떻게든 챙겼겠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뭉그적거리는 순간 반호진에게 붙잡힐 게 뻔하기에 산적들은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개판이구만.”
“당연하지. 오빠가 직접 왔잖아. 저기 새로 채주가 된 놈도 도망치네. 저 사람 원래 부채주였어. 근데 섬서성에서 채주가 죽어서 이번에 채주에 올라간 거야.”
“커헉!”
“사, 살려 주십……!”
산채의 정확한 위치는 몰랐으나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고, 거기에 하오문의 추적술이 합쳐지자 반호진은 어렵지 않게 이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주변을 탐색할 것도 없이 편하게 도착했던 것이다.
거기다 하오문에서 고르고 고른 무인들이 포위망을 구축했기에 도망치는 산적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어딜 가려고!”
“네놈들이 갈 곳은 저승밖에 없어!”
거기에 서조운을 비롯해서 일행들이 날뛰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곡소리가 들려왔다.
몇몇 산적들이 눈치 빠르게 투항해 왔으나 봐주는 이들은 없었다.
살려 줘 봤자 세상에 해악만 끼치고, 나중에 또 뒤통수를 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일행들은 가차 없이 살수를 뿌렸다.
“그나마 가장 낫네.”
“본문에서 파악하기로는 갓 절정에 발을 들인 수준인데, 오빠가 보기에는 어때?”
“정확해.”
“히에에엑!”
난희주의 설명을 들으며 반호진은 느릿하게 걸어갔다.
곳곳에서 산적들이 메뚜기처럼 솟구쳤으나 반호진은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다.
잔챙이들은 일행들이 알아서 정리할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그중 몇몇 산적들이 반호진을 보고 대경했으나 그 표정은 얼마 가지 못했다.
서걱.
잠시라도 멈칫한 순간 서조운의 검이 번뜩였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그리고 난희주가 반호진의 곁에 있어서 그런지 백설도 오랜만에 마음껏 실전경험을 쌓고 있었다.
“오빠가 나설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러게. 난 얼굴을 보인 것밖에 없는데.”
“후후! 그게 가장 크지. 방금 전에 못 봤어? 오빠 얼굴 보자마자 기겁한 거?”
“내 용모파기가 제법 잘 팔리는 모양이야?”
“어, 으음.”
생각지도 못한 한마디에 난희주가 당황했다.
사실이기도 하기에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그런 거 가지고 쪼잔하게 뭐라 안 그래. 네가 소문주지만 일일이 다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고.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는 거지.”
“나도 나름 통제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
“이해해. 그러니까 눈치 보지 마. 네가 아니라 문주님이 지시를 내려도 안 통할 거야. 정보 상인들도 있고.”
“그래도 미안하니까. 그리고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근데 다들 열심히 하네. 저 정도로 열심히 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심하게 눈치를 보는 난희주의 모습에 반호진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실제로 하오문도 백 명은 마치 자기 일처럼 싸우고 있었다.
엄연히 말하면 반호진과 일행들이 복수를 하러 온 거였는데 하오문도들은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를 상대하듯 거침없이 산적들을 베어 넘겼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실전경험이잖아. 또 이렇게 안전하게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없기도 하고. 거기다 받을 게 있으니 더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지.”
“저 정도까지 해 줄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그리고 우리도 나름 쌓인 게 많거든. 산적들 때문에 골치가 아픈 건 금가장만이 아니야.”
“뭐, 품삯은 제대로 지불할 거니까. 최우선적으로는 주인을 찾아 줄 거지만.”
“숨겨 놓은 것도 전부 다 싹 털 거야. 이런 쪽에는 우리가 전문인 거 알지?”
난희주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일행 중에 사마의성이 기관진식에 빠삭하다고 하나 비밀공간을 찾아내는 건 다른 문제였다.
나름 이쪽도 심오한 분야였기에 전문가가 따로 존재했다.
그렇기에 난희주는 자신이 있었다.
‘쓸 만한 것들이 있으면 우리가 가장 먼저 구입할 수도 있고 말이지.’
난희주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총명한 그녀답게 챙길 수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몇 번이나 거래를 했으니 말을 꺼내기도 어렵지 않지.’
난희주의 미소가 짙어졌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쓸모 있는 게 없을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가 아니었다.
이미 원하는 걸 얻었기에 산채에서 얻는 것들은 말 그대로 추가 수당이나 마찬가지였다.
“든든하네.”
“나만 믿어. 이런 쪽은 우리가 전문이니까. 문서 같은 것도 싹 다 털 거고. 털 수 있는 건 다 털 거야.”
“가능하면 의성이랑 같이 해 줬으면 하는데.”
“그 정도쯤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좋네.”
반호진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천재이긴 하나 사마의성은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이번 기회가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깊게 파지는 않더라도 알고 있으면 나중에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근데 네 분 다 대단하다.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강해졌어.”
난희주가 무인지경으로 산적들을 휩쓸어 버리는 네 명을 보며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군계일학이라는 말처럼 네 명은 눈길을 확 끌었다.
그러나 난희주가 감탄하는 건 단순히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네 사람이 발전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기에 감탄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너도 그렇고.”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기 있어?”
“부끄러워하기는.”
“아, 아니거든!”
