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190화 (190/468)

제 64장. 보복은 확실하게. -01

게다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반호진의 검이 점차 그에게 다가온다는 점이었다.

누가 봐도 확연히 밀리는 모습에 운상의 얼굴이 굳어졌다.

쌔애액!

그때 한줄기 섬광이 운상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반호진의 검이 그의 애검을 뿌리치고 쇄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운상은 자신의 검을 뿌리쳤다는 사실보다 파고든 궤적에 경악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궤적이어서였다.

꿀꺽!

그걸 깨달은 순간 운상은 목에 소름이 돋았다.

생전 처음 보는 궤적도 궤적이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방금 전의 일격이 운 좋게 스쳐 지나간 게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그만하실 생각이시군요.”

“더 하는 게 의미가 있겠소?”

“저는 지금까지의 비무가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반호진의 말에 운상의 동공이 더 이상 커지기 힘들 정도로 확대되었다.

별거 아닌 말이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크게 다가와서였다.

“다시, 다시 해 주시겠소?”

“물론입니다. 아직 밤은 깊으니까요. 그리고 상대가 장문인이시라면 저는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언제 또 장문인과 검의 대화를 실컷 나눠 보겠습니까.”

“허허허. 검의 대화라.”

운상이 반호진의 말을 곱씹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으로 깊은 울림을 주는 말 같아서였다.

동시에 오랜 세월 동안 가슴속에 묻혀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이제야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이 아주 길 것 같소이다.”

“다행히 시간은 많습니다.”

“참으로 다행이오. 빈도 역시 마찬가지라.”

똑같은 미소이지만 묘하게 아까와는 다른 느낌의 미소를 띠며 운상이 검을 움직였다.

땅에 박혀 있던 검으로 다시 이기어검을 펼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검이 허공을 가르는 것과 동시에 그의 신형 역시 반호진에게 쇄도했다.

웅웅웅!

달라진 마음가짐을 보여 주듯 운상의 기세는 좀 전과 완전히 달랐다.

본인은 전력을 다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반호진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일 죽을 것처럼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이거지.’

전신에 소름이 돋을 것 같은 서늘한 긴장감에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그 역시 모든 공력을 끌어올렸다.

지금의 운상은 반호진도 설렁설렁 상대할 수 없는 검객이었다.

일대검호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기에 반호진도 전심전력으로 이기어검을 펼치며 마주 달려 나갔다.

***

은은하게 들려오는 종소리와 독경 소리를 들으며 반호진은 차를 들이켰다.

이제야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너무 조용하니까 이상하구나. 허허허.”

“원래 이게 정상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적응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야.”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차를 음미하며 담현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서 그런지 묘하게 공허한 느낌이었다.

“시끄러운 이들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게 낫지 않습니까.”

“후후후. 시끄러운 사람들이라. 그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되게 섭섭해할 것 같구나.”

“이미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티를 그렇게 냈는데 모르면 그게 더 문제이지 않겠습니까.”

담현이 피식 웃었다.

솔직하면서도 당당한 반호진의 모습은 가끔 그에게 통쾌함을 주었다.

아마 현 강호에서 그들을 이렇게 대하는 이는 반호진뿐일 것이었다.

“세 사람 다 어디 가서 꿀리는 인물들이 아닌데.”

“욕심을 버리면 되는데 그걸 못 버려서 그렇습니다.”

“그 또한 딸 가진 아빠의 애환이니.”

담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찌 보면 모든 슬픔과 괴로움은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욕심을 버리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점이었다.

승려와 도사도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게 욕심인 만큼 보통의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저라서 이 정도로 당하는 거지 다른 상대였으면 저보다 더했을 겁니다. 굳이 저에게 연연하지 않는다면 골라서 시집보낼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렇지. 혼담도 엄청나게 들어오고.”

담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릇 모든 건 상대적이었다.

목표가 반호진이라서 그렇지 다른 이였다면 셋 다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지도, 푸대접을 받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 사람이 포기하지 않는 건 그만큼 반호진을 사위로 얻고 싶다는 뜻이었다.

‘허허허. 천하의 남궁세가, 사천당가, 하북팽가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올 줄이야.’

담현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신기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제자가 너무 일찍 큰 것 같아서.

“그중에 하나 골라잡으면 정말 좋겠는데 말이죠.”

“정말 생각이 없더냐?”

“아직은요. 나중에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이건 제 입장이고. 소저들은 다르니까요. 각자에게 좋은 시기라는 게 있으니.”

“허어. 갑자기 배려 넘치는 말을 하니 적응이 안 되는구나.”

“저 그렇게 막돼먹은 놈 아닙니다.”

반호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쌀쌀맞기는 해도 냉정한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괜한 기대를 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선을 그은 것뿐이었다.

“근데 이 사부는 좀 아쉽구나.”

“어떤 점이요?”

“철이 어중간하게 든 것 같아서 말이다. 가장 좋은 건 제 나이에 맞게 철이 드는 건데, 너는 너무 어중간해.”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죠.”

반호진은 순순히 인정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사부인 담현의 말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일정 부분은 동의해서였다.

왜 그런지도 잘 알고 있기도 하고.

“사실 내심 기대한 게 있었거든. 소림사의 방장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사부로서 제자가 장가가는 광경을 말이야. 어떻게 보면 흔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흔한 일이 아니니까.”

“색다른 경험일 것 같기는 합니다.”

“나에게 있어 너는 자식이나 마찬가지이지 않더냐. 그런 네가 혼인을 하면 또 자식을 낳을 테고. 그럼 손주가 생기는 거지.”

담현이 빙그레 웃었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묘하게 울컥했다.

