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장. 보복은 확실하게. -02
“맞아.”
난희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라고 이렇게 무작정 찾아오고 싶어서 찾아온 게 아니었다.
연락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상황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반 대협께서 찾아왔다고 싫어하는 티를 내신 적도 없잖아요.”
“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
“불가항력적인 이유도 있고요. 그러니까 저는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해요.”
조리 있는 백설의 말에 난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통계를 대면서 말하니 신빙성이 있어서였다.
게다가 반호진과의 관계도 분명히 좋은 상태였다.
“근데 기분 나빠 하지 않을까? 너무 속 보이는데.”
“그래서 포기하시려고요?”
“그건 좀 그렇지.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 수 있을지 모르고.”
난희주의 시선이 뒤에 도열해 있는 백 명의 하오문도들에게로 향했다.
하오문주가 고르고 고른 인재들이 지금 모여 있는 백 명이었다.
추후 하오문의 기둥이 될 이들이자 미래라고도 할 수 있었다.
또한 반호진이 판매한 무공을 익힌 인재들이 이들이었다.
그런 인재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바짝 긴장해 있었다.
소림검성이라 불리는 반호진을 만난다고 하자 다들 잔뜩 긴장한 것이었다.
“포기할 수 없으면 정면 돌파 해야죠. 사실 이제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잖아요.”
“그렇긴 해.”
“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준비 철저하게 하셨잖아요. 소문주님은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럴까?”
“물론이죠. 제 예상이긴 한데 반 대협은 당황도 안 하실 것 같아요. 소문주님은 반 대협이 당황하신 거 본 적 있으세요?”
백설의 말에 난희주가 두 눈을 껌뻑였다.
곰곰이 기억을 곱씹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반호진이 당황하거나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없었네?”
“천하십대고수에게도 큰소리치고 할 말 다 하시는 분이 반 대협이잖아요. 그런 분이 저희가 무작정 찾아왔다고 당황하시겠어요? 저는 평소처럼 덤덤하게 반응할 거 같아요. 환영까지는 아니더라도요.”
“그럼 다행이지. 일단 기분만 나빠 하지 않으면.”
“거기에 다른 분들도 계시잖아요. 다 호의적이고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백설의 말을 듣고 있으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너무 긴장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뒤에 집결해 있는 하오문도들을 생각하면 자신이 너무 얼어 있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았다.
“후우. 후우.”
난희주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는 서로 편하게 말을 할 정도로 친해지긴 했으나 그녀는 알았다.
아직 보이지 않는 벽이 있음을 말이다.
친해진 건 분명 사실이지만 일행들과 비교하면 많이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소문주님이 잘하시는 거 있잖아요. 당당하고, 자신 있게. 알겠죠?”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냐. 너도 오빠 봐서 알잖아. 어떤 성격인지.”
“화끈하고, 냉철하고, 은근히 다정하시죠.”
“다정? 오빠가 다정하다고?”
“네. 주변 사람들을 진짜 잘 챙기시잖아요. 소문주님도 그렇고요.”
난희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 반응에 백설이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첫인상이 차가워 보여서 그렇지 결과적으로는 그녀의 말 대로였기 때문이다.
“잘 챙기긴 했지. 아니지. 모두가 이득을 봤지.”
“금가장의 소장주도 처음에는 이 공자였잖아요. 솔직히 그때의 이 공자가 소장주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고요.”
“맞아.”
“거기에 서 공자님은 진짜 구명지은을 입었죠. 선우 공자님도 반 대협을 만나기 전에는 그저 그런 후기지수에 불과했죠. 모용 공자님는 잊힌 천재였는데 구제해 줬고. 명왕 대협과 정 공자님은 반 대협이 말 그대로 강호에 끄집어낸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거기에 소문주님도 이것저것 도움을 받았고요.”
“그렇지.”
난희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나같이 맞는 말이어서였다.
특히 그녀가 받은 도움은 실제로 많았다.
당장 이곳에 모여 있는 백 명만 하더라도 반호진이 판매한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꿀꺽!
백설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뒤에 조용히 서 있던 하오문도들 상당수가 동시에 침을 삼켰다.
새삼 반호진과 이래저래 얽힌 게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기 오시는 거 같아요.”
“나도 보여.”
백설만큼의 실력자는 아니지만 난희주도 어려서부터 무공을 수련했던 한 명의 무인이었다.
근래에는 더욱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관도 멀리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다섯 명을 볼 수 있었다.
“사마 공자도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사마세가의 무공을 되찾았다고 하더니. 아니, 반 대협께서 잘 지도해 주셨겠죠?”
“아마도?”
“부럽다.”
백설이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아예 모르면 모를까 지나가는 식으로나마 반호진의 조언을 받은 적이 있기에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툭툭 내뱉는 반호진의 조언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다.
금과옥조라는 절로 떠오를 정도로 반호진은 당사자에게 정말 딱 맞는 조언을 해 주었기에 백설은 사마의성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오빠!”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맞아.”
가까워질수록 점점 속도를 줄인 반호진이 난희주에 앞에 멈춰 섰다.
그러자 난희주가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다 알고 있는 듯해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반호진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반 대협.”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난희주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백설이 자연스럽게 인사하며 시선을 돌렸다.
뒤에 있던 하오문도들도 눈치껏 그녀를 도와주었고.
덕분에 백설은 난희주가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아, 예. 반갑습니다.”
“저희야말로 영광입니다!”
아는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기에 반호진은 하오문도들의 우렁찬 인사를 적당히 받아 주었다.
그러고는 복잡한 표정의 난희주를 바라봤다.