갑작스러운 칭찬에 난희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가슴은 두근거렸다.
자신의 노력을 반호진이 알아준 것 같아서였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으니 결과가 좋은 거지.”
“그렇다고 해도 성장세가 너무 말이 안 되는 거 같아. 모용 공자님이나 서 공자님은 이유가 있다고 해도.”
“재능이 뛰어난 것과 가진 재능을 개화하는 건 완전히 다르거든. 출발선이 앞서 있다고 해서 결승선이 꼭 가까운 건 아니라서.”
“되게 희망이 되는 말이다.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
“그 길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타고난 재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똑같이 노력한다면 격차가 유지되기는커녕 더 벌어질 가능성이 컸다.
하나 그렇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반호진이 생각하기에는 말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
“너도 재능은 있잖아.”
“알아봐 줘서 고맙네. 후후!”
난희주가 그녀답지 않게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반호진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을 몰라서였다.
그래서인지 조금 전부터 조금 격하게 뛰던 심장이 더욱 빨리 뛰는 느낌이었다.
“내가 잡았다! 이놈이 채주랍니다!”
“아, 아깝네. 조운이한테 지다니.”
“크하하하! 제가 일등입니다!”
반호진이 한가로이 구경하는 사이 채주와 부채주가 잡혔다.
실력은 오십보백보였기에 서조운과 모용척은 어렵지 않게 둘을 사로잡았다.
대신 다른 일행들은 산적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채주와 부채주를 생포했으니 나머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단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끝까지 추격해!”
애초에 싸움이 안 되었지만 산채에 머물고 있던 인원이 적지 않았던 만큼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산적들을 모두 잡을 수는 없었다.
달려들었다면 모를까 처음부터 도주를 선택했기에 산채에서 빠져나간 이들이 상당했는데 하오문도들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추적술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조를 만들어서 도망친 산적들을 추격했다.
단 한 명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쿵! 쿠웅!
그사이 서조운과 모용척은 사로잡은 채주와 부채주를 반호진의 앞에 대령했다.
한데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누가 봐도 딱 죽이지 않을 정도로만 두들겨 팬 모습이었다.
“으어어어…….”
“우웩! 윽!”
“말은 할 수 있겠어?”
강제로 무릎 꿇려진 둘을 내려다보며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해 보이지가 않아서였다.
“이빨은 멀쩡합니다!”
“에이. 이런 일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저희도 이제는 전문가입니다.”
“그게 자랑할 일이야?”
반호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켜보던 하오문도들의 표정은 달랐다.
다들 존경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과 일행들을 쳐다봤다.
난희주와 마찬가지로 일행들이 성장하는 걸 직접 보거나 들었었기에 하나같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지켜봤다.
“이만큼 저희가 성장했다는 뜻이니까요.”
“암! 그렇고말고.”
“뭐, 경험이 많이 쌓이기는 했지.”
자랑스럽다는 듯이 인중을 훔치는 두 사람을 일별한 반호진은 뒷짐을 풀고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데 다가오는 기척에 힘겹게 고개를 든 채주와 부채주가 경기를 일으켰다.
반호진이 직접 다가오자 입에 게거품을 물며 어떻게든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히엑! 히이익!”
“우우! 으어어어!”
“오빠가 염라대왕처럼 보이나 보다.”
“그럴 만하죠. 실제로 녹림십팔채에 가장 많은 피해를 끼친 게 호진이니까요.”
과장 조금 보태서 진짜 죽을 것처럼 입에서 거품을 내뿜는 둘의 모습에 난희주와 선우방이 실소를 흘렸다.
새삼 반호진의 위상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이거 대화가 되겠어?”
“하오문 쪽에 고문에 능한 분이 계시지 않을까요?”
도저히 심문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은 채주와 부채주의 모습에 사마의성이 난희주를 바라봤다.
그녀라면 고문 전문가도 데리고 왔을 것 같아서였다.
“있긴 있어요.”
“무, 무엇이든 말씀드리겠습니다! 대, 대신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제가 더 잘 압니다! 저를 살려 주시면……!”
고문이라는 단어에 두 명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반쯤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피투성이가 된 상태였으나 그래도 아직은 살아 있었다.
그렇기에 둘 다 어떻게든 동아줄을 잡으려 했다.
대부분의 수하들이 죽었지만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을 믿었다.
“일단 들어 보죠. 결정은 들어 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채주이고 부채주였던 이들이 눈물, 콧물을 쏙 빼고 있었으나 사마의성은 눈 한 번 껌뻑이지 않았다.
지금 보이는 눈물이 가짜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애초에 살려 둘 생각도 없었기에 사마의성은 정말 말만 듣고 둘을 죽여 버렸다.
“자! 모두 움직여!”
“예!”
난희주가 손뼉을 치며 지시를 내렸다.
산적들은 모조리 처리했으나 아직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추격조들은?”
“모두 처치했습니다!”
“좋아. 그럼 바로 이동하자.”
“알겠습니다!”
난희주의 지시에 하오문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뒤를 반호진 일행이 뒤따랐다.
“의성이도 이제 돈맛을 보겠네.”
들뜬 기색의 사마의성을 보며 서조운이 놀리듯이 말했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여서였다.
“돈맛이라니. 날 완전 속물로 몬다?”
“근데 산채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