반호진을 닮은 자식을 떠올리자 아들이든 딸이든 기쁠 것 같았다.

특히 반호진의 아기를 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심장이 묘하게 벌렁거렸다.

“손주가 맞긴 하죠. 엄밀히 따지자면 사손이라 할 수 있고요.”

“그렇지. 사손이지. 나는 사조가 되고.”

상상만 해도 미소가 절로 나온다는 듯이 담현이 웃자 반호진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뜨끔했다.

이게 바로 결혼 압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더구나 청렴결백한 담현의 성격상 누군가의 청탁으로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즉 지금의 발언은 가슴에서 우러난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제 손주가 보고 싶으신지요?”

“그냥 문득 궁금해졌어. 네 자식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불자지만 나 역시 한 명의 사람이지 않더냐? 더욱이 네 자식이면 남도 아니고. 피는 통하지 않았으나 마음은 진짜 손주일 것 같구나. 아들도 귀여울 것 같고, 딸도 깜찍할 것 같고.”

“너무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 성격을 똑 닮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말이 씨가 될 수도 있어.”

담현이 짐짓 정색했다.

진짜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은 풀어졌다.

방금 전의 말은 농담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사실 저도 그게 좀 무섭기는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구나?”

“물론이죠. 무인도 자기 스스로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자세이지만, 조금 안타깝기도 하구나. 사실 그래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이기도 하지만.”

스윽.

담현이 담담히 웃으며 탁자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길쭉하고 통통한 병이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반호진의 눈이 커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소림사의 방장실에서 술을 보게 될 줄은 몰라서였다.

“그건 술 아닙니까?”

“달리 곡차라고도 하지. 허허허.”

태어났을 때부터 승려가 되는 이도 있지만 평범한 삶을 살다가 스님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중에는 술맛을 잊지 못해 곡차라고 말하며 몰래 마시는 이들도 존재했다.

암암리에 눈감아주는 경우도 있었고.

물론 담현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술에 입 한 번 대지 않았었다.

“갑자기 웬 술입니까?”

“나는 마시면 안 되지만 너는 다르지 않더냐. 그리고 원래 술은 어른에게 배우는 법이지. 나는 승려이지만 그래도 어른이기도 하니 자격은 되지 않겠느냐?”

“그렇긴 합니다만.”

“내 듣기로 술을 극도로 피한다고 들었다.”

또르륵.

술병만 준비한 게 아니라는 듯이 담현은 술잔도 같이 꺼냈다.

찻잔보다 작은 잔에 맑고 투명한 술을 따랐다.

“극도로 피하는 것 정도까지는 아니고, 굳이 마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요.”

“맞아. 굳이 술을 마실 필요는 없지. 그런데 너는 불제자가 아니지 않더냐. 가끔씩은 마셔도 상관없지. 술이라는 게 애초에 나쁜 것이었다면 사람들이 독이라고 부르며 기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나쁘다고 말하는 이는 없지 않더냐.”

“있긴 합니다. 경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이유가 사람 때문인 거고. 순수하게 술을 탓하는 사람은 없지.”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네요.”

반호진은 이내 수긍했다.

주정뱅이를 욕하는 건 취해서이지 술 때문인 것은 아니었다.

원인은 술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술을 마신다고 다 주정뱅이, 고주망태가 되는 건 아니었다.

격조 있게 잘 즐기는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무 선을 긋지 않았으면 해서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물론 그게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데 미리 선입견을 가지고 피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너는 분명 많은 걸 이루었으나 네 나이는 이제 약관이다. 나는 네가 젊은 나이를 누리고, 즐겼으면 좋겠구나.”

담현의 말을 들으며 반호진은 술잔을 내려다봤다.

적당히 차 있는 투명한 술잔에 그의 얼굴이 비쳐졌다.

왠지 모르게 꽉 막힌 듯한 인상에 반호진은 피식 웃었다.

어떤 의미로 담현이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꿀꺽!

그걸 느끼자마자 반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알싸한 냄새에서 예상하긴 했으나 상당한 독주인지 식도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한데 한 잔을 비우자 묘하게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크흐!”

“술이 아예 안 받는 체질은 아닌 모양이구나.”

“그렇다고 적응이 되지는 않지만요.”

“허허허. 아직 오묘한 술맛을 온전히 아는 나이는 아니지. 개방주가 말하길 적어도 몇 독은 비워 봐야 술맛을 어느 정도 알게 된다고 하더구나.”

“평범한 사람이 그렇게 마시면 죽습니다.”

차로 입가심을 하며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개방주니까 그렇게 마시는 거지 보통 사람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웬만한 주당이 아니면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내 말을 이해한 것 같아서.”

“저도 다 컸습니다.”

“그렇지. 너무 일찍 커서 그렇지. 참, 만약에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나에게 가장 먼저 말을 해 줘야 한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래. 그거면 되었다.”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듯이 반호진이 술병의 뚜껑을 닫았으나 담현에게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한 발을 내디딘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작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었기에 담현은 흡족하게 웃으며 오랜만에 편안하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

난희주는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었다.

초조한 마음에 습관대로 손톱을 씹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반대쪽 관도를 힐끔거렸다.

“괜찮겠지?”

“지금까지 쌓아 온 친분이 있는데 만나자마자 정색할 것 같지는 않아요.”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워낙에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서 그런지 호위무사라기보다는 자매와도 같은 백설의 말에 난희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이내 반호진의 성격을 떠올리고는 본래대로 돌아갔다.

“네. 이제는 오빠, 동생 하는 사이잖아요. 연락은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요. 이동속도가 그렇게 빠른데 사람을 보낼 수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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