“뭘 그렇게 굳어 있어? 너답지 않게.”
“오늘은 좀 눈치를 보게 되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하오문도들의 목소리 때문일까.
난희주가 빠르게 신색을 회복했다.
일단 반호진을 비롯해서 일행들의 표정이 나쁘지 않다는 것도 긴장이 풀어지는 데 한몫했다.
“예전에는 똑같은 상황이었는데도 당당했잖아.”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어째 시간이 갈수록 더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였다.
“그때와 지금이랑 같나. 오빠 위상이 달라졌잖아. 무려 소림검성 아냐, 소림검성.”
“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 그게?”
“검신이라면 모를까. 근데 뭐, 얼마 안 걸릴 거야.”
난희주는 물론이고 백설도 질린 표정을 지었다.
검성이라는 별호만 해도 사실 반호진의 나이에 얻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반호진은 그조차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신을 운운하자 둘 다 입을 떡 벌렸다.
“거, 검신?”
“왜? 힘들 것 같아?”
“처음에는 그랬는데, 지금 표정을 보니까 오빠 말대로 될 것 같아. 오빠는 지금까지 허튼소리를 한 적이 없으니까.”
“이제야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네.”
반호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대화가 이어지자 본래의 난희주로 돌아온 것 같아서였다.
“오빠 덕분이지 뭐. 유명해지면 사람이 바뀌는 경우가 부기지수인데. 사실 나도 그걸 좀 걱정했거든.”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였나?”
반호진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건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현재 천하십대고수보다, 새로이 무림십왕이 된 상일기보다 세간에 더 많이 거론되는 게 반호진이기에 난희주가 걱정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사람은 또 모르니까.”
“실망인데. 날 그렇게 생각했다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거지, 그럴 거라 믿은 건 아니야.”
“이런 말이 있지. 말이 길어지면 변명이라고.”
“치잇!”
난희주가 새치름한 표정으로 반호진을 흘겨봤다.
못 이긴 척 넘어갈 수도 있건만 참 얄밉게 콕콕 짚었다.
“그보다, 웬일이야?”
“알면서 묻기는.”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한데, 그래도 확실하게 듣는 게 나으니까. 추측은 추측일 뿐이니.”
“지금 섬서성에서 공격했던 녹림십팔채에 가는 거지?”
“맞아.”
난희주 정도라면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기에 반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하오문이라면 자세하게는 몰라도 그의 행적을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건 가능했다.
“일꾼들 필요하지 않아? 복수하는 거야 솔직히 오빠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산채 창고에 쌓여 있을 재화나 표물을 옮기려면 일꾼들이 필요할 거 같은데. 표물을 운송했던 표국을 찾는 것도 일일 테고. 혹은 붙잡혀 있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네가 품삯으로 돈을 원하지는 않을 테고. 대가가 뭐야?”
난희주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미 패가 까인 상태인데 굳이 돌려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무한 대련 훈련. 우리 문도들과도 해 줄 수 있을까?”
묻는 건 난희주였으나 눈빛은 모두가 같았다.
백설은 물론이고 조용히 도열해 있던 백 명의 하오문도들도 마른침을 삼키며 반호진의 눈치를 살폈다.
“무한 대련 훈련이라.”
“히, 힘들까?”
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난희주가 말을 더듬었다.
그 정도로 긴장한 것이었다.
“좋아. 근데 그거 받고 나도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뭔데? 말만 해!”
난희주가 반색했다.
원하는 대답이 반호진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그녀가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내가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난감하거나 어려운 부탁하면 어떡하려고?”
“오빠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아니까. 이제 그 정도 사이는 되잖아?”
“허어. 조금 전과 태도가 너무 달라진 거 아냐?”
“그래서 무슨 부탁인데?”
“장강수로채, 황하수로채, 동정수로채에 대해서 하오문이 따로 모아 놓은 정보를 보고 싶어. 깊게까지는 아니고, 따로 수집할 필요도 없어. 지금 하오문이 가지고 있는 최근의 정보 정도면 돼. 기밀을 원할 정도로 내가 염치없지는 않아.”
난희주는 물론이고 백설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뜬금없이 수로채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자 당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난희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에게 있어 어려운 부탁은 아니어서였다.
“알았어. 바로 모아 볼게.”
“시간은 넉넉히 있으니까 너무 서두르진 않아도 돼.”
반호진의 시선이 난희주의 어깨 너머 하오문도들에게 향했다.
또 찾아가야 할 산채가 한두 곳이 아니기에 시간은 많았다.
뎅뎅뎅뎅!
웬만해서는 울리지 않는 경종 소리가 정신 사납게 산채에 울려 퍼졌다.
한 방향이 아닌 사방에서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경종 소리에 곳곳에서 산적들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갑자기 울리는 경종 소리에 다들 깜짝 놀란 것이었다.
“뭐, 뭐야?”
“웬 경종 소리?”
“누가 장난치는 거 아냐?”
“장난이면 가만 안 둬!”
막 볼일을 보던 중이었는지 뒷간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하의를 끌어 올리며 나온 덥수룩한 중년인이 잔뜩 성이 난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십 년 가까이 지냈음에도 처음 듣는 경종 소리에 다들 하나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서 건물 밖으로 나왔다.
“거거거……!”
“뭐라는 거야? 말을 하려면 똑바로 해!”
그때 산채에서 유일하게 문이라고 할 수는 곳에서 산적 하나가 해쓱한 얼굴로 달려왔다.
희한하게도 핏기 하나 없는 모습이었으나 시끄러워서 그런지 누구 하나 그걸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검성이 왔다고, 새끼들아!”
“히